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25화 (225/309)

< Verse 35. 천사들의 도시 >

한참동안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스탠다드의 물음이었다.

“집은 구했어? LA에서 거주하려는 거지?”

“아직 못 구했지. 참, 이 집은 비워 줘야해? 그래서 룸메이트가 나간 건가?”

“아냐, 웰더가 나간 건 그거랑은 상관없어. 캘리포니아 레이블이랑 계약했거든.”

“오, 잘 됐네.”

“근데 래퍼가 아니라 CCM송 가수로 계약했어.”

스탠다드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을 이었다.

“월세만 낼 수 있다면 이 집은 네가 써. 인터넷이 좀 느리고, 그렇게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단점은 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곳이야. 너가 쓴다면 장비를 두고 갈 수 있으니 나도 좋지. 아, 컴퓨터나 키보드 같은 건 가져갈 거야.”

“오, 좋네. 근데 왜 안전한 곳이 아니야? 도둑이 많나?”

상현의 물음에 스탠다드가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며 ‘Pow, Pow’하는 소리를 냈다. 상현이 깜짝 놀라 물었다.

“갱단 활동 지역이야?”

“정확히 말하면 완충지대야. 근데 중요한 건 때에 따라서 완충지대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거지. 갱단 간의 항쟁이라던가, 대규모 마약 거래 같은 거.”

LA에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갱단이 있는데, 하나는 파란색을 상징하는 서부지역의 크립스(Crips)이고 하나는 붉은색을 상징하는 동부지역의 블러드(Bloods)이다.

이들은 한국의 조폭 같은 존재가 아니다.

조폭은 불법적이긴 하지만 삶을 영위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이다.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집을 사기 위해 활동한다는 말이었다. 신입 조폭들이 미래를 위해 열정페이를 인내하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러나 갱단은 조폭과 달리 미래가 없는 단체였다. 속된 말로 ‘너 죽고 나 죽어도’ 별반 상관없는 놈들이 모인 단체.

이들이 얼마나 미친 집단이냐면, 1990년대에 Crips 갱들이 LA 경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Crips 갱단이 LA 거리의 절반을 장악했었다.

Crips과 경쟁하는 Bloods 갱단은 원래는 흑인을 보호하는 정치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Crips 갱들이 자신의 갱단에 속하지 않은 흑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자 그에 반발하여 갱단으로 거듭나게 된 집단이다.

시작이 어쨌든, 현시점에는 Crips이나 Bloods나 똑같이 악질적인 놈들이었고, 활동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갱단들이 음악적으로 꽤 중요한 포지션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꽤 많은 정규 앨범을 발매한 뮤지션들이며, 제일 먼저 핫한 음악을 퍼트리는 전달자이며, 갱스터 랩에 관해서는 깐깐한 수용자들이었다.

래퍼들이 흔히 사용하는 용어 중에는 OG와 SG가 있다.

여기서 OG는 오리지널 갱스터(Original Gangster)로 실제 갱단 생활을 한 래퍼를 의미했고, SG는 스튜디오 갱스터(Studio Gangster)로 스튜디오에서만 갱인 척 하는 가짜 갱스터 래퍼들을 말했다.

대표적인 OG로는 N.W.A의 이지이(Easy-E)와 스눕독(크립스의 얼굴 마담이라는 소문도 있지만)이 있고, 대표적인 SG로는 릴 웨인(Lil wayne)이 있었다.

“그러니까 괜히 갱스터 랩 하지 말라고. 릴 웨인도 블러드 인척 하다가 실제 블러드 갱단원들한테 망신을 당했으니까.”

“내가 갱스터 랩을 할 리는 없지만, 좀 무서운데.”

상현의 말에 스탠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하라고 일부러 말해준 거야. 외지에서 온 놈들 중에 갱단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다가 총 맞아 죽은 놈들이 제법 되거든.”

“뭐야? 그럼 과장이야?”

“과장은 아니야. 내가 LA 정착한지 3년쯤 됐는데 이 거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게 다섯 번쯤 될 걸? 빈민가는 아니지만 빈민가와 멀지 않으니까.”

상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탠다드의 충고를 새겨들었다. 스탠다드는 그 외에도 꽤 중요한 유의사항들을 차례대로 말해주었다.

그러나 스탠다드의 가장 큰 걱정은 상현이 흑인 문화권에 스며드는 것 자체였다.

스탠다드는 기본적으로 상현의 랩 실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Eight, Eight, Eight 리믹스나 광주 업을 파티 플레이에 활용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실력을 보여줄 수가 없다.

본래는 스탠다드가 그 길을 뚫어줄 생각이었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덴마크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상현은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스탠다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일부러 더욱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여행을 다니면서 딱히 인종차별 같은 것을 당하진 않았는데? 뭐, 사소한 무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상현은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신이라기보다는 그 정도의 문화 저항은 각오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았다.

“그거랑 이건 다르거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랩 뮤직은 흑인들의 성역이야. 타 인종에 대한 심리적인 허들이 굉장히 높다고.”

“한 가지 케이스로 논리에 반박하는 게 멍청한 짓이라는 건 아는데…… 에미넴은 어때?”

“에미넴은 특수한 경우지. 그는 백인이지만 흑인 빈민의 삶을 겪었잖아. 미국의 빈민 복지 정책은 백인 빈민들에게 역차별 가하는 경우가 많아. 에미넴은 그것을 꼬집은 존재지. 왜 백인 쓰레기는 피부가 하얗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거지? 라고 말이야.”

“흠…….”

“게다가 에미넴이라고 진통이 없진 않았지. 흑인들한테 살해 협박을 너무 많이 당해서 한동안 방탄조끼를 입고 다녔던 건 유명한 일화잖아.”

스탠다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냉장고에서 버드와이져 두 병을 꺼냈다. 상현은 스탠다드가 건네주는 맥주를 받았다.

“좀 웃긴 일이긴 하지. 정작 나는 백인인데 랩 문화에 잘 스며들었거든. 왜냐하면 프로듀서니까. 무대의 전면에 나서는 래퍼는 흑인이여야 하지만 조력자들은 또 별 신경을 쓰지 않아. 웃기지?”

상현은 스탠다드의 말을 통해 ‘LA의 56’도 ‘한국의 56’와 똑같은 위치에 놓였음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888 크루와 상현은 시스템 밖의 존재였고, 시스템 위의 존재였다. 한국의 음악 산업을 꽉 쥐고 있는 기획사 시스템 위에서 탄생했다는 말이었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LA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상현이 이겨내야 하는 것은 ‘흑인 문화권’이란 블랙 뮤직의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한국의 시스템보다 더욱 단단할 지도 몰랐다.

기획사 시스템은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장치지만, 흑인 문화의 시스템은 랩 문화가 시작되고부터 이어진 자긍심이니까.

하고 싶은 말을 끝낸 스탠다드는 상현의 표정에 심각함이 어릴 것이라 예상했다.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더 강하게 말한 부분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상현은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대가 돼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래서 스탠다드, 넌 내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렇진 않아. 여긴 시카고나 디트로이트가 아닌 LA니까. 그리고 넌 잘할 수 있겠지. 평생 아껴온 내 영감을 미친 듯이 훔쳐간 놈이니까.”

“그럼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난 오늘부터 잠들기 전에 너희 아버지의 병이 완치되길 빌 거야. 그러니 넌 내 앞길에 축복이나 해. 그거면 족하니까.”

상현의 자신만만한 말에 스탠다드가 실소를 지었다.

“그럼 이 말을 해줘야겠네.”

스탠다드가 상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Welcome to LA. 날개 없는 천사들의 도시에 온 걸 환영해.”

상현도 스탠다드의 손을 마주 잡았다.

“LA를 떠날 때는 내 등에 날개가 나 있을 거야.”

“미국으로 오더니 건방떠는 스케일이 커졌네?”

“나라가 좀 커야지 말이야.”

“좋아……. 그럼 가자.”

“어딜?”

“어디긴 어디야. LA 랩 문화를 꽉 쥐고 있는 검은 천사들을 만나러 가야지.”

***

미국에서 래퍼들이 성공의 문고리를 잡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랩을 잘해서 유명 프로듀서나 레이블과 계약을 맺으면 된다.

물론 문고리를 잡는다고 다 문이 열리는 건 아니다.

성공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적절한 프로모션과 인맥이 필요하고, 시류를 타고나는 운이 필요하다.

80년대에 나왔으면 뛰어난 래퍼 중 한 명으로 기록됐을 조이배드애스(Joey Badass)가 무질서한 트랩에 대중들이 지쳐가던 2015년에 올드스쿨 붐뱁을 들고 나와 그토록 큰 주목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과정 자체는 매우 간단했다.

하지만 저 간단한 공식에는 아주 높은 장벽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무명 래퍼의 랩이 프로듀서나 레이블에 전달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레이블에 보낸 데모 테이프로 컨택이 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운이 너무 많이 따라야 성사되는 일이다.

그래서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선택한 방법은 레이블이나 프로듀서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바로 지역 내에서 가장 핫한 클럽에서 랩을 하는 것이었다.

레이블 직원들이나 유명 프로듀서들도 당연히 유흥을 즐길 것이고, 부유하기 때문에 핫한 클럽에 찾아올 확률이 높았다.

-클럽 벨라치노(Vella Chino)

상현이 스탠다드를 따라 도착한, LA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의 이름이었다.

스탠다드가 클럽 근처의 주차장에 차를 대며 말했다.

“오늘은 꽤 유명한 친구가 나오니까, 레이블들이 와있을 수도 있겠는데? 얼굴이라도 외워두면 언젠간 도움이 될 거야.”

“아직 어두운 곳에서 본 얼굴은 잘 못 외워. 특히 흑인들은.”

“하긴 뭐, 우리도 동양인 얼굴을 못 외우긴 하지.”

“근데 유명하단 친구는 누구야? 스테이지 네임이 뭐야?”

상현은 혹시나 자신이 알고 있는 래퍼가 나올까 기대하며 물었다.

상현이 아무리 힙합 골수팬이라고 해도, 2007년 LA에 어떤 래퍼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을 순 없었다.

“테라피스트(Therapist)라는 친구야. 뉴욕에서 왔다던 것 같은데, 혼혈이야. 어머니가 백인일 걸.”

“스테이지 네임이 치료사라니 좀 이상한데?”

“파이브식스가 더 이상해.”

벨라치노의 입구는 굉장히 혼잡했다. 아직 8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손님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러나 스탠다드는 시큐리티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클럽으로 들어갔다.

“이 친구는 뭐야?”

“내 친구야. 앞으로 종종 올 거니까 얼굴 외워두라고.”

“이마에 Chinky라고 문신 새기지 않는 한은 기억 못할 걸?”

흑인 시큐리티들이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들끼리 낄낄거렸다.

“Fuck. 초저녁부터 대마초 냄새가 진동하네.”

시큐리티들을 지나쳐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서 스탠다드가 말했다.

“그냥 조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멍청하고 경솔한 놈들이긴 한데, 친해지면 또 금방 친해져. 나도 처음에는 이름보다 White ass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으니까.”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상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테라피스트란 친구를 보려고 레이블이 찾아오는 거야? 영입전쟁 같은 건가?”

“그런 건 아니고, 테라피스트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거든. 생각해봐. 여자들이 많이 오는 날이면 남자들도 많이 오겠지? 그럼 또 그 남자들 때문에 다른 여자들도 많이 오겠지. 결국 화끈한 날이 되는 거야.”

“레이블이나 프로듀서는 그냥 파티를 즐기러 오는 거고?”

“그렇긴 한데, 그러다가 스테이지에서 괜찮은 뮤지션을 발견하면 명함을 건네기도 하지.”

슬슬 상현은 LA 힙합 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개괄적인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3부 리그격인 무명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을 해서 이름을 알린 다음에, 2부 리그 클럽으로 이동을 하고, 마침내 벨라치노 같은 1부 리그 클럽에서 기회를 잡는 것이었다.

물론 3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올라서는 이들도 꽤 제한적일 것이었다. 실력뿐만 아니라 상품가치까지 있는 래퍼들.

게다가 벨라치노의 스테이지에 섰다고 해도 레이블의 눈에 드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었고, 그보다 우선하는 것이 스테이지 핫 타임(11시-01시)을 잡는 경쟁인 것 같았다.

< Verse 35. 천사들의 도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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