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35화 (235/309)

< Verse 36. No Color (完) >

상현은 사업가의 길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사업가적인 역량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계획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렇게 상현을 소개하던 케이알에스원이 마침내 때가 되었다는 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특유의 펑펑 거리는 발성이 무대를 가득 채우자 관객들도 그에 호응하듯 마주 소리 질렀다.

“샤라웃 스켑타! 샤라웃 블랙엠! 샤라웃 히메! 여긴 파이브식스 밖에 없지만 퍼킹 월드 와이드라고!”

그 순간 흘러나오는 The way we live의 비트.

-우와아아!

-티쳐!

-케이알에스원!

사람들의 함성이 케이알에스원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곡의 시작을 맡은 래퍼는 케이알에스원이 아니었다.

무대 전면으로 나선 상현이 인트로를 토해낸 것이었다.

Represent Korea! Seoul City! Shiny Town!

Shout-out My crew! Eight, Eight, Eight!

We Call 팔팔팔.

I never came out of my team!

but I'm far-outer!

순간 ‘아!’하는 탄성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힙합이 좋아 캄튼 블랙 블록에 관광을 온 여행객들 중에는 유투브를 통해 The way we live를 본 사람들이 꽤 많았다.

캄튼의 흑인들 중에도 유투브는 보지 못했지만, 레코드샵에서 케이알에스원의 14번째 앨범을 들어본 이들이 꽤 있었다. 앨범의 마지막에 위치한 보너스 트랙 The way we live 역시.

“저게 저 놈 벌스였어?”

“지저스! 그냥 동명인 줄 알았는데!”

“저 자식 티쳐랑 같이 작업을 한 거야?”

LA의 래퍼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동네의 동양인 래퍼에 불과했던 상현의 정체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파이브가 후드맨이었던 것도 놀랍지만, 지금의 놀라움이 훨씬 컸다.

케이알에스원은 누가 뭐래도 전미권의 래퍼였고, 전설적인 래퍼였다. 캄튼 블랙 블록 같이 웨스트 코스트의 색이 강한 무대에 이스트 코스트의 래퍼가 초대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국에서 엄청나게 성공한 래퍼였다고? 그래서 케이알에스원이랑 작업을 한 건가?’

‘그러고 보면 스탠다드가 동양의 슈퍼스타와 작업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케이알에스원의 지원사격은 이러한 반응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상현은 LA에 정착하려는 신인 파이브에서 후드맨으로 변했고, 또다시 후드맨에서 한국의 랩스타인 56로 변했다.

마침내 The way we live가 시작되었다.

In Korea; No Hood, No Yayo, No Blow

But I Got a, Mo` Mood, Payroll, Mo` Flow

Korea Rap Star, or Korea Jackpot

We say, In Korean is called 깽값

[한국엔 후드도 없고, 코카인도 없고, 마리화나도 없어

그래도 난 죽이는 분위기와, 돈, 플로우가 있어

한국의 랩스타, 아님 한국의 잭팟

우린 한국말로 이걸 ‘깽값’이라고 불러]

본래 The way we live는 각 국의 언어로 이루어진 랩이었다. 영어를 의도적으로 많이 혼용했지만 어쨌든 베이스는 래퍼들의 모국어였다.

스켑타는 프랑스어로, 히메는 일본어로, 블랙엠은 영국 특유의 억양의 영어로, 그리고 상현은 당연히 한국어로 랩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상현은 영어로 새롭게 만들어진 The way we live를 부르고 있었다. 가사 내용은 거의 비슷했지만 영어란 언어로 랩을 만듦에 있어 필요한 변화는 모두 갖춰진 상태였다.

적을 때리고 대가를 물지

물론 주먹 아닌 랩으로

과장이나 거짓말 전혀 없이

난 회사를 무너트렸지

상현은 오랜만에 한국에서 공연을 하던 기분을 만끽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목하고, 자신의 랩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기분.

후드맨일 때 그에게 쏟아지던 스포트라이트가 ‘호기심’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동경’에 가깝다.

그와 동시에 상현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병원에서 하연의 노래를 듣고 불확실에 몸을 던지기로 결정했었다.

그래서 LA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즐거웠다.

56로 랩을 하고, 사이커델릭 레코즈 멤버들과 친해지고, 후드맨을 궁리하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 공연을 하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불확실을 좋아하지만,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불확실의 끝에 놓여있는 달콤한 과실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불확실을 헤쳐 나가고 원하는 것을 잡아내는 기분.

그리고 그 보상은 언제나 관객들의 환호였다.

그는 뮤지션이었으니까.

퍽 쇼 비즈, 퍽 오경

내가 무너트린 레이블

내 정신 상태는 불법적인 행위지만

내가 하는 일은 죽여주고, 합법적인 행위지

상현의 랩에 몰입하고 있던 관객들이 단숨에 소리를 질렀다.

-우오우!

-Damn it!

불법적인 행위(illegal play).

죽여주는, 합법적인 행위(ill, legal play).

한국에서는 일(ill)이나 씩(sick)을 아프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미국인, 특히 흑인들을 ill이나 Sick을 ‘쩌는’, ‘죽여주는’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했다.

그러니 상현이 illegal이라는 단어를 ill, legal로 분리시킨 것은 꽤 멋진 라이밍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멋진 것은 호흡 공백을 이용해 단어 구조를 완벽히 전달한 상현의 재능이었다.

‘이거, 내가 엄청난 거물을 잡은 건가?’

하델 레인즈는 The way we live 무대를 보면서 이상한 단어를 떠올렸다.

거물 신인.

괴물 신인이라는 말은 자주 쓰지만 거물 신인이라는 말은 없다. 어떻게 신인이 거물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왠지 파이브식스에게 거물 신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파이브식스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음악도, 재능도, 멘탈도, 경험도. 마지막으로 스타성까지.

그에게 필요한 건 적절한 시간과 길이다.

‘그냥 길이 아닌, 아우토반.’

미국은 기회의 땅임과 동시에 경쟁의 땅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쟁에서 이긴다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천재들이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사라졌는가.

그런 의미에서 파이브식스는 운이 좋았다. 그가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자신 역시 운이 좋았다. 파이브식스가 나타났으니까.

하델은 상현과 케이알에스원이 The way we live의 무대를 보는 내내 머릿속으로 아우토반을 만들 방법에 대해 떠올렸다.

프로모션 역시 문화 예술이다.

이성과 영감이 적절하게 혼합돼야지만 대중의 마음을 움지이는 제대로 된 프로모션이 나온다.

그리고 하델은 상현의 아우토반을 기획하며 LA 메탈을 처음 기획할 때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이 무대가 끝났다.

“다들 이 친구를 기억하라고. 죽이는 놈이니까!”

마지막까지 도움을 주는 케이알에스원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상현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레인즈는 어디 있지?’

무대에서 내려온 상현은 하델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인파가 그에게 몰렸기 때문이었다.

후드맨 무대를 끝냈을 때만해도 몇몇 래퍼들이 붙잡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캄튼 블랙 블록의 무대를 구경하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상현을 붙잡고 있었다.

“숙제는 어려울 게 없겠군. 이렇게 유명한지 몰랐어.”

인파의 물결을 헤치도록 도와준 것이 하델이었다. 하델은 너무나 능숙하고 노련하게 상현을 인도했다.

“케이알에스원과는 친한가?”

“음…… 케이알에스원의 추천으로 코흐 레코드가 저한테 레이블 계약을 제안한 정도?”

다만 코흐 레코드는 상현을 ‘미국 시장’ 타겟용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아시아권을 노리는 카드로 생각했었다. 아니면 미국 내 동양인들의 지갑을 노리거나.

코흐 레코드는 상현과 오경 미디어의 난투 속에서 큰 이윤을 챙겼었다. 덕분에 그들은 ‘이상현’이란 뮤지션이 한국 시장에서 발휘하는 힘을 알고 탐을 냈었다.

상현도 코흐 레코드와 계약을 했으면 아마 편한 길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상현은 마케팅으로 미국 시장을 노릴 생각이 없었다. 음악적인 영감까지 미국의 힙합에 맞춰서 모든 것을 내걸 생각이었지.

상현은 ‘코흐 레코드’라는 거물급 레이블을 언급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하델 레인즈를 확인했다.

“정보도 받았고 예상치 못한 숙제도 받았으니……. 마지막 질문을 들어볼까?”

그때 하델 레인즈가 상현에게 말했다. 상현은 하델의 말에 뭔가를 생각하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레인즈. 절 메인스트림으로 어떻게 올릴 계획인가요?”

“그게 질문인가?”

“원래는 다른 걸 물어보려고 했는데, 마음을 먹었거든요.”

“1년 동안 두 가지 프로젝트를 수행할 거야. 첫 번째 프로젝트는 자네 노래를 따서 ‘No Color 프로젝트’라고 정하고, 두 번째 프로젝트는 ‘America Dream 프로젝트’라고 정하지.”

“이름이 너무 직설적인데요?”

“이름은 곧 목표니까 직설적일수록 좋지.”

“하지만 레인즈, 저는 반 년 정도는 LA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사이커델릭 레코즈 친구들과 작업도 남아있고, LA 씬에서 조금 더 경험하고 싶은 게 있어요.”

“걱정 말게. No Color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완성되는 프로젝트니까. 우선 우리가 갈 곳은 롱비치지.”

롱비치(Long Beach)는 LA와 32KM 정도 떨어진 항구 도시였다. 엄밀히 따지면 LA는 아니었지만, LA 문화권에 속했다고 볼 수 있었다.

“좋네요. 롱비치에 가서 제가 할 일은 뭐죠?”

“삼주 쯤 뒤에 캘리포니아 주를 도는 투어가 시작될 예정이야. 자네가 허락한다면 우린 롱비치에서부터 투어에 합류할 생각이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투어라는 단어에 상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직 투어를 소화할 만한 셋 리스트가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다른 라인업들과 합 한 번 맞추지 않고 공연에 참여하고 싶진 않았다.

상현의 표정을 읽었는지, 하델이 덧붙였다.

“말했지? No Color 프로젝트라고. 자네 혹시 미국 역사상 흑인과 백인이 가장 사이좋았던 곳이 어딘 줄 아나?”

“글쎄요.”

“베트남 전쟁터라네. 눈앞에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있다면 피부색의 다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상현은 하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챘다.

“외부의 적이 있으면 내부가 결속된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한데 미국 음악계에도 외부의 적이 있나요?”

“있지.”

하델이 상현에게 No Color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상현은 이야기를 통해 윤곽을 드러내는 하델의 계획을 들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델의 계획은 동양인 래퍼라는 자신의 특수성에 맞춰진 것이었다. 둘은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 이 계획은 오늘 이 자리에서 세워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무 완벽했다.

딱 한 가지를 불확실 요소를 제외하면.

“문제는 저한테 달렸군요. 제가 랩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과거의 나라면 돈을 풀고, 사람들을 고용해서 억지로라도 일을 성사시켰겠지. 하지만 이젠 아닐세. 이건 내가 자네에게 내주는 숙제네.”

“아직 계약한다는 말은 안했습니다만?”

“이 계획을 듣고도?”

하델 레인즈와 상현이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유대감이 있었다.

물론 상현은 오늘부터 하델 레인즈와 H&R INC에 대해서 조사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델의 말에 일체 거짓이 없다면 그는 H&R INC 소속 뮤지션이 될 것이었다.

“롱비치로는 언제쯤 갈 생각인가요?”

“이주 쯤 뒤에. 그 안에 회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보내줄 테니 확인해보게. 계약서는 모든 게 확인된 뒤에 쓰자고.”

“좋습니다.”

“자, 그럼 래퍼로써 마지막 시간을 즐기게나. 롱비치로 가면 꽤 오랫동안 하이프맨(Hypeman)으로 지내게 될 테니까.”

상현은 하델 레인즈와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는 악수를 나눴다.

2007년의 마지막 달인 12월.

No Color로 시작된 하델 레인즈와의 인연이, No Color 프로젝트로 이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Verse 36. No Color (完)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