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35. 천사들의 도시 >
그렇게 LA 씬에 대해 생각하며 클럽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나 익숙한 사운드가 상현을 반겼다.
-California Love-
전자음이 교묘하게 섞인 인트로.
1996년에 미국과 유럽을 휩쓸며 빌보드 싱글, 핫랩/알앤비 차트, 탑 차트 등에서 1위를 기록한 투팍(2pac)의 캘리포니아 러브였다.
곧 펑키한 드럼이 벨라치노 내부를 가득 채웠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클럽 안의 사람들이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4개로 웨스트 코스트의 핸드사인 ‘W’를 만들며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너무나 유명한 곡이라 오히려 따라 부르는 사람이 적었다. 다들 좋아하는 구절이 나오면 슬쩍슬쩍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직 9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클럽의 분위기는 이미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멋지지? 여기가 LA에서 가장 핫한 곳이야.”
“영화로 들어온 것 같아.”
스탠다드가 이럴 때는 영락없는 촌놈 같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사람들을 헤치며 클럽 안으로 입장했다.
벨라치노의 내부는 한국의 여느 클럽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넓고, 어둡고, 시끄러웠다.
다른 점이라고는 클럽 전체에 음악을 토해내는 스피커와, 무대의 라이브용 사운드 장비가 구분되어 있다는 점 정도였다.
‘아, 담배 연기 대신 대마초 연기가 가득하다는 것도.’
상현의 생각처럼 벨라치노의 안은 매캐한 대마초 연기로 가득차 있었다.
미국을 여행하던 상현이 놀랐던 점 중 하나가 대마초에 대한 인식이었다.
한국은 마약을 아주 강력히 단속하는 나라이기에 대마초 역시 위험한 마약으로 생각하지만, 미국인들이 가진 대마초에 대한 인식은 담배와 비슷했다. 오히려 중독성 때문에 담배를 훨씬 더 유해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콜로라도, 워싱턴, 워싱턴 DC에서는 대마초가 합법이었고, 합법이 아닌 주라고 해도 사적인 공간에서 대마초를 단속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상현은 대마초에 손을 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어떻게 대마초를 필 수가 있어!’하고 요란 떨 일도 아니라는 것을 여행 중에 많이 느꼈었다.
상현이 대마초를 구경하는 것을 눈치 챈 스탠다드가 물었다.
“왜? 마리화나에 관심 있어?”
“그럴 리가.”
“마리화나만 필 수 있으면 펴도 상관없어. 의존성이 없거든. 금단 현상도 없고 내성도 거의 없지. 문제는 마리화나를 피다가 호기심에 더 강한 마약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야. 엑스터시나 암페타민(필로폰) 손대는 순간 인생 조지는 거지.”
“걱정하지 마. 안 필거야.”
“곧 떠나니까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서 그래. 뭐, 제일 중요한 건 인맥이지만…….”
스탠다드가 스테이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대기실로 갈래? 라인업들 대기하고 있을 텐데 인사라도 해. 아, 아니면 공연보고 가도 되고.”
“보고 가자. 곧 시작하려는 거 같아.”
상현의 말처럼 클럽의 스태프들이 라이브 스테이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스탠다드와 상현은 무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채로 나초에 맥주를 홀짝였다. 그 사이에 꽤 많은 사람들이 스탠다드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사실 상현은 미국 나이로 21살이 안 되서 술을 마실 수가 없었는데, 스탠다드와 함께 와서 그런지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걸지도?’
그때 상현의 뒤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웬 흑인이 서있었다.
“헤이, 스탠다드. 요새 안 보이더니 웬 꼬마랑 함께 나타났어?”
그러나 대답은 스탠다드가 아닌 상현에게서 나왔다.
“꼬마는 무슨. 내가 너보다 더 큰 거 같은데.”
“오, 이 친구 성깔 있네. 잠깐 앉아도 되지?”
스탠다드가 흑인을 가리키며 베버라는 이름을 소개해주었다. 베버는 서글서글한 눈매와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2개의 레코드샵을 운영하는 주인이기도 했다.
베버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성깔 있는 아시안. 이름이 뭐야?”
“FiveSix.”
“이상한 걸 보니 스테이지 네임이네. 디제이야?”
“래퍼.”
“케이타운(코리아타운)에서 활동하나보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스탠다드!”
“왜.”
“어째, 내가 한 제안에 대해서는 생각 좀 해봤어?”
“내가 그걸 하겠냐. 나는 코흐 레코드랑 계약 건이 진행 중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건 가치가 다르다고!”
베버가 스탠다드에게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있는 상현도 대화내용을 듣게 되었고, 곧 베버의 제안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바보 아니야?’
베버는 LA에서 잘나가는 디제이인 스탠다드와 함께 독립 레이블을 만들고 싶어 했다.
배급사에 뜯기는 돈 없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서 LA 동부지역 레코드샵에 다이렉트로 상품을 넘기겠다는 의도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긴 했지만, 상현이 보기에 베버의 아이템은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내부불경제’가 될 확률이 높았다.
레이블이 잘돼서 직거래를 하는 레코드샵이 많아진다면, 어느 순간부터 배급 수수료보다 레코드샵 직거래를 위한 제반 비용이 더 커질 수가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이야 친분이 있는 레코드샵과 거래할 생각이니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그게 전혀 연관이 없는 샵들로 확장되면 어떨 거 같아?”
“뭘 어떻게 돼? 잘 된 거지!”
“만약 LA를 벗어나 캘리포니아 주까지 커버한다면? 더 잘돼서 다른 주로 넘어간다면? 하나하나 클라이언트 대우를 해줘야하는 거래처가 수백, 수천, 수만이 되는 건데 그게 감당이 될 리가 없지. 차라리 배급 시스템을 통해 배급하는 게 훨씬 나아.”
상현은 스탠다드에게 토해내는 베버의 열변을 듣고 있다가 넌지시 조언을 해주었다.
베버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스탠다드를 쳐다봤다. 이놈은 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스탠다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베버. 넌 잘 모르겠지만 이 친구가 맨손으로 시작해서 한국을 쥐락펴락하는 레이블을 만든 사람이야. 무시하지 말고 잘 들어.”
“쥐락펴락 까지는 아니지.”
“한국 랩 앨범 중 역대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으면 맞는 말이지 뭐.”
스탠다드의 말에 베버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이라고? 근데 왜 LA에 있어? 아, 관광 온 건가?”
“관광은 아니고,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이지.”
“LA에서 래퍼로 성공하겠다고? 한국인이?”
굳이 따지면 LA에서 ‘시작’을 하는 것이었지만,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고개만 끄덕였다.
상현의 말에 뭔가를 생각하던 베버가 재차 물었다.
“파이브. 네가 말하는 제반 비용이 정확히 뭐야? 내 생각에는 배급사를 통해 사는 것보다 앨범이 싸니까, 레코드 점주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쉽다면 이미 그런 기업이 있겠지. 아니, 좋아. 일단 개인적인 클라이언트들의 불만을 접어놓자고. 캘리포니아 주 전체의 레코드샵의 요청 수량에 맞게 앨범을 분배하는데 인건비가 얼마나 들 거 같아?”
“그, 글쎄? 얼만데?”
“내가 어떻게 알아? 중요한 건 그 비용만 해도 배급사를 통해서 하는 것과 비교해 큰 차이가 안 난다는 거지. 규모의 경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 같아? 작은 배급사들은 도산하고 큰 배급사들만 살아남는 이유가 뭐겠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베버의 귀로 스탠다드의 최종선언이 들렸다.
“게다가 나 최소 일 년 정도는 덴마크로 돌아가야 해. 네 제안에 매력을 느껴도 물리적으로 같이할 수가 없단 말이지.”
“덴마크로 간다고?”
그때였다. 노래와 조명이 꺼지더니, 4마디 단위로 루핑되는 간단한 드럼 라인이 클럽 내부를 꽉 채우기 시작한 것이.
-VellaChino Wassuppp!
단독 조명을 받는 디제이 부스 위로, 건장한 체구의 대머리 흑인이 등장했다.
그리곤 디제이 브룩(DJ. Brook)의 DJ 타임이 시작되었다. 브룩은 올드 스쿨 웨스트에 뉴 스쿨 사운드를 접목시킨 노래들로 흥을 올리기 시작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내가 저걸 하고 있었지.”
스탠다드가 고개를 까닥이며 상현에게 속삭였다.
“너가 벨라치노의 디제이였어?”
“그러니까 시큐리티들이랑 친하지. 벨라치노 오픈 이래로 백인이 메인 디제이를 맡은 게 처음이란 것만 알아둬라.”
스탠다드의 자부심 가득한 말을 들으며 상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그가 활동할 씬의 첫 무대를 앉아서 보고 싶지 않았다.
클럽 내 동양인이 그 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대 근처로 접근하자 흑인들이 그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상현은 주변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음악을 즐겼다. 웨스트 코스트 특유의 펑키하면서도 지저분한 사운드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10분간 이어진 디제이 솔로가 끝나는 순간, 무대 뒤에서 누군가 등장하며 소리를 질렀다.
-Kickin in a house!
킥킨(Kickin)이라는 래퍼였다. 키킨은 하드코어한 랩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프닝 래퍼임에도 꽤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키킨의 무대를 시작으로 LA 힙합 문화가 상현의 눈앞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You already know me, know how I get down!
LA 랩은 꽤 흥미로웠다.
사실 80년대 골든 에라 시절이 끝나고 뉴 스쿨이 나타나며, 사운드만으로 랩의 경계를 나누는 게 무의미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싸우스 힙합을 제외하면, 동부, 서부, 중부의 힙합은 사운드적으로 명확한 차이를 느끼긴 힘들었다. 그러니 뉴 스쿨의 코스트 구별은 출신지역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랩 스타일과 별개로 LA 출신의 래퍼라면 스스로를 ‘웨스트 코스트’라고 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LA 힙합에는 웨스트 코스트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갱스터 랩의 거침과 G-funk의 펑키함, R&B의 말랑말랑함이 잘 버무려진 느낌.
“Damn it!”
상현은 마음껏 환호하며 무대를 즐겼다.
실력적으로 따지면 상현보다 못한 래퍼들도 꽤 있었다. 당장 공책과 펜을 준다면 똑같은 비트에 훨씬 더 죽이는 랩을 써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상현은 실력의 고하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진심이 느껴지면 언제나 리스펙트를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무대는 이어졌다.
재밌는 건 한국의 공연장과는 다르게 무대만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래퍼가 2-3곡의 라이브를 선보인 뒤에는 꼭 디제이가 노래를 틀었다. 디제이의 플레이는 보통 두 곡이었지만 네 곡까지 이어질 때도 있었다.
관객들도 래퍼가 라이브를 할 때는 무대에 집중했지만, 디제이 플레이가 나올 때면 술을 마시며 춤을 췄다. 이곳은 가수가 주가 되는 장소가 아니라 음악이 주가 되는 장소였다.
그러다보니 래퍼는 네 명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 세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이래서 출연 경쟁이 치열하구나. 9시가 조금 넘어서 시작했는데 이제 네 명이라니.’
상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디제이가 다음 차례의 래퍼에 대해 농담을 했고 갑자기 클럽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꺄아아악!
-저메인!
여성들의 기대감에 가득찬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곳곳에서 ‘저메인’, ‘테라피스트’라는 단어가 들렸다. 저메인(Jermaine)은 테라피스트의 본명인 것 같았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비명소리는 똑같네.’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굉장한 기대감이 들었다.
여성 관객들뿐만 아니라 남성 관객들도 무대에 집중하는 것이, 인기를 떠나서 실력적으로도 뛰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앞서 무대를 가진 4명의 래퍼는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최근 LA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테라피스트의 실력이 궁금했다.
-꺄아아아악!
-꺄아아아!
누군가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이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여성들의 함성이 터졌다. 몇몇 남성들이 시끄럽다며 인상을 썼지만, 함성은 멈추지 않았다.
테라피스트는 무대 위로 등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등장과 동시에 비트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동부 힙합 냄새가 물씬 나는 드럼 위로 테라피스트가 가볍게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테라피스트가 입을 열었다.
“Split You Up."
테라피스트는 따뜻하면서도 허스키한 느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상현은 그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볼 수가 없었다.
테라피스트는 오른쪽을 등지고 삐딱하게 서있었는데, 상현이 오른쪽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현에게 보이는 것은 테라피스트가 190이 넘는 키에 비율 좋다는 것뿐이었다.
Split You Up이 시작되는 순간, 테라피스트가 객석의 중앙 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상현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이콜이잖아!’
테라피스트는 제이콜(J.Cole)이었다.
그러나 상현은 무명 상태의 제이콜을 만났다는 놀라움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다.
누군가 그를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파이브. 너 레코드샵에서 일할 생각 없냐?”
베버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 Verse 35. 천사들의 도시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