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17화 (217/309)

< Verse 33. 히트곡 >

하연이 대중성을 공략했다면 준형과 민호는 완전한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공략했다. 짐(JIM)이라는 유닛을 만들어서 1PD 1MC 체제로 언더그라운드 앨범을 발매한 것이었다.

그동안 888 크루가 사용한 비트는 모든 참여진이 영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멤버 중 한 명이 ‘이 비트 죽인다!’라고 말해도 나머지 멤버들이 감이 오지 않으면 작업에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렇게 되면 솔로곡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바쁘다보니 다른 곡부터 작업을 하게 되고 어느새 영감을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특히 준형이 많이 그랬다. 팀 내 유일한 로우톤이라 그런지 다른 멤버들이 애매한 표정을 짓는 비트에도 확 꽂힐 때가 많은 것이었다.

민호는 그런 준형의 특성을 기억해놨다가 준형이 좋아할만한 비트들을 모았고, 그 비트는 곧 준형의 첫 번째 믹스테잎이 되었다.

총 10트랙으로 이루어진 준형의 첫 번째 믹스테잎 ‘Roaw’는 그야말로 언더그라운드 힙합에 어울리는 앨범이었다.

Row와 Raw를 섞은 앨범 명처럼 로우톤으로 보여주는 날것 그대로의 느낌. 시퍼렇게 날이 선 느낌.

판매를 하지 않는 무료공개 믹스테잎이었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얻었다는 수치는 없었지만, 준형의 Roaw는 언더 힙합 팬들의 대단한 지지를 받았다.

그전까지 888 크루의 스타일이 ‘인혁의 랩 스타일 / 상현의 영향을 받은 랩 스타일’로 나뉘었다면, Roaw이후에는 준형의 랩 스타일 역시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민지와 김환은 밴드와의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했다. 민지는 ‘밴드 L&S’와 김환은 ‘밴드 두두둠’과 몇 개의 싱글 트랙을 발매한 것이었다.

민지가 미주가 들어온 이후 L&S의 세련되고 말랑말랑한 감성 위에 서정적인 랩을 얹었다면, 김환은 두두둠 특유의 전자 밴드 사운드 위에 거친 랩을 얹었다.

둘 모두 상업적으로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밴드 + 랩’의 스펙트럼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상미는 평소와 다름없이 웹툰에 치중했다. 다만 웹툰 중간 중간에 BGM을 삽입하는 시도를 한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상현은 구체적인 방향성 없이 그냥 하고 싶은 음악을 했다.

영화 제작사에서 섭외가 온 OST를 만들기도 했고, ‘언젠간 써먹겠지’란 생각으로 이런저런 트랙들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뉴욕에서 인연을 맺은 뮤지션들과 인터넷을 통해 콜라보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현이 가장 깊이 몰입한 행위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영어란 언어로 랩을 만드는 공부.

The way we live야 기획 단계부터 모국어로 랩을 하는 컨셉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상현은 욕심이 있었다.

자신의 랩이 미국에서도 통할지에 대한 기대와 욕심.

그래서 그토록 영어 랩에 매진했고, 그 성과는 슬슬 나타나는 것 같았다.

대중들은 상현이 OST 말고는 딱히 활동을 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888 크루에서 가장 많은 트랙을 뽑아낸 게 상현이었다.

이처럼 888 크루 멤버들은 개인 활동에 치중하며 각자의 작품을 뽑아냈지만, 공연 활동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각종 행사와 축제.

광주 타이거즈의 축하 공연.

힙합 더 바이브 왕중왕 공연.

클럽 호미 공연과 홍대의 여러 작은 무대들.

888 크루 멤버들은 돈을 위해 무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위해 무대를 찾아다녔다. 그래서 클럽 호미 같이 더 이상 888 크루의 페이를 감당할 수 없는 작은 공연에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와, 이제 호미 무대가 작다고 느껴지다니.’

97년부터 시작된 한국 언더 힙합의 총아들이 모인, 너무나 거대해보였던 클럽 호미가 이제는 작아보였다. 그게 변화된 888 크루였다.

그 사이 본래 역사보다 빠르게 빅뱅이 데뷔를 했고, 칼립이 2집 앨범 을 발매했다.

상현이 기억하던 보다 훨씬 좋은 음반이었다. 수록곡들 중에 겹치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 앨범 명을 제외하면 전혀 새로운 앨범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칼립의 2집은 준형의 와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며 언더그라운드 팬들 사이에서 나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888 크루가 등장함으로 인해서 생겨난 변화는 이루 설명할 수 없이 많았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

상현은 10월 3일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자신의 생일이라서가 아니라 10월 3일에 드디어 유투브 메인에 The way we live가 실리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10월 2일이지만, 한국 시간으로 따지면 10월 3일 새벽 2시쯤이었다.

케이알에스원의 앨범 발매일이 10월 28일로 확정이 됐고, 유투브를 통해서 The way we live가 3주간 선공개가 될 예정이었다.

“떴다!”

생일파티 흔적이 가득한 작업실 거실로 상미가 와다다 뛰어왔다. 자정에 생일 파티를 하고 L&S 멤버들과 888 크루 멤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오빠 그거 떴어!”

상미가 말하는 그게 무엇인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들 컴퓨터가 있는 작업실로 모여들었다.

상미의 말처럼 유투브 메인에는 라는 글자가 박힌 동영상이 떠있었다.

“눌러봐. 빨리 눌러봐.”

“이미 눌렀는데 로딩 중인 거야.”

아직 구글에서 인수하기 전이라 그런지 재생처리 속도가 그렇게 빠르진 않았다. 하지만 IT 강국 한국답게 느린 편도 아니었다.

잠시 뒤 The way we live의 뮤직비디오가 재생되었다.

KRS-One, Skepta, Black M, Hime, 56.

다섯 명의 뮤지션들은 각자의 언어로 각자가 성장해온 랩씬에 대한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놓았다.

메인 자막은 영어였지만 톱니바퀴 모양의 Setting버튼을 클릭하면 자막 언어를 교체할 수도 있었다. 한국어도 있었다.

“오, 괜찮다.”

“히메라고 했나? 이 여자 잘하네.”

“근데 히메면 공주, 여신 그런 말 아니야?”

상현의 벌스는 두 번째 벌스였다. 히메의 첫 벌스가 끝나고 마침내 상현의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Represent Korea! Seoul City! Shiny Town, 빛고을!

Shout-out My crew! Eight, Eight, Eight!

We Call 팔팔팔.

I never came out of my team!

but I'm far-outer!

Far-outer란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쿵! 하는 드럼이 터져 나왔고, 영상 속의 상현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격렬하게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상미가 동영상을 중단했다.

“이게 뭔 말이야? 한국말로 한다며?”

“어? 아니, 그래도 샤라웃 정도는 영어로 해야지 확 집중시키지 않겠냐 동생아.”

“그니까 무슨 말인데.”

상미는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웹툰을 시작한 이후로 가사가 갖는 ‘의미’를 그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곤 했다. 가사의 의미를 모르면 그림으로 잘 풀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미의 기특한 열정을 짐작한 상현이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주 짧은 인트로지만, 이 부분은 벌스만큼이나 신경을 쓴 부분이었다.

첫 인상이 좋아야 확 집중을 할 것이고, 집중을 해야지만 언어의 장벽이 낮아지기 때문이었다.

Shout-out My crew! Eight, Eight, Eight!

(우리 팀에 대한 존경을, 888)

We call 팔팔팔.

(우리는 팔팔팔이라 불러)

I never came out of my team!

(난 내 팀에서 나올 생각 따위는 전혀 없어)

but I'm far-outer!

(하지만 난 far-outer야)

여기서 말하는 far-outer는 ‘인습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 탁월한 사람, 파격적인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888에서 나올 생각은 없지만 난 ‘Far-outer’라는, ‘팔’과 흡사하게 들리는 ‘Far’을 이용한 펀치라인이었다.

“오, 죽이는데?”

“이 자식은 영어로도 펀치라인을 쓰네. 빨리 틀어봐 상미야.”

준형의 재촉에 상미가 동영상을 살짝 뒤로 돌리고는 다시 재생을 시작했다.

곧 스피커를 통해 상현의 랩이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터지는 드럼 스네어와 현악기 사이로 스며드는 건조함과 그루브를 동시에 가진 랩.

L&S와 888 크루 멤버들은 상현의 랩에 혀를 내둘렀다. 랩 특유의 그루브는 물론이고, 라임 하나하나를 계산하여 만든 플로우에 한국어 특유의 된소리가 섞이자 굉장한 매력이 느껴졌다.

보통 계산해서 만든 랩은 화려해도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상현의 랩에는 작위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타고난 영감 자체가 화려하면서 컬러풀한 느낌.

그러면서도 딜리버리는 절대 놓지 않는 욕심까지.

가사 역시 언제나처럼 듣는 사람을 집중시켰다.

“크, 죽인다, 죽여.”

“살인자.”

“상현아 가사 쓰는데 얼마나 걸렸냐. 이건 뭐 공을 들여도 너무 들였네. 마치 꽉 찬 스포츠 용품점?”

“이 새끼는 뭐라는 거야?”

멤버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영상에 집중했다.

영상 속의 상현은 다양한 곳에서 랩을 했고, 꽤 멋진 몸짓을 보여주었다.

상현이 오경 미디어에 들어가서 가장 좋았던 게 채대한에게 작곡을 배운 것이라면, 두 번째는 춤을 배운 것이었다.

힙합은 거리의 문화고 거리의 몸짓과 땔래야 땔 수가 없다. 춤을 잘 춰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게 매력적이라는 의미였다.

우탱 클랜(Wu-Tang Clan)이 그토록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에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표현하는 몸짓도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었다.

상현 역시 배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느꼈던 느낌을 나름의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상현의 16마디 랩이 끝나자 영상은 곧 프랑스의 흑인 래퍼 블랙엠에게로 이어졌다.

실력을 뽐내는 것은 상현의 랩뿐만이 아니었다. 각자의 나라를 대표한다는 중압감 때문인지, 모든 참여진들의 벌스에는 기합이 팍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The way we live의 라인업들은 중압감을 과함이 아닌, 풍성함으로 바꿀 수 있는 노련미가 있는 뮤지션들이었다.

음악을 시작한지 2년도 안된 상현이 특수한 경우였지, 나머지 뮤지션들은 최소 5년 이상을 음악에만 매진해온 이들이었으니까.

특히 마지막 벌스를 책임진 케이알에스원은, 그가 왜 선생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야, 이거 한국에서 화제 좀 되겠는데?”

영상을 전부 시청한 이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쇼케이스에서 밝힌 이후로 상현과 케이알에스원의 콜라보레이션은 꽤 오랫동안 큰 관심을 받았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온 결과물.

관심이 안 갈래야 안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짐작은 옳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The way we live가 굉장한 화제의 중심으로 올라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화제의 범위가 한국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화제 역시 미루어 짐작했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 Verse 33. 히트곡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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