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32. Through to New York >
***
뉴욕을 이루는 5개의 자치구(Borough).
맨해튼, 브롱크스, 브루클린, 퀸스, 스태튼 아일랜드.
이 같은 5개의 자치구는 각기 다른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어서, 뉴욕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도대체 어디를 둘러봐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여행자가 블랙 뮤직(Black Music)에 매료된 팬이라면?
할렘, 웹스터 홀, 이스트 빌리지 등등으로 여행지 루트가 한정될 수가 있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여전히 고민할 거리는 많겠지만.
그러나 뉴욕을 여행을 하는 날짜가 ‘수요일’이라면 블랙 뮤직 팬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반드시 가야하는 곳이 자동으로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아폴로 시어터였다.
아폴로 시어터(Apollo Theater).
뉴욕 할렘에 위치한 극장 및 음악 공연장으로써 전미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극장.
이곳은 스타들이 태어나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Where Stars are Born and Legends are Made)이란 말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폴로 시어터는 매년 130만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명소로써 언제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지만, 그중 유독 수요일은 특별했다.
왜냐하면 아폴로 시어터의 ‘아마추어 나이트’가 열리는 날이 수요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마추어 나이트(Amateur Night).
아폴로 시어터가 전 인종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1934년부터 시작된 아마추어 나이트는, 매주 수요일 7시 30분에 실시되는 일종의 오디션 이벤트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다.
아마추어 나이트의 우승자들은 에이전시 회사에 캐스팅이 되고 모델로 활동하는 등의 기회를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추어 나이트를 잘 모르는 이들도, 아마추어 나이트 출신의 뮤지션들을 알고 나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이클 잭슨, 제임스 브라운, 스티비 원더, 어셔 등등의 내로라하는 흑인 뮤지션이 아폴로 시어터를 통해 기회를 잡은 이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노래, 춤, 랩, 코미디, 비트박스 등등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오디션.
극장을 찾은 관객과 심사위원의 평가로 스타가 탄생하고,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
아폴로 시어터의 아마추어 나이트.
“What your name?"
이곳에 한 명의 동양인이 등장한 것은 2006년 7월 19일 수요일이었다.
“Uhm…… Five Six.”
바로 56라는 랩네임을 가지고 있는 상현이었다.
***
‘APOLLO’라는 붉은 글자가 새겨진 촌스러운 간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오페라 하우스 같은 극장 내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상현은 오페라 하우스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아폴로 시어터의 내부는 마치 오페라 하우스라는 곳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약간 허름해보이던 건물 외관과는 전혀 다른 세상.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높고 넓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와 조화를 이루는 테라스처럼 보이는 좌측의 공간이었다.
이곳은 보통 현악기 반주자들이 배치되는 곳인데, 무대와 객석의 중간에 위치한 옅은 베이지색의 테라스는 금방이라도 웅장한 현악기 사운드를 뿜어낼 것만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면 극장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를 볼 수가 있었다.
극장의 정중앙에 위치한 무대는 다갈색 바닥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테이지라기보다는 귀족들의 파티가 벌어지는 연회장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모습이었다.
어딘가 중세시대 귀족의 성처럼 고풍스럽고 예스러워 보이는 광경. 그러나 막상 그 안의 물건들을 살펴보면, 온갖 종류의 최신식 사운드 장치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아폴로 시어터의 수요일을 대표하는 광경은 참가자들과 관객들이었다.
잠시 후 서게 될 무대를 구경하며 상기된 표정을 짓는 참가자들. 자리에 착석했거나,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입구에 서있는 수많은 관객들.
이것이야말로 아폴로 시어터를 대표하는 광경이었고, 스탠다드의 말에 따르면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 사이에는 상현과 스탠다드도 존재하고 있었다.
“어때? 떨려?”
“당연히 떨리지. 죽겠어.”
“그래? 예선 때는 전혀 안 떨었잖아.”
“예선이야 심사위원을 상대로 하는 거고, 지금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거잖아. 그것도 힙합 본고장의 대중들을. 어우, 긴장돼 죽겠네. 차라리 빨리 시작하면 좋겠다.”
“너 거의 마지막인 거 알고 있지?”
“알아. 뒤에서 세 번째.”
할렘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구경하던 상현이 아마추어 나이트에 참가하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스탠다드가 권유했고, 권유를 듣자마자 강한 충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빼려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가 뉴욕에 온 이유는 그의 음악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고, 아마추어 나이트는 최고의 기회였다.
케이알에스원과의 작업 역시 자신의 음악을 미국에서 시험하는 일이었지만, 아마추어 나이트야말로 ‘힙합의 본고장에서 대중에게 평가받는다.’라는 행위의 본질에 가장 가까웠으니까.
“오늘 2위 안에 들면 본선 2차는 다음 주 수요일인가?”
“응. 본선 2차라기보다는 월간 본선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걸.”
상현이 참여하는 아폴로 시어터의 아마추어 나이트는 최종 우승까지 총 4가지 단계의 과정이 있었다.
예선, 주간 본선, 월간 본선, 매년 10월에 벌어지는 최종결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선을 통과한 상현이 지금 참가하고 있는 것이 7월 셋째 주의 ‘주간 본선’이었다. 여기서 2위 안에 든다면 7월의 마지막 주인 다음 주 수요일에 벌어지는 ‘월간 본선’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월간 본선에서 2위 안에 든다면, 매년 10월에 20명이 벌이는 최종결선 경쟁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스타덤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아마추어 나이트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예선을 통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현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통과했다.
그것도 한국어로 랩을 했는데 말이다.
“난 너가 모국어로 랩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상현이 스탠다드에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라고 불안함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예선을 통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자만이나 과신이 아니라, 그렇게 믿는 자신감이었다.
“왜? 너도 내 음악을 처음 접한 게 움직여야지 라이브 영상이잖아. 그거 듣자마자 엄청 좋아했다며.”
“그게 그거랑 같아? 나야 뮤지션의 입장에서 너의 음악적 해석에 반한 거지만 대중들은 방법을 보는 게 아니라 결과물을 본다고. 언어의 장벽이 없을 수는 없어.”
“뭐, 그렇긴 하지.”
상현의 반응에 스탠다드가 눈썹을 꺾으며 물었다.
“너 설마 진짜로 본선에서도 한국어로 랩을 할 거야?”
“응.”
“왜? 나보다 영어도 잘하면서? 그때 보내준 트랙 있잖아. Worldwide였나?”
“월드와이드? 그건 그냥 한 거지. 내가 영어로 랩을 만들 수 있나 없나를 실험해보는 의미로.”
“무슨 핵실험이야? 실험이 그렇게 대단하게? 제발 부탁하는데 그냥 월드와이드 불러. 그럼 월간 본선에 진출 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글쎄…….”
“월간 본선에서 이겨 최종결선 진출자 20명 안에 들면 코카콜라가 붙을 수도 있다고!”
상현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스탠다드가 답답해했다. 하지만 상현은 영어로 랩을 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가 LA나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다면 영어로 랩을 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야만 같은 언어권이 사람들이 가지는 공감대로 진정한 바이브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손님이고, 이방인이었다.
그러니 어디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순수한 한국어 랩으로만 평가를 받고 싶었다.
“그만 징징거려. 후렴구는 영어로 된 걸 부를 테니까.”
“뭘 부를 건데? JFTR 트랙이야?”
스탠다드의 물음에 상현이 공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Seoul City Mind.”
오늘 상현이 아마추어 나이트에서 부를 노래는 JFTR의 9번 트랙인 Seoul City Mind였다.
본래 서울 시티 마인드는 민지, 하연과 함께 부르는 노래였지만, 상현은 솔로 버전으로도 무대를 꾸밀 수가 있었다.
이것은 상현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888 크루 멤버들도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동안 트랙을 준비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벌스가 두 개, 혹은 그 이상까지도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Seoul City Mind는 JFTR에서 제작기간이 가장 긴 트랙이었다.
“음…… 서울 시티 마인드면 괜찮을 수도 있겠다.”
“Just For The Record라면?”
“망하겠지 뭐.”
스탠다드의 말에 상현이 웃었다.
문화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스탠다드는 888 크루 멤버들이 가장 좋아하는 트랙인 10번 트랙 Just For The Record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워스트 트랙을 꼽아야한다면 10번 트랙이라는 말도 했었다.
어떤 점에서 별로냐고 물어보니까, 스탠다드는 별로인 게 너무 당연해서 마땅한 이유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상현은 그러한 평가에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고, 불타올랐다.
그가 미국에 살면서 음악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는 어떤 ‘단점’이 10번 트랙에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의 음악은 더 나아갈 여지가 있으니까.
스탠다드와 할렘 가를 돌아다니면서 버스킹을 하는 수많은 뮤지션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당연히 래퍼들도 있었고, 그런 래퍼들이 보여주는 솜씨는 대단했다. 상현이 듣기에 정말로 괜찮은 래퍼들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솜씨를 가지고도 뉴욕 힙합의 주류에 편입될 수 없었고, 길에서 음악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중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이곳은 힙합에 대한 기준치가 아주 높은 곳이었다.
‘어디 한 번 부딪쳐볼까?’
제이지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Empire state of mind)가 형성된 빅애플, 멜팅팟 뉴욕에서, 서울 시티 마인드(Seoul City Mind)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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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나이트는 아폴로 시어터를 가득채운 관객들의 굉장한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앉아서 듣는 사람들도 있었고, 무대의 양쪽 측면에서 서서 듣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대 위의 참가자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질서가 숨어있기도 했다.
총 15명이 참가한 7월 셋째 주의 아마추어 나이트.
15대 1이 넘는 치열한 예선을 뚫고 올라온 이들만 모였기 때문에, 무대의 수준은 흔한 오디션과는 차원이 달랐다.
관객들은 잘하는 이들에게는 아낌없는 환호를, 실수를 한 이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기준치에 미달한 공연자들에게는 의외로 냉정한 침묵을 보여주기도 했다.
관객들의 반응이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경연인 만큼 심사위원들을 헷갈리지 않게 하는 아폴로 시어터 관객들의 문화였다.
가장 큰 환호를 받은 것은 중국계 미국인이 선보인 비트박스와 시카고에서 온 중년의 백인 남성이 선보인 스탠딩 코미디였다.
사실 상현은 스탠딩 코미디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고 있는 말은 다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안에 레퍼런스된 웃음의 소스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테러, 뉴욕, 정부를 엮어서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지만 솔직히 왜 웃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느새 1시간이 훌쩍 넘어 2시간으로 접어들 때쯤 상현의 앞 차례 참가자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뉴욕을 대표하는 노래인 프랭크 시나트라의 Theme from New York, New York을 소울풀하게 해석한 무대였는데 그동안의 무대 중 가장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상현은 무대 뒤에서 기다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앞 차례의 참가자가 뉴욕에 대한 러브레터를 보냈고, 이제 자신은 한국의 수도, 서울에 대한 러브레터를 보낼 차례였다.
< Verse 32. Through to New York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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