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38화 (238/309)

< Verse 37. Next Stage >

***

상현의 이름이 한국의 모든 신문을 장식하기 5개월 전인 2008년 1월 중순.

신년 휴가까지 반납하고 고생한 스태프들의 노력 덕분에, 캘리포니아 주의 롱비치에서 2008년 첫 투어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투어의 이름은 Curtain Call Tour 2008.

EMI 뮤직과 소니 뮤직의 공통 제작으로 이루어진 이번 투어는 커튼콜(앵콜)이란 단어처럼 2007년에 이루어진 투어의 연장선상에 있는 투어였다.

2007년에 소니 뮤직은 ‘그랜드 투어(Grand Tour) 2007’을 제작했었고, EMI 뮤직은 ‘뱅크 런 투어(Bank Run Tour) 2007’을 제작했었다.

그리고 두 투어는 각각 4회와 6회를 연장하며 꽤나 인상적인 성과를 이루어냈었다. 이러다보니 제작사의 입장에서 시리즈 제작 욕심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소니 뮤직과 EMI 뮤직은 그랜드 투어 2008과 뱅크 런 투어 2008을 야심차게 기획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2009년으로 예정 돼있던 ‘더 엑스 펙터 아메리카’의 제작이 1년 앞당겨진 2008년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더 엑스 펙터(The X Factor)는 독설가 사이먼 코웰의 주도로 2004년 영국에서 시작된 오디션 프로그램인데, 인기가 엄청나서 수많은 나라로 포맷이 수출된 상황이었다.

미국에서는 공식 제작 발표 전부터 FOX사의 골든타임 편성권을 따냈으며, 세계 4대 음반 회사에서 앞 다투어 제작 타이틀을 따기 위해 뛰어들기도 했다.

세계 4대 음반 회사 중 선택받은 제작사가 바로 소니 뮤직과 EMI 뮤직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소니와 EMI는 투어 제작 인력 확보에 난항을 겪게 되었고, 결국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 투어를 합친 커튼 콜 투어를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상현이 플랜 페이퍼의 하이프맨으로 참가한 <커튼 콜 투어 2008>의 이면에 깔려있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는 하이프맨 주제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신경 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상현과 하델 레인즈에게는 아주 중요한 배경상황이었다.

***

“이봐, 새너제이(San Jose : 캘리포니아 서부의 도시) 친구들. 지금부터 피피가 무슨 노래를 부를 것 같아?”

피피가 무대 위를 어슬렁거리며 수건으로 땀을 닦는 사이, 상현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공연 중간에 메인 래퍼에게 쉴 시간을 벌어다주는 것은 하이프맨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단지 시간만 버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아야했고, 앞선 공연으로 만들어진 텐션이 떨어지지도 않아야했다.

그 방법은 하이프맨마다 달랐는데, 상현이 택한 것은 짧은 랩이었다.

Big Boy, Big Chain, Big Money, Big Wheel-

Big City, Big Prize, Big Flow, Big Gun-

Big Fame, Big Game, Big Name, Big Pay-

Big이란 수사가 붙은 간단한 단어들의 나열.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상현이 만드는 플로우는 다채로웠고, 화려했고, 매력적이었다.

상현의 랩이 관객들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이것은 피피의 히트곡 중 하나인 ‘빅 띵 씻(Big Thing Shit)’을 소개하는 애드립이었다.

BIG PLAN-! BIG PAPER-!

Do That Shit! Big Thing Shit!

대부분의 관객들은 지금 동양인 하이프맨이 부르고 있는 랩이 피피의 Big Thing Shit 후렴과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BPM이나 박자가 비슷했고, 나열되는 단어 역시 똑같았다.

단지 유려한 플로우와 라이밍이 기존의 훅보다 훨씬 세련된 것 같았다.

Big Boy, Big Chain, Big Money, Big Wheel-

Big City, Big Prize, Big Flow, Big Gun-

Big Fame, Big Game, Big Name, Big Pay-

상현이 또 한 번의 짤막한 랩을 잇자, 관객들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눈치 챈 디제이가 재빨리 Big Thing Shit의 후렴 AR을 틀었다.

일부러 준비라도 한 것처럼 후렴에 깔린 피피의 랩과 상현이 부르는 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

-Big Thing Shit!!

상현의 랩은 기존에 있던 피피의 훅보다 반 박자 정도가 빨랐다.

그러다보니 상현이 ‘Big Boy, Big Chain-’이라고 선창하면 피피의 목소리가 그 뒤를 절묘하게 받치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피피의 목소리에 딜레이 이펙트(Delay Effect)를 먹여서 상현의 랩을 ‘보조’하는 것 같았다.

이 같은 상현의 플레이를 Big Thing Shit의 새로운 후렴 버전으로 착각한 관객들이 후끈 달아올랐다.

원래 Big Thing Shit의 후렴을 알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따라할 수 있는 변화였지만, 중요한 건 원래의 훅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BIG PLAN-! BIG PAPER-!

Do That Shit! Big Thing Shit!

세 번이나 후렴이 반복되고, 상현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곡의 시작을 알리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Shout-Out San Jose! Big Plan! Big Paper!"

엄청난 성량과 깨끗한 발성을 가지고 있는 상현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두두두두 하는 드럼이 스피커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San Jose Arena 공연장 내부가 폭탄과도 같은 드럼 소리로 가득 찼고,

“BIG THING SHIT-!”

상현의 긴 외침을 받으며 피피가 무대 전면으로 나섰다.

마침내 Big Thing Shit이 시작되었다.

Marchin' all these fuckin' drums on me

like a drill team

내가 나타나면 북소리가 울려

무슨 군부대처럼

메인 래퍼의 쉴 시간을 벌고, 관객의 호응을 완벽하게 이끌어냈던 상현은 어느새 뒤편으로 빠져서 백업 랩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백업이 피피의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뮤지션들 중에서 하이프맨을 수행해봤던 이들은 그런 상현의 모습에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저번부터 느꼈는데, 저 친구 상당히 뛰어나.”

“응? 누구? 설마 피피?”

“아니, 피피의 하이프맨 말이야. 하이프맨 출신들은 지금 다 나랑 똑같은 생각하고 있을 걸?”

“그래? 난 피피 새끼 공연이 망했으면 좋겠는데 하이프맨이 잘한다니 안타깝군.”

“그건 나도 그런데, 저 정도 백업이면 망하기도 쉽지 않아.”

“그 정도야? 하이프맨이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좋은 하이프맨이 없으면 래퍼는 제대로 된 공연을 할 수가 없어.”

커튼콜 투어는 힙합 투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래퍼가 아닌 싱어들도 많이 있었다.

싱어들은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로 백업을 받기 때문에 하이프맨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다. 지금 의문을 제기하는 뮤지션 역시 싱어였고.

그렇게 Big Thing Shit이 이어졌다.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터지는 스피커.

쉼 없이 불을 뿜는 사이키.

많은 요소들이 모인 무대가 마침내 하이라이트인 후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Big Boy, Big Chain, Big Money, Big Wheel-

Big City, Big Prize, Big Flow, Big Gun-

Big Fame, Big Game, Big Name, Big Pay-

관객들의 떼창이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떼창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관객들이 따라 부르는 후렴이 피피의 것이 아닌 상현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피피의 버전을 부르는 사람이 반이 넘었고, 상현의 버전을 부르는 사람이 반이 못됐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현의 버전을 부르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다.

어차피 두 사운드가 겹쳐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 관객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이 원하는 후렴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Big Thing Shit은 캘리포니아 주의 차트에서 3주간 1위를 차지했던 곡이었다. 오늘 공연장을 찾아온 관객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곡이란 소리였다.

그런데 아주 강렬하고 신선한 후렴을 오프닝 때 듣게 되자, 따라하고 싶어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오프닝 때 들었던 리듬이 너무 강렬해서 저도 모르게 따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갑자기 바꿔버린 후렴에 플랜 페이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시선이 너무 많았다.

피피는 활짝 웃는 얼굴을 연기하며 파이브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곤 어서 새로운 후렴을 부르라는 듯 흥겹게 어깨를 들썩였다.

-꺄아아아악!

-피피!!

그 모습에 여성 관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피피의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피피의 Big Thing Shit 무대를 보고 있던 엘에이 리드(L.A. Reid)가 지나가는 스태프를 불렀다.

“이봐. 저 친구 이름이 뭐야?”

바빠 죽겠는데 난데없이 붙잡힌 스태프가 인상을 쓰다가 엘에이 리드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프 잼 레코딩스(Def Jam Recordings)의 회장 엘에이 리드는 그만큼 거물이었다.

사실 리드도 휴가차 새너제이(San Jose)에 있지 않았다면 굳이 커튼콜 투어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마침 San Jose에 있었고, 그가 직접 기획한 신인이 출격하는 투어라서 한 번 들려본 것이었다.

“플랜 페이퍼요?”

“아니, 저 후렴 부르는 친구.”

“아, 파이브. 스테이지 네임은 파이브를 쓰는데 본명은 들어본 적이 없네요. 어…… 한국 사람이고 이번 투어부터 피피의 하이프맨으로 참여했다고 하던데요?”

“피처링이 아니라 하이프맨이었어? 그럼 소니 뮤직 소속이겠군.”

엘에이 리드는 소니 뮤직을 굉장히 싫어했다. 마이클잭슨이 소니 뮤직과 계약했을 때는 공공연하게 ‘Japs들이 돈으로 MJ를 샀다.’라고 비난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저 친구가 소니 뮤직의 소속 가수라면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스태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듣기로는 소니 뮤직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그냥 고용돼서 피피의 하이프맨만 봐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확실한 건 아닌데, 피피의 매니저인 요시치의 행동을 보면 그런 거 같더라고요. 아마 맞을 겁니다.”

원하는 이야기를 들은 엘에이 리드가 고맙다며 스태프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렇게 스태프가 떠나고 엘에이 리드는 피피의 무대를 조금 더 지켜보았다. Big Thing Shit이 끝나고 Creep Melody가 이어졌다.

“동양인이라…….”

그때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리드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아 시장을 노려볼 생각인가? 리드?”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리드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 또 한 번 놀랐다.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지?”

“눈이 침침할 나이가 됐지. 자네나, 나나.”

엘에이 리드의 눈앞에는 경쟁 레이블 사의 CEO였던, 동시에 친한 친구였던, 마지막으로 어느 순간 사라졌던, 하델 레인즈가 서있었다.

“자네가 왜 여깄나? 설마 새너제이에 살고 있었어?”

“아니, 저 친구를 따라왔지. 내가 저 친구 매니저거든. 아직은 내세우기가 뭐해서 관객으로 따라오지만.”

“매니저라고? 현장 매니저?”

“뭐, 일단은.”

하델의 말에 엘에이 리드가 뭔가를 생각하다가 객석을 가리켰다.

“그럼 저 쇼는 자네의 작품이겠군. 어쩐지 너무 쉽게 후렴이 바꿨다했어.”

“왜? 파이브의 후렴이 별론가?”

“그럴 리가. 다만 너무 쉬웠다는 거지. 내 말이 맞지?”

10명이 선동을 하면 주변의 100명쯤은 쉽게 움직일 수가 있다. 적절한 위치에 10명 단위의 선동꾼들을 몇 팀 넣어놨다면 공연장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물론 후렴이 좋았으니 가능한 일이지만.’

리드가 ‘내 말이 맞지?’라는 표정으로 레인즈를 쳐다봤다. 그러나 레인즈는 리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자네는 여전하군. 근 십 년 만에 봤는데 그런 거나 캐묻고 있는 게.”

“자네도 여전해. 아직도 프로모션은 마술이고 비법이 들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니나?”

“프로모션은 마술이지만 마술사는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마술사는 기획자가 아니라 뮤지션이었어. 그렇지?”

둘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회포를 나눴다.

H&R INC의 하델 레인즈.

Def Jam Recordings의 엘에이 리드.

10년 전에는 하델 레인즈가 훨씬 잘나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반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드는 하델의 눈빛이 살아있다고 느꼈다.

“하델, 날 찾아온 건가?”

“조만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날 줄을 몰랐어. 휴가차 왔나본데?”

“맞아. 레이블의 유망주가 이번 투어에 참가해서 한 번 들려봤지.”

그렇게 말한 리드가 좀 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날 왜 찾아오려고 했나?”

“자네 엑스 펙터의 심사위원이지? 사이먼 코웰과 함께. 나머지 두 명은 정해지지 않았고.”

“아직 안 죽었군. 대외비인데?”

하델 레인즈가 버릇처럼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부탁할 일이 있거든. 잠깐 얘기 좀 할까?”

상현이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하델은 물밑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 Verse 37. Next Stag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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