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22화 (222/309)

< Verse 34. Reminiscence >

***

2006년 12월.

상현과 준형은 고등학교 학창시절의 마무리를 짓는 기말고사를 끝냈다.

음대의 실용음악학과에 진학할 생각이 없는 준형과 상현이지만, 마지막 시험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공부 계획을 세우고 노력했다.

888 Show Vol.2가 끝나고 휴식 기간이라서 시간이 많다는 것도 한몫했고.

‘내가 예고에서 졸업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회귀할 당시만 해도 운산고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더 빨리, 더 많이 돈을 벌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 일이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회하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후회하고 머뭇거리기에 인생은 한번뿐이고, NG나 편집이 없는 리얼리티 쇼니까.

칼립이 한번뿐인 삶에서 말했던 것처럼.

***

2007년이 밝았다.

상현과 준형이 20살로 법적인 성인이 되었고, 빠른 년생인 하연도 마침내 20살이 되었다.

‘드디어 2007년이네.’

한국 힙합에 있어서 2007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해다.

2010년대 후반까지 한국힙합을 장악할 래퍼들이 대거 등장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등장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던 래퍼들이 주목을 받는 해이기도 했고.

스윙스가 등장을 하고, 버벌진트가 한국 힙합의 영원한 클래식 <누명>의 전조인 <무명>을 발표하는 해.

이센스가 믹스테잎 Blanky Munn's Unknown Verses을 발매 하고, 사이먼디가 데뷔 싱글 Lonely Night를 발표하며, 슈프림팀을 결성하는 해.

그 외에도 수많은 래퍼들이 나타나며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양적, 질적으로 어마어마하게 팽창하는 해였다. 칼립이 주목받는 것도 원래는 2007년이었고.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더그라운드 힙합에 상업 자본이 개입되며 2004-5년부터 시작된 한국 힙합의 골든 에라가 끝났다고 평가받는 해이기도 했으니까.

상현은 가끔 자신이 회귀한 2005년이라는 시기가 절묘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가 만약 2003년이나 2004년 이전에 회귀했다면 쉴 새 없이 음악을 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었다. 물론 나름대로 입지를 다지며 이름을 알렸겠지만, 힙합 씬의 토양 자체가 비옥하지 못한 때였다.

광주에 제대로 된 공연장 하나 없으니 L&S8 공연도, 클럽 호미 공연도, 무등 경기장 공연도, 힙합 더 바이브 2도 모조리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대로 2006년이나 2007년 이후에 회귀했다면 받을 수 있는 ‘주목’의 크기가 작았을 것이었다.

2006년이라면 좀 덜하겠지만, 2007년에는 무수히 많은 핫 루키들이 등장한다. 888 크루 역시 그 핫 루키들 중 하나로 포지션 됐을 것이고, 지금처럼 단숨에 스타즈 레코드와 비교되며 독보적인 위치로 뛰어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2005년이란 절묘한 시기에 등장한 888 크루.

덕분에 2005년부터 시작된 한국 힙합 씬의 양적, 질적 팽창.

다가올 2007년의 한국 힙합 씬은 과거의 2007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장을 맞이할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는 상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아이고, 지친다.”

오경 그룹의 법무팀장인 태지웅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드디어 코흐 레코드(정확히 말하면 엔터테인먼트 원)와 오경 미디어 사이에서 벌어진 문제가 완만히 해결된 것이었다.

상현이나 코흐 레코드가 죽자고 달려든 것이 아니라서 ‘완만히’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마무리였지만, 욕심 많은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결코 아니었다.

이윤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오경 미디어는 이상현과의 계약 조건은 밝힘으로써 얻었던 ‘인디 레이블을 존중하고 양성한다.’는 좋은 이미지를 다 날려 먹었다.

대신 ‘작곡가 착취’, ‘저작 의식 상실’, ‘국제적 망신’이라는 타이틀만 얻게 되었다.

솔직히 금전적인 손실은 문제가 아니었다. 상현의 곡을 훔침으로 얻은 이윤은 오경 그룹 전체 매출로 보면 ‘지도 위의 바위’와 같았으니까.

더 큰 문제는 오경 미디어가 가지는 가치, 오경 그룹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계열사라는 존재의의에 금이 갔다는 것이었다.

태지웅은 현실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서 이상현이 오경 미디어에 꽤 많이 양보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 포장되기에는 오연주 부사장이 굉장한 수완을 발휘해서 일을 잘 마무리한 것처럼 됐지만, 사건 정황을 살펴보면 오연주와 이상현은 한 팀일 것이었다.

코흐 레코드가 이 악물고 달려들었으면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룹 차원에서 이상현의 배려 따위를 알 리가 없지. 아니, 알아도 신경 쓰지 않는 거지. 피해를 봤으니까.’

이제 이상현은 한국에서 음악을 할 수가 없다.

앞으로 오경 그룹이 인상 팍 쓰고 이상현을 지켜볼 것이고, 직접적인 푸쉬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막대한 억제력이 된다. 물론 자연적인 억제력이 생기지 않으면 직접적인 푸쉬도 불사할 것이다.

그러니 마이클 잭슨이나, 비틀즈처럼 국가 시장의 틀을 뛰어넘는 거물이 되지 않는 이상, 이상현의 뮤지션 인생은 끝난 것이었다.

아니면 위로 도약할 계단이 없는 진짜 언더그라운드에서 빌빌 거리거나.

‘근데 이상현이 이걸 몰랐을 거 같진 않은데? 그렇게 머리 좋은 놈이?’

태지웅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상현에 대한 오경 그룹의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해야하는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지웅은 며칠 뒤, 이상현이 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쥐는 하늘을 날지 못하니까.

***

상현은 O비자를 발급받았다.

O비자란 과학, 예술, 사업 등의 분야에서 대단히 특별한 재능, 혹은 특출난 업적을 가진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비자였다. 한 마디로 외국인이 미국에서 해당 분야의 일을 하려는 경우에 신청할 수 있는 비자였다.

싸이가 강남스타일 이후 O비자로 활동을 해서 잠시 유명세를 타기도 했었다.

‘대단히 특별한 재능’ 혹은 ‘특출난 업적’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상현의 경우에는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이룬 바 결과가 워낙 대단한 것도 있었고, 오연주가 인맥을 활용해서 도와준 덕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오 부사장님.”

“글쎄요. 이게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네요. 결과적으로 이 모든 일의 원인제공은 제가 한 것이니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그냥 감사 인사 받으시죠?”

상현의 말에 오연주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현은 어리지만 전혀 어린 것 같지 않고, 배려심이 아주 깊은 사람이었다. 오연주는 그런 상현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자주 느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미안한 것일지도.’

오연주는 상현이 오경 미디어에 강제로 붙잡혀 있던 일과, 족쇄를 끊고 강제로 탈출해야했던 것을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현은 오연주를 얼마든지 비난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오연주 덕분에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원인을 알 수 있었고, 관련자를 처벌했으며, 사고보상금을 받아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오연주가 그녀의 사내 입지를 위해 상현에게 접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 호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일이 복잡해지는 순간 외면할 수도 있었는데, 결국 끝까지 함께했지.’

원인과 결과를 보기보다는 과정에서 드러난 진심을 보면, 상현은 충분히 오연주 부사장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오연주 부사장님도 얻은 게 있어서 다행이네.’

상현이 오연주와 팀을 맺음으로써 홍경수를 압박할 수 있었다면, 오연주는 상현과 팀을 맺음으로써 전사 차원에서 유능함이란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오연주의 이중적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황증거 외에는 이렇다 할 증거가 없고, 오연주의 정치 라인이 강력하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그때 오연주가 말했다.

“상현 군이 쫓겨나듯 한국에서 도망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네요.”

“쫓겨나기는요. 제 발로 당당히 걸어 나가는 겁니다. 아니, 날아가는 건가요?”

“재미없어요.”

“재미는 미국에 쏟아 부으려고 아끼는 중입니다.”

‘오경 미디어 - 코흐 레코드’ 간에 벌어진 일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고, 이면에 있는 ‘홍경수, 차인현 - 이상현’ 간의 일도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여론도 조금씩 시들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무리 되지 않은 일은 오경 미디어가 여전히 한국 음악계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오경 그룹’이 상현에게 ‘적의’를 품었다는 것이었다.

오경 미디어가 적의를 품은 것이라면 오연주 부사장이 충분히 커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룹 차원에서 적의를 품은 것이라면 오연주도 손쓸 도리가 없다.

대규모 공연장은 잡는 족족 펑크가 날 것이고, 방송활동은 꿈도 꿀 수 없다. 888 크루가 모든 것을 총괄하는 앨범 제작이나 유통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만, 그러한 행위가 언론에 노출되는 일은 사라질 것이었다.

상현이 888 크루를 나가지 않는 이상, 888 크루는 상현을 억제하는 인질이 되는 셈이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상현과 888 크루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이상현이 대단하고, 888 크루가 인기가 좋다고 해도 그럴 리가 없지.’

오연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절반만 맞은 것이었다.

힘들겠지만 상현은 오경 그룹의 압박을 견뎌내며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할 능력이 있었다. 888 크루를 사업체인 레이블로 만들고 인맥과 지식을 활용하면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열정을 음악에 쏟아 부을 수가 없다. 음악을 하기 위해 사업을 해야 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또한 나머지 크루 멤버들의 행보에도 제약이 걸린다.

오경 그룹의 압박을 이기기 위해서는 해도 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이 정해질 것이니.

그래서 상현은 한국을 떠나는 것이었다.

888 크루 멤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아니, 솔직히 이건 변명이지.’

변명이라기보다는 합리화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자신 내면의 욕심은, 힙합의 본고장 미국에 그의 이름을 새기고 싶다는 것이었으니.

회귀자란 이득도, 2005년이란 특수성도 모두 다 버린 채 순수한 재능과 열정으로 부딪칠 수 있는 시장.

그곳의 맨땅에 머리를 들이받는 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현은 홍경수와 억지로 계약을 맺는 순간부터 복수의 칼날을 준비했었다. 코흐 레코드가 끼어든 건 예상에 없던 호조였지만, 어쨌든 일이 잘 진행되면 지금처럼 한국을 떠나야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죠? 어쩌면 하늘에 제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 다음 기일 때는 못 올 수도 있겠어요. 그래도 가급적이면 올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의 납골당에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다음 기일 때는 미국에 있을 확률이 크니까.

상현은 자신이 888 크루의 조화를 깨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크루 멤버들은 상현의 선택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심지어 하연은 상현이 숨기고 있던 속마음까지 단번에 꿰뚫어보기도 했다.

‘상현아,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니, 애당초 왜 미안해하는 거야?’

‘응?’

‘네가 미국을 가려는 가장 큰 이유는 크루 때문이잖아.’

상현은 괜한 호언장담이 될 것 같아서 티내지 않았던 속내를 꿰뚫어보는 하연에게 놀라움을 느꼈다.

‘한국에 대형기획사가 오경 미디어 뿐은 아니니까……. 상현이 넌 그 어떤 기획사도 888 크루를 건드릴 수 없게 만들고 싶은 거잖아. 너 스스로가 아주 높아져서.’

하연의 말이 맞았다.

오경 미디어와의 일을 해결한다고 치더라도 이런 일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동안 888 크루는 시스템 밖의 존재였지만 이제는 시스템 위의 존재가 될 필요성이 있었다.

888 크루는 56보다 더 큰 존재였다.

그러니 상현이 높아지면 888 크루 역시 높아지는 것이었다.

‘진짜? 오빠 진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이거 완전 중2병 아니야?’

옆에서 듣고 있던 상미의 말에, 심각하게 말하고 있던 하연이 웃음을 터트렸었다.

그때 상현의 상념을 깨는 오연주의 물음이 들렸다.

“그래서 미국은 언제 가나요?”

“글쎄요. 구체적인 날짜는 아직 안정했습니다.”

“888 크루는 걱정하지 마세요.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이런 말 하는 건 좀 이상한데, 오경 그룹이 싫어하는 건 이상현이란 사람뿐이니까요. 압박을 가하고, 감시하는데도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드는데, 이상현 씨가 없는 888 크루에 오경이 그런 재화를 투자할 이유가 없거든요.”

“네. 대외적으로든, 실제로든 888 크루는 이번 일과 별다른 관련이 없으니까요. 혹시 888 크루에 압박이 가해지면 부사장님이 책임지고 막아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처음부터 일이 잘 안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생각이었군요?”

오연주의 물음에 상현이 대답대신 손을 내밀었다.

“뭐, 영영 떠나는 건 아닌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한동안 못 뵙겠네요.”

“LA로 출장가게 되면 연락할게요.”

“전미투어를 다니느라 LA에 자주 없을 것 같네요. 시간 잘 맞춰서 오세요.”

상현의 농담에 오연주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마주잡았다.

< Verse 34. Reminiscenc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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