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41화 (241/309)

< Verse 37. Next Stage >

***

당연한 말이지만 뮤지션들에게도 ‘급’이 있다.

S급의 뮤지션은 S급과 콜라보레이션을 하고, A급의 뮤지션은 A급과 콜라보레이션을 한다.

만약 제이지나 나스 같은 래퍼가 완전 무명의 래퍼를 데리고 무대에 선다면?

사람들은 막연히 ‘아, 저 래퍼는 아직 유명하진 않지만 굉장한 가능성이 있는 래퍼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메가 히트 밴드였던 본조비(Bon Jovi)가 전미 투어 때 밴드 신데렐라(Cinderella)를 서포터로 기용해 인기 밴드로 만든 것도 이와 같은 이치였다.

그리고 지금.

The Regency Ballroom에서 공연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은, 오프닝 영상을 통해 무대 위의 ‘동양인’이 케이알에스원과 어울리는 래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오늘 투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피피도 케이알에스원과 비교하면 급이 한참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관객들이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동양인은 누군데 케이알에스원이랑 작업을 했지?’

‘The way we live면 유투브 메인에서 푸시해주던 트랙인데? 유명한 래퍼인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이 무대로 쏟아졌다.

하지만 무대 위의 래퍼는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는 수많은 시선을 즐기며 담담하게, 그리고 자신감 있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메인 스크린으로 ‘FiveSix’라는 붉은색의 글씨가 떠오르는 순간, 상현의 랩이 시작되었다.

한국엔 후드도 없고, 코카인도 없고, 마리화나도 없어

그래도 난 죽이는 분위기와, 돈, 플로우가 있어

한국의 랩스타, 아님 한국의 잭팟

우린 한국말로 이걸 ‘깽값’이라고 불러

거침없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울리는 순간, 관객들은 슬럼 덕이 횡설수설하며 말했던 ‘Real Yellow Nigga'라는 단어가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노래는 고음이나 기교의 하이라이트가 뒤에 배치되지만, 랩은 처음 4마디에 실력이 확 드러나는 장르다.

때문에 관객들은 파이브식스란 이름을 가진 무대 위의 래퍼가 잘한다는 것을 단숨에 캐치할 수 있었다.

‘저 놈 뭐야? 잘하잖아?’

놀라움은 관객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뮤지션들도 놀라움을 느꼈다.

피피의 리허설 타임과 멀어서, 혹은 타인의 리허설에 관심이 없어서 상현의 무대를 본 적이 없는 이들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가사 전달.

건조한 목소리임에도 느껴지는 풍성한 울림.

유려한 플로우와 매력적인 라이밍.

그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동양인이란 편견과 다르게 구사하는 랩 딕션(래퍼 특유의 어투) 역시 매력적이었다.

눈을 감고 들으면 그 누구도 파이브식스의 랩에서 노란 피부와 까만 눈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퍽 쇼 비즈, 퍽 오경

내가 무너트린 레이블

내 정신 상태는 불법적인 행위지만

내가 하는 일은 죽여주고, 합법적인 행위지

거침없이 출발한 상현의 랩이 점점 텐션을 올렸고, 관객들의 몰입도도 깊어졌다.

마침내 캄튼 블랙 블록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illegal’ 라인이 터지자, 관객들 중 일부가 ‘Oh, Shit!'이라는 소리를 내질렀다.

‘확실히 파이브에게는 스타의 자질이 있어.’

하델 레인즈는 관객들 사이에서 상현의 무대를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이프맨의 역할을 수행할 때나 리허설을 할 때의 파이브는 ‘잘한다’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지만,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할 때면 ‘빛난다’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델은 그것이 스타의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는 프로모션으로 스타의 자질까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런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평판이 최악인 플랜 페이퍼의 하이프맨으로 참여시켜 편견이 생길 여지를 없애고, 피쳐링 뮤지션들을 빼돌려 기회를 주는 것.

여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대에서 빛나는 것은 파이브의 몫이었다.

그리고 파이브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Go get`em!

-Go hard!

하델이 크게 소리치자 주변의 관객들도 덩달아 소리 질렀다.

쉰이 넘은 아저씨가 힙합 공연에 반응하는 것.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아니었다. 상현이 지금 랩을 하는 곳은 힙합이 태어난 본고장, 미국이었으니까.

그렇게 상현의 The way we live는 20마디의 긴 랩을 가지고 이어졌다.

총성 없는 전쟁 속에서 피어난 랩스타

골드 앨범 두 개, 한데 여전히 난 배고파

비행기를 탔고 국경을 넘어 도착한 LA,

이제 난 한국을 넘어선 래퍼 Mr. Worldwide

상현의 랩을 듣고 있던 샌프란시스코의 관객들은 무대 위의 파이브식스가 한국에서 음악을 했으며, 꽤 유명한 랩스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더 큰 성공을 위해 LA로 건너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찌나 감정의 전달이 극적이었는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가사에서 ‘나 잘났어.’라고 하는 것은 진실인 경우보다 ‘그렇게 잘나지고 싶다’라는 소망인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유 없이 파이브식스의 가사에 믿음이 간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유가 없진 않았다.

믿음의 근원은 실력이었다.

이게 내가 살아온 방식.

우리가 사는 방식.

한번뿐인 삶, 내가 죽기 전

진실 된 순간은 라이브 퍼포먼스와 같지.

My life way, I lived

The way we live

only life, Until I leave.

Truth moment was like Performance, live

그렇게 56란 뮤지션이 살아오고, 살아갈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 났다.

랩이 끝나는 순간 미친 듯이 울리던 비트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정적의 무대 위로 리버브가 잔뜩 들어간 상현의 샤라웃이 터졌다.

Respect Korea! Frisco!

And PLAN PAPER!

페이퍼…… 페이퍼…….

엄청난 발성의 외침이 공연장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관객들은 파이브식스가 플랜 페이퍼를 샤라웃하는 것을 듣고, 뒤늦게 지금의 공연이 피피의 오프닝 무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럼 벌써 끝난 거야?’

동시에 파이브식스의 무대가 끝났다는 것도 깨달았다.

오프닝 뮤지션은 보통 한 곡을 부른다. 가끔 한 곡을 부르고, 다음 곡을 메인 뮤지션과 함께 부르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러나 The way we live를 끝으로 무대는 다시 암전이 되었다.

이것은 피피 사단에서 푸쉬하는 오프닝 래퍼의 무대가 끝나고 피피의 무대가 이어질 것이라는 걸 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파이브식스의 랩을 더 듣고 싶었다.

-뭐야? 벌써 끝이야!

-커튼 콜 투어니까 커튼콜을 하라고!

-왜 이름이 파이브식스 인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너도 엘비스 팬이냐?

엘비스 프레슬리의 앨범 ‘Elvis 56’를 떠올린 누가 크게 말하자, 관객들 중 일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상현이 재등장을 바라고 있었다.

2010년 5월에 발매될  란 앨범이 있다.

는 뉴욕의 두 왕 중 한 명인 나스(Nas)와, 전설적인 레게 뮤지션 밥 말리의 아들인 데미안 말리(Damian Marley)의 합작 앨범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음반 평론가들은 이 앨범에 늘 이런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1번 트랙을 듣는 순간 당신은 이 앨범을 전부 들을 수밖에 없다.’

‘당신이 힙합이나 레게를 싫어한다면 이 앨범의 1번 트랙을 듣지 않길 바란다. 일단 듣고 나면 멈출 수가 없으니까.’

의 1번 트랙명은 애즈 위 엔터(As We Enter)였다.

앨범의 포문을 여는 As We Enter는 시작부터 블랙 뮤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극한을 보여준다.

나스의 라임을 데미안 말리가 이어받아서 레게로 이어가고, 데미안 말리의 레게를 나스가 이어받아 랩으로 마무리한다.

안 듣고는 배길 수 없는 랩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상현이 선보인 무대 구성 역시 그랬다.

뜬금없는 케이알에스원의 등장은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이러한 이목은 곧 상현의 랩으로 전달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상현의 랩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56란 뮤지션에 대해서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랩스타라고? 얼마나 유명한 거지?’

‘골드 뮤지션이라고? 저 골드가 50만장인 거야? 아니면 한국의 골드인 거야.’

‘가사에서는 LA로 갔다더니만 왜 피피의 오프닝을 하고 있지?’

‘케이알에스원은 뉴욕의 뮤지션인데 왜 LA로 간 걸까?’

-이봐! 한 곡 더하라고.

-커튼콜!

누군가 반쯤은 장난으로, 또 반쯤은 궁금함에 외친 ‘커튼콜’이 객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해하는 것이 있었다.

상현의 무대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짧은 암전 뒤로 또 한 번 영상이 떠올랐다.

관객들은 이번에는 피피의 영상일 거라고 지레짐작해버렸다.

좀 아쉽긴 했지만, 피피 역시 그들이 좋아하는 뮤지션이었으니 관객들은 다시 스크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 등장한 사람은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아주 큰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곧 화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방금 부른 노래는 갱스터에 대한 노래가 아니에요. 제가 갱스터 라이프를 노래할 수는 없죠.

‘피피인가?’

관객 중 일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제 노래에 공감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똑같으니까.

‘이거 방금 그 파이브식스 목소리 아니야?’

눈치가 빠른 이들도 있었다.

-한국은 총을 소지하지 못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움켜쥔 ‘빈 총탄’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한국’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관객들 모두가 파이브식스가 또 한 번의 무대를 선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Yellow Nigga!

-Freaky Chinky!

Nigga(니가)라는 단어가 인종차별의 단어이지만 흑인들 사이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처럼, 누군가 상현에게 외친 Chinky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없었다.

-제가 지금부터 부를 노래는 No Color입니다. 검은색에 노란색이나 하얀색을 섞어도……. 그 색은 검으니까요.

그리고 어둠 속에서 상현의 랩이 시작되었다.

그 색은 검으니까. 날 매료시켰던 음악의 색.

그 색은 검으니까. 내 피부와는 약간 다른 색.

그 색은 검으니까. 열정을 쏟아 부은 색.

그 색은 검으니까. 그 색은 검으니까.

The color is a Black(그 색은 검으니까)이 매력적인 운율을 형성하는 순간, 관객들의 도움이 들어왔다.

-The color is a Black.

-The color is a Black.

짙은 어둠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둑한 무대.

어둠 사이로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은 한 래퍼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모두들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FiveSix.

그 색은 검으니까. 날 매료시켰던 음악의 색.

그 색은 검으니까. 내 피부와는 약간 다른 색.

그 색은 검으니까. 열정을 쏟아 부은 색.

그 색은 검으니까. 그 색은 검으니까.

후렴이 조금씩 전개될수록 무대의 어둠이 점차 가셨다.

마침내 ‘그 색은 검으니까’가 반복되며 후렴이 끝나는 순간, 환한 조명이 들어왔다.

그래 맞아, 빛에 드러난 내 피부색은 달라

하지만 피부 밑에 흐르는 내 피의 색은 같아

붉다 못해 검어, 누군가 내게 붙인 노란 선전(Flack)

그 선로를 걷어차고 성공의 길을 추적해서 뱉는 트랙

(Kick that track, Track fast track, Spit out track)

상현은 랩을 분명히 잘한다.

The way we live의 스웨거 트랙이 엄청났으니 샌프란시스코의 관객들이 커튼콜을 외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그랬듯, 상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심’을 토로할 때 가장 빛이 나는 뮤지션이었다.

듣고 있는 사람에게, 마치 내가 래퍼가 된 것 같은 착각까지 줘버리는 랩.

그것이 상현이 진심을 랩으로 토해낼 때 생기는 일이었다.

지금 샌프란시스코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5살 아이처럼 말해, ‘난 가짜 아냐, 거짓말 안 해’

한국에 있었으면 내 주머니는 차 키(Key)로 꽉 차

56인치짜리 괴물 휠, 56피트짜리 빌딩

그걸 전부 버리고 미국에서 Underground 래퍼 56

두 손을 모으고 랩을 하는 상현은 마치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기도가 그들에게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들에게 선택권이 있잖아. 날 차별할 건가?

난 K-타운 래퍼가 아냐. 내 K는 King과 Kill의 약자

내 영웅은 당신들과 똑같아. 2Pac과 Biggie

만약 내 앞에 Pac과 Big의 살인자가 나타나면

내가 지불할 보석금은 1000만 달러.

지금까지 이렇게 당당히 편견에 맞선 동양인 래퍼가 있었을까?

그동안 동양인 래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편견을 받지 않는 척, 태연한 척 연기를 했다.

나머지는 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스러졌고, 골든에라 시절부터 이어진 힙합의 중심에는 ‘동양인 래퍼’가 전무했다.

하지만 파이브식스는 솔직히 말하고 있었다.

난 이런 사람이고, 난 우리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담담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을 뿐이었다.

무서운 것은, 그의 랩이 너무 몰입도가 강해서 강요하는 것보다 더욱 진한 호소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벌스가 끝나고 훅이 시작되었다.

훅을 따라 부르는 사람이 처음보다 훨씬 늘어난 것은 비단 상현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 색은 검으니까. 날 매료시켰던 음악의 색.

그 색은 검으니까. 내 피부와는 약간 다른 색.

그 색은 검으니까. 열정을 쏟아 부은 색.

그 색은 검으니까. 그 색은 검으니까.

물론 이 노래 하나로, 그저 멋진 무대 하나로, 모든 편견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영화에 나올법한 이야기였다.

지금 ‘언더 독’ 동양인 래퍼에게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도, 막상 상현이 ‘탑 독’의 자리로 올라가려고 하면 거부감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상현은 시도를 하고 있었고, 멋지게 이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도가 모이고 모이면, 언젠간 상현에게도 ‘America Rapstar’란 칭호가 붙을 거란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바꾸게 될 상현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이 끝나가고 있었다.

***

< Verse 37. Next Stag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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