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36. No Color >
***
영화 <8 Mile>을 보면, 클럽을 지키는 흑인 가드가 래빗(에미넴)이 랩배틀 참여진인 것을 알면서 못 들어오게 막는 장면이 있다.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래빗이 무대 위에서 ‘제대로 된 랩’을 선보이자 상황은 바뀐다. 가드가 대기실로 가는 래빗에게 주먹을 내밀고, 래빗이 가드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대는 것이다.
이것은 백인과 흑인이란 인종 프레임을 떠나 래빗의 랩이 인정받는 장면이었다.
짤막하게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상현은 이 장면이 <8 Mile>의 주제부를 관통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상황이 정확히 이랬다.
“Hey, Nigga.”
정체불명의 후드맨으로 무대에 오른 상현이었지만, 내려올 때는 한국에서 온 56였다. 그런 그에게 주먹을 내미는 이들이 있었으니, 스테이지 근처에 서있던 LA의 흑인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을 상현을 니가(Nigga)라고 부르고 있었다.
니가는 흑인 외의 인종이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의미를 가진 단어였다.
니가는 원래 흑인 노예를 부르는 단어로써, 인종차별적인 어조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타인종이 흑인에게 니가라고 지칭하면 싸움이 붙고, 심한 경우에는 총을 겨누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흑인들은 때론 긍정적인 의미로 니가를 사용하기도 했다. 친한 사이나, 매력적인 상대에게 말이다. 여기서 Nigga의 의미는 Cool에 더 가까웠다.
래퍼들은 그것이 더 심해서 Dope Nigga(쩌는 자식), Real Nigga(진짜 배기) 등등의 다양한 수사와 함께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수사는 보통 같은 흑인들끼리 사용하는 것이었다. 만약 타 인종에게 사용된다면 정말 친한 사이거나, 아니면 흑인 문화권에서 존중할만한 상대라는 의미였다.
상현은 주먹을 내미는 흑인들과 친분이 없었다. 그러니 아마 후자의 의미일 확률이 높았다.
블랙 뮤직의 프레임에서 존중할만한 상대.
“Thanks, Dude.”
상현은 기쁜 마음으로 그들과 주먹을 부딪쳤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편함이 사라져서 아주 홀가분했다.
후드맨.
처음에는 인종차별에 대한 도전의식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중간에는 꽤 큰 부담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아주 잘 마무리 되었다.
상현은 문득 처음 얼굴을 가릴 생각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
상현이 처음 ‘후드맨’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스탠다드가 LA를 떠나는 날이었다.
그날 상현은 감기기운 때문에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었다.
‘여행할 때는 괜찮다가 갑자기 이런 때에…….’
LA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감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LA 씬에 56란 이름을 새기고 싶었다.
덕분에 상현은 평소에 잘 안 먹던 감기약도 사먹고 마스크까지 쓴 채로 스탠다드를 배웅하려 공항으로 향했었다.
“내가 다시 LA로 올 때쯤이면 네가 LA를 꽉 잡고 있겠지?”
“몇 번 말해. 그때쯤이면 전미 투어를 하고 있을 거라니까.”
“기대하고 있겠어.”
“잘 다녀와. 몸 건강히.”
그렇게 스탠다드가 덴마크로 떠나고, 상현은 공항에서 LA 시내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탔다.
그리고 거기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었다.
“이봐, 친구. 혹시 LA 토박이야? 아니면 나처럼 관광객인가?”
“토박이는 아닌데 LA에서 살고 있어.”
“그래? 난 LA에 온 게 처음인데, 어디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해줄 곳 없어? 네가 가는 블랙 클럽(Black Club : 흑인들만 출입하는 클럽)이라던지.”
버스 옆 좌석에 앉은 쾌활한 흑인이 상현을 흑인으로 착각하고 말을 건 것이었다.
버스에 내릴 때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확히는 혼혈로 착각했다고 했다.
상현은 그 순간 자신이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쓴 상태라면, 흑인이나 혼혈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검게 그을린 피부 탓이었다.
물론 밝은 곳에서 자세히 본다면 티가 난다. 아무리 피부가 탔다고 해도 흑인 특유의 두껍고 멜라닌 색소가 가득한 피부의 느낌을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목구비를 가리고, 불 꺼진 버스나 지하 클럽 같은 어두운 곳에서라면 충분히 속일 수가 있었다.
눈치 빠른 사람은 흑인과 백인의 혼혈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흑인 중에서도 유독 피부가 덜 검은 이들이 있었는데 그런 부류로 보거나.
‘가만 있어봐…… 이거?’
그때 상현은 떠올린 것이 후드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후드맨(Hoodman)’이란 마블사의 히어로 같은 이름은 상현이 지은 것이 아니었다. 스탠턴에 있는 클럽 티앤티의 디제이가 지은 이름이었다.
클럽 티앤티는 후드맨이 처음으로 공연을 했던 곳이었다.
상현은 스탠다드의 소개로 티앤티의 디제이인 ‘디제이 쿤(DJ Koon)’을 만나고, 그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줬었다.
쿤은 그의 음악을 아주 좋게 평가했었다. 반드시 LA에서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공연을 잘 해도 별 반응이 없자 쿤도 꽤 답답해했었다.
그렇게 티앤티에서 몇 번의 공연을 한 뒤, 상현은 어느 날 쿤에게 얼굴을 가린 채로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했었다.
그러자 쿤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설마 리스너들을 바보로 아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얼굴을 가려도 같은 장소에서 56와 마스크맨이 나오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어.”
“마스크를 쓸 건 아니고, 후드로 얼굴을 가리려고.”
“좋아. 그럼 난 후드맨을 고용하겠어. 오늘부터 56는 티앤티에서 잘린 거야. 대신 LA에 있는 다른 클럽을 소개해줄게.”
“고마워.”
“난 네가 LA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건, 인종적 편견에 대항하는 흑인 음악이 오히려 편견에 갇힌 역설이라고 보고 있어. 내가 마스크맨, 아니 후드맨이 성공할 수 있도록 소문을 좀 내볼게.”
그렇게 티앤티에서 56는 잘렸고, 후드맨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까 티앤티에서 공연할 때 후드맨 본 적 없어? 비슷한 시기였잖아.’
‘없어. 그리고 난 티앤티에서 금방 잘렸잖아.’
문득 베버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상현은 베버에게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실제로 그가 티앤티 라인업에서 빠지게 된 건, 디제이가 그의 랩이 티앤티에서 불리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이유는 실력적인 결함이 아니라, 후드맨을 띄우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지만.
“와,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무 한 거 아니야?”
“한국인은 정이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 우리한테 숨길 수가 있지?”
덕분에 상현은 베버를 필두로 한 사이커델릭 레코즈 멤버들에게 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드맨, 아니 파이브식스라고 불러야 하나?”
“누구시죠?”
쉰이 넘어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상현에게 말을 건 것이.
상현의 질문에 노신사는 대답대신 한 장의 명함을 건넸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명함에는 ‘H&R INC’라는 회사명과 노신사의 이름만 새겨져있을 뿐이었다.
상현은 이런 명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장을 만드는데 십 몇 원이 드는 공장에서 양산하는 명함이 아니라, 수제로 만들어지는 명함.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치레로 주는 게 아니라, 진짜 비즈니스의 시작을 담보로 건네는 명함.
게다가 명함에는 어떠한 직책도 없이 이름만 적혀져 있었다.
상현의 짐작이 맞다면 이 사람은 CEO를 넘어서, 회사의 모든 일에 대한 무제한적 결정권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10년이 넘게 회사를 이끌어온 상현의 직감이 사기꾼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인사(Human Resource)를 담당하는 회사인가요? 절 헤드헌팅 하시나요?”
상현의 농담에 노신사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랩을 잘하는데 농담 솜씨는 영 형편이 없군.”
“그럴 리가요. 제 친구들은 제가 입만 열면 뒤집어지는데요.”
“좋은 친구를 뒀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레인즈라고 부르게. 대표와 가수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선 안 되는 법이니까.”
상현은 대표와 가수라는 단어에서 그의 짐작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람은 미국의 뮤직 인더스트리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밴드 블루 치어스의 매니저 보조로 시작해, 하드록 밴드의 종말을 예견하고 LA 메탈을 제작, 전미를 휩쓰는 대중음악 흐름을 만들어냈던 제작자.
고압적인 태도와 가수에게 부담이 가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인망을 잃고 업계를 떠났지만, 그 능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90년대의 스타 매니저.
하델 레인즈(Hadel Raines).
미국의 대중음악계로 돌아온 하델 레인즈와 미국의 대중음악계로 등장한 상현의 만남은, 온 세상이 랩으로 울리는 캄튼 블랙 블록의 스테이지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앞으로 둘의 세상이 랩으로 가득찰 것을 암시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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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음악 산업계와 한국 음악 산업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누가 뭐래도 규모의 차이다.
혹자는 다양성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각 장르들의 매출 퍼센테이지를 보면 이러한 다양성의 차이가 어디까지나 규모의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규모의 차이가 불러일으킨 한국-미국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송출 시스템이었다.
한국의 음악 산업은 ‘한국’이라는 큰 틀 안에서 매스미디어 콘텐츠가 송출되는 시스템이다. 공영 방송류의 중앙방송이 강한 힘을 발휘하고, 케이블 채널 역시 전국으로 방송된다.
물론 대구는 대구방송, 부산은 부산방송이 따로 있긴 하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에 반해서 미국은 ‘주’라는 틀로 콘텐츠가 송출이 된다.
약간 과장을 하자면 캘리포니아 주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 중에는 일리노이 주의 방송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찾아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MTV 같이 전미에 송출되는 방송국도 있긴 하지만, 주 단위의 프레임이 강력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현은 한국에서 고수해온 자신의 정책이 미국에서는 달라져야 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상현은 대형기획사나 방송국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경 미디어 때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이겨냈다.
CBC 방송국처럼 자연스럽게 관계가 가까워진 방송국도 있었지만, 이것은 상하 관계라기보다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획사의 백업이 필수였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주(州)만해도 그 안에 여러 개의 TV, 라디오 방송국이 있고,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업계의 직원들이 있다. 주의 범위를 넘어서면 이러한 방송국들이 수는 엄청나게 늘어나고, 관계를 유지해야할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인프라를 개인이 커버한다?
그렇게 되면 아마 음악활동을 준비하는 시간이 음악을 하는 시간보다 많아질 것이었다.
putting the cart before the horse.
말 앞에 마차를 놓는 상황.
한국어로 본말전도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설령 방송활동에 치중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방송은 하지 않더라도 공연은 해야 하니까 말이다.
각 주, 각 도시에 적절한 커넥션이 있어야지 공연 장소를 섭외할 수가 있고,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규모의 공연을 할 수가 있다.
역시 가수 개인이 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물론 하나의 주에서만 활동을 한다면 한국에서처럼 홀로서기가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현의 목표는 캘리포니아 주가 아니었다.
그가 LA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힙합 뮤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LA 언더그라운드를 발판삼아 전미권의 뮤지션으로 진출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LA에서 이름을 더 알린 뒤에는 회사가 필요할 거야.’
상현도 회사의 필요성에 대해서 익히 수긍하고 있었다. 한국의 기획사와 미국의 레코드가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덜 하기도 했다.
미국의 레코드들은 한국처럼 가수의 음악성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일이 드물다.
물론 미국의 레코드라고 다 좋은 건 아니었다.
N.W.A가 불화가 일어나고 멤버들이 갈라지게 된 것도 그들을 키워준 매니저인 제리 헬러(Jerry Heller)의 횡령 때문이었으니까.
아무튼 상현은 하델 레인즈의 등장이 반가웠다.
그러나 아직은 하델 레인즈와의 계약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있었다.
사이커델릭 레코즈 멤버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은 이제 막 시작했으며, 캄튼 블랙 블록을 통해서 LA에 56의 음악을 공정하게 평가받을 기틀을 마련했다.
최소 6개월 정도는 LA에서 음악을 더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델은 상현의 생각보다 훨씬 진취적이었고, 추진력이 빨랐고, 공격적이었다.
“LA를 떠나야지?”
계약의 여부조차 결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델 레인즈가 던진 첫 마디가 이것이기 때문이었다.
< Verse 36. No Color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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