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205화 (205/309)

< Verse 31. Jealous, Forgiveness, Truth, Romance >

상현의 감정이 점점 짙어짐에 따라 20시 스테이션의 방송실이 조용해졌고,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도 조용해졌다.

‘난 지금 라디오 앞에 있는 이들의 시간을 빼앗고 있을까?’

상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I just see’만 반복되는 브릿지를 뒤로 하고는, 두 번째 벌스를 시작했다.

첫 번째 벌스가 그녀에 대한 첫인상을 표현하는 생동감 있는 목소리였다면, 두 번째 벌스는 시작부터 이미 체념의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벌스 2는 마디 끝이 툭툭 끊어지며 박자를 당겨먹는 형식의 랩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간의 시간은 자꾸 흐르네

벽의 시계는 자꾸 째깍대

주변을 맴도는 인공위성 같아

돌아버릴- 것 같아

두 번째 벌스에는 결국 뭔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카페를 떠나는 상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인공위성처럼 주변을 맴도는 것으로 이미 정해져버린 역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전파를 쏘아 보내야하는 역할.

4마디…… 8마디…… 12마디…….

툭룩 던지는 상현의 랩이 이어지며 감정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내- 발걸음이

이미 축 늘어져, 널 향한 더듬이

그 순간,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쳐

네 눈은 동그랗고, 눈동자가 아주 커

카페를 떠나려는 순간 ‘왠지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는 상현의 모습.

그 모습을 끝으로 I Just See의 벌스가 끝이 났다.

다시 돌아오는 후렴의 차례.

거기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냥 너의 손을 잡아보고 싶었어-

둘이 함께 길을 걷고 싶었어-

상현의 담담한 듯 읊조리는 녹음된 목소리 위로 얹어지는 멜로디 가득한 노래.

그 순간 상현의 헤드셋으로 후렴을 따라 흥얼거리는 박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이 후렴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상현이 슬쩍 웃음 지었다.

혜연이 자신도 모르게 후렴을 따라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 후렴에는 의도적인 ‘희망’의 감정이 슬며시 삽입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상현은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하고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카페를 나오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착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착각인 줄 알았지만,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3주 정도가 지난 뒤였다.

회사의 막내로써 취업멘토링을 나간 모교.

상현이 담당하는 취업멘토링 조에서 카페 안의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카페 안에서 상대방은 인지하고 있던 것은 상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But, You, Young & Pre-tty

난 자신 없어, I Just See

그러니 상현의 목소리에 미묘한 희망이 생기는 것이었다. ‘난 자신 없어’라는 말이 정말로 자신 없다는 뉘앙스에서 ‘에이, 난 자신 없어.’라고 슬쩍 빼는 듯한 느낌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56 JFTR>의 앨범을 통째로 들은 사람은 1번 트랙 ‘I Just See’ 다음으로 이어지는 2번 트랙 ‘시간이 필요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앨범의 순서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I Just See’와 ‘시간이 필요해’ 사이에 카페 안의 그녀와 이어지는 내용이 생략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둘은 결국 이어지는 것이었고, 그래서 마지막 후렴에는 미묘한 희망의 감정이 숨겨진 것이었다.

“누나.”

그때 후렴을 부르던 상현이 혜연에게 손짓했다.

함께 부르자는 신호.

잠깐 머뭇거리던 혜연은 마이크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총 4번이 반복되는 아웃트로(Outro) 후렴의 절반을 상현과 혜연의 목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그냥 너의 볼에 입 맞추고 싶었어-

둘이 함께 잠에 들고 싶었어-

But, You, Young & Pre-tty

난 자신 없어, 아저씨

19살이 상현이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칭하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했지만, 감성적으로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혜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상현의 목소리 뒤로 자신의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깔았다.

연기자 특유의 깔끔한 발성을 가진 혜연의 목소리가 비트와 상현의 노래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둘 다 전문적인 보컬이 아니었기에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풍부한 감정이 담긴 듣기 좋은 보이스가 맞물리니 아름다운 소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상현이 I Just See는 청취자들의 3분 20초를 훌륭하게 훔치고 있었다.

I Just See가 끝나고 라디오 부스는 잠시 동안 여운이 맴돌았다. 3초 이상의 멘트 공백이 발생하면 안 되는 라디오지만, 이것은 허용된 공백이었다.

그 어떤 멘트보다 알찬 공백.

공백이라기보다는 여백.

10초 가까이의 이례적인 침묵을 깬 것은 사회자라는 일념 하에 가장 먼저 여운에서 깨어난 혜연의 진행멘트였다.

“이상현 씨의 솔로앨범 56 JFTR의 1번 트랙 아이 저스트 씨(I Just See)였습니다. 노래 너무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누나가, 아니 박혜연 씨가 도와주신 덕분에 노래가 더 풍성해졌네요. 가사를 전부 외우고 계신지는 몰랐어요.”

“저희 매니저가 56 JFTR이라면 질색을 합니다. 이동 중에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 앉겠다고요.”

스스로의 말에 뿌듯한 표정을 짓던 혜연이 곡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제가 느낀 게 맞다면, 그리고 앨범 스토리가 맞다면 카페 안의 아가씨와 곡의 화자인 아저씨는 결국 이어진 건가요?”

“네. 둘은 3주쯤 뒤에 우연히 재회하는데, 그때 아저씨가 알게 되는 거죠. 그날의 카페 안에서 상대방을 인지하고 있었던 게 혼자만의 감정은 아니었다는 걸.”

“오, 그럼 아가씨도 아저씨한테 첫 눈에 반한 건가요?”

혜연의 물음에 상현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반한 것 까진 아니고 그냥 본 거죠. 나름대로 눈 여겨 봤다고 해야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설정 상 아저씨는 몇 살이고 아가씨는 몇 살인가요? 여자 분에 대해 묘사하는 ‘Twenty or Twenty one’이라는 가사가 있긴 한데……. 그건 순전히 아저씨 입장에서 하는 추측이잖아요?”

“여성분은 빠른 년생인 스물한 살이고, 아저씨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스물여덟 살입니다.”

“스물여덟이요? 그럼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절대 아닌데요?”

“네, 그렇죠. 하지만 중요한 건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니까요. 난 이제 슬슬 배도 나오고, 회사에서 상사한테 매일같이 깨지는 멋없는 아저씨라는 생각을 가졌거든요.”

상현의 구체적인 답변에 혜연은, 이래서 상현이 그토록 완벽한 감정 연기를 보여줬구나라는 감탄을 했다. 그러나 모든 뮤지션들이 완벽한 설정이 있다고 이런 연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재능이겠지.’

또 하나 감탄스러운 점은, 스물여덟 살 사회 초년생이란 설정이 굉장히 보편적이라는 것이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

대중의 이야기.

“청취자분들이 메시지로 엄청난 양의 질문을 보내주시고 계신데, 몇몇 질문들은 래퍼 지망생 분들의 메시지로 보이네요. 제가 그분들을 대표해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솔로앨범의 트랙들을 만들 때 이상현 씨는 화자가 된 건가요? 아니면 화자를 지켜보는 제 3자가 된 건가요?”

“화자가 된 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랩을 하지 않았을 저의 미래를 상상한 거죠.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을 모습을.”

“어? 그럼 1번부터 6번 트랙까지 남자 주인공은 모두 동일인물인가요? 평범한 이상현 씨의 미래라는?”

“네.”

“그럼 남자는 한 명인데 여자는 세 명이네요? 이거 완전 카사노바인데요?”

***

-그럼 남자는 한 명인데 여자는 세 명이네요? 이거 완전 카사노바인데요?

진행자 박혜연의 말에 미주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카사노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자의 촉감이 온다. 56 JFTR에서 나오는 세 명의 여자가 실존 인물인 것 같다는 촉이.

처음에 상현에게 56 JFTR의 컨셉을 들었을 때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의 설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었다.

그러나 앨범을 듣고 보니 마냥 재밌을 수가 없었다.

노래 속 헤로인들이 어떤 실존 인물을 따서 만든 것 느낌이 팍팍 드는데, ‘연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씨, 내가 너무 소극적이었나.’

사실 그동안 너무 바쁘긴 했다.

888 크루는 힙합 더 바이브를 필두로 시작 JFTR로 절정을 찍으며 엄청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고, 상현은 말할 것도 없었다.

L&S 역시 무등경기장 공연과 로얄 밴드를 기점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당당히 만 단위의 앨범을 파는 팀이 되었다.

물론 888 크루처럼 십만 단위로 진입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아뇨, 시간의 텀이 있죠. 짧으면 2년에서 길면 4년이라는 연애의 텀이. 똑같은 순간에 세 명의 여자를 만났다는 건 아니니까요.

상현의 말에 미주가 생각을 잠시 멈추고는 다시 라디오에 집중했다.

***

잠시 생각을 정리한 상현이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1, 2번 트랙의 저는 사회 초년생의 28살이고, 3, 4번 트랙의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한참 사업을 진행 중인 32살입니다. 5, 6번 트랙을 만들 때는 사업이 성공해서 돈에 대한 부족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공허함을 느끼는 37살을 떠올렸고요. 모두 제가 가정한 저의 미래입니다.”

상현의 말에 박혜연이 갑자기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 이야기 어디서 한 번도 한 적 없죠?”

“그럼요. 56 JFTR에 대한 인터뷰 자체를 아직 한 적이 없으니까요.”

작게 ‘나이스!’를 외치는 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라디오를 들은 사람들은 분명히 내일의 라디오도 들을 것이 분명했다.

내일은 완전체의 888 크루가 나오는 날이고, 그들의 정규 1집 앨범 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상현 혼자 만든 56 JFTR도 이렇게 뒷이야기가 많은데, 7명이서 모여서 만든 JFTR은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을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피디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덩실덩실 피고 있는 게 보였다.

박혜연이 888 위크를 진행한다고 했을 때 가장 놀랐던 사람들이 지금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피디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놀랐다기보다는 난색을 표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었다.

‘그건 좀…….’

‘네? 아니, 왜요? JFTR이 펑 터지고, 56 JFTR이 터졌는데?’

‘아니, 우리도 알지. 888 크루가 라디오에 나오면 난리가 날 거라는 것을. 우리도 스페셜 스테이지는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일주동안 진행하기에는 예산이 좀…….’

888 크루는 소속사가 없는데도 몸값이 장난이 아니다.

힙합 더 바이브가 끝난 직후에는 연예계 상위 20%의 몸값이었다면, JFTR이 터진 지금은 상위 5%의 몸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6 JFTR까지 연타석으로 터트린 이상현의 몸값은 그야말로 상위 1%였고.

그러니 이런 이들을 일주일 내내 섭외하는데 얼마가 들어갈 지 알 수가 없었다. 비교적 페이가 저렴한 라디오였지만, 페이가 저렴한 만큼 책정된 예산도 적은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피디들의 걱정에 박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쇼케이스에서 내기를 한 덕분에 무료로 할 수 있다고.’

‘에이, 혜연 씨 그게 성사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번이면 몰라도 일주일 내내 무료로 방송을 하겠어요? 결국 접촉하면 돈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어요. 뭐, 페이 컷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무료는 말도 안 되죠.’

‘피디님들이 888 크루 애들을 잘 모르시는 거예요. 걔들은 절대 그럴 얘들이 아니라니까요? 뒤에서 강짜 놓을 소속사도 없어요.’

피디들은 연예계에 아주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혜연이 왜 이렇게 현실감각을 상실했는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888 위크는 무료로 성사되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접촉한 888 크루는 단 한 번도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라디오 방송국 측에서 성의표시를 한다니 괜찮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듣자하니 혜연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는 것으로 퉁 쳤다고 했다.

혜연의 뮤직비디오 출연에 책정된 금액이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888 크루 전원이 라디오 한 번 나오는 것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일주일 동안 이어진다.

그것도 JFTR이랑 56 JFTR의 인기로 굉장한 행사섭외가 들어오고 있는 이 시점에.

‘진짜구나.’

피디들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 팀이, 그들이 쇼 비즈니스에 들어오고 처음 보는 새로운 ‘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Verse 31. Jealous, Forgiveness, Truth, Romanc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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