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99화 (199/309)

< Verse 30. 보름 >

888 크루의 공연은 사전 녹화 없이 3곡을 연달아 진행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물론 음악방송의 생방송이 찍는 순간 바로 내보내는 생방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 중간 사전 녹화분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촬영과 방송 사이에 3에서 5분 정도의 갭이 있었다.

이러한 갭은 사전녹화 분량에 따라 어느 순간에는 1분 안쪽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5분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888 크루가 공연을 하는 순간에는 3분 정도의 갭이 있었다.

히치하이킹이 끝나자마자 상현과 준형이 무대 뒤로 이동해서 지금까지 입고 있던 검은색의 ‘062 X 888’ 티셔츠를 벗어버리는 사이, 지미집 카메라는 잠시 관객석을 향했다.

-우와아아아!

-꺄아아아악!

지미집이 긴 목을 돌려 자신들을 훑자, 관객들이 함성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처음처럼 날카롭고 우렁차지 않았다.

지쳐서? 888 크루의 무대에 흥이 떨어져서?

그럴 리는 없었다. 3시간이 넘는 888 Show를 엄청난 하이 텐션으로 진행했던 888 크루가 10분도 안 되는 러닝타임만에 텐션을 떨어트릴 리가 없었다.

관객들의 목소리가 줄어든 것은, 그들의 목이 쉬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신나게 비명을 질렀기에.

너무 힘차게 노래를 따라했기에.

“우리 어쩌냐.”

“야, 진짜 장난 아니다. 우리도 랩이나 할까?”

“우리 회사에만 888 크루 벤치마킹하는 연습생 팀이 4개야 임마. 괜히 거기 껴서 경쟁하기 싫으면 하던 거나 잘해야지.”

888 크루 다음 차례로 무대를 책임져야하는 ‘베커스’라는 4인조 인기 남성 아이돌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들이 한숨을 내쉰 이유는 방청객들의 오버 페이스에 있었다.

888 크루의 무대가 끝나는 순간 방전되어 늘어질 방청객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훤했다. 아마 자신들이 공연할 때면 열정적인 팬덤 이 외에는 호응이 전무할 것 같았다.

‘888 크루의 공연은 처음 보는데 진짜 장난 아니…… 어? 공연?’

베커스의 리더 수호는, 자신이 888 크루의 핫 데뷔 스테이지를 ‘공연’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에 잠겼다. 문득 어떤 비밀을 엿본 것 같았다.

가수들에게 음악방송 ‘무대’는 ‘공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공연이 그들의 음악을 보여주는 자리라면, 음악방송의 무대는 잘 짜여진 퍼포먼스를 기계적으로 행하는 느낌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콘서트 등의 공연은 이미 그들을 응원하려고 마음먹은 팬들을 위한 자리였다. 그러니 실수를 할 수도 있었고, 기분에 따라 업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음악방송의 무대는 불특정 다수, 브라운관을 통해 지켜보는 시청자들을 유혹하는 무대였다.

단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팔의 각도, 시선처리, 심지어 발끝이 향하는 방향까지 정해져있었다. 가수들은 모든 것이 정해진 틀 안에서 완벽하고 또 완벽한 모습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88 크루는 아니었다.

드라이 리허설, 드레스 리허설, 카메라 리허설, 그리고 본 무대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행동은 각기 달랐다.

소리를 조금 더 지르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손을 든다. 리허설 때 받을 수 없었던 호응을 받으면서 몸짓도 더욱 격렬해졌다.

곡을 시작하는 위치만 정해져있을 뿐이지, 그 중간에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정해진 틀이 아니라, 관객들이 보여주는 반응과 호흡이었다.

‘그래서 공연처럼 느껴지는 거구나.’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호응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들은 기계적이었고, 888 크루는 인간적이다.

명배우의 연기를 보고는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아주 잘 만들어진 CG를 보고는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베커스의 리더 수호는 888 크루의 비밀을 엿봄과 동시에 놀라움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자신감이 있어야지 아무런 준비 없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걸까?’

만약 자신에게 주어진 안무 없이 무대에 올라가야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생각만 해도 눈앞이 깜깜하다. 노래야 어떻게 부를 수 있겠지만,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888 크루의 제스쳐나 동선은 굉장히 정적이었던 것 같다. 많이 움직이지 않았고, 춤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없거나, 무대가 비어보이는 느낌은 없었다.

무대 위가 6명으로 꽉 찬 느낌.

디제이 부스에 있는 우민호를 제외하면, 백대서 하나 없는 고작 5명인데 말이다.

수호는 이런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며 시선을 무대 위로 돌렸다. 이제 그는 다음 무대에 대한 걱정이나, 안무의 숙지 상태, 꼭 기억해야할 동선 등등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888 크루의 마지막 무대 Just For The Record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음악 장르는 다르지만, 888 크루의 바이브를 추종하는 또 한 명의 888 키드가 엉뚱한 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

신준형, 이상현, 신하연, 오민지, 김환, 우민호, 그리고 이상미.

마지막 곡을 위하여 옷을 갈아입은 채로 비트를 기다리는 888 크루의 멤버들의 표정은 너무나도 밝았다.

최초의 방송 무대라는 걱정은 어느새 씻은 듯이 없어졌고, 그들의 귀를 아프도록 울리는 관객들의 함성 소리는 감미로웠다.

‘즐겁다.’

상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무나 즐거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는 곡이 남아있다는 점이 또 즐거웠다.

국가대표는 그들의 랩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곡이었고, 히치하이킹은 지금까지 그들을 태워준 것들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있는 곡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곡.

세 번째이자, 파퓰러 뮤직 무대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곡인 10번 트랙 ‘Just For The Record’에는 즐거움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즐거움.

JFTR 앨범을 구상하고, 가사를 쓰고, 격렬히 토론하고, 녹음하는 순간에 대한 즐거웠다. 고된 순간도 있었지만 그 순간 역시 창작이란 쾌감의 밑거름이 되었다.

Just For The Record는 이러한 즐거움을 복잡한 수사나 비유 대신 순수함으로 표현한 곡이었다.

‘보여주자. 이 무대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즐거운지.’

세종악기사에서 만났던 여중생 무리부터 그동안 만나온 수많은 조력자들. 수많은 관객들. 수많은 뮤지션.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상현의 부모님과, 하연의 부모님에게까지.

‘보여주자.’

상현의 다짐을 짐작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시간이 된 것인지. 상현의 다짐이 끝나길 무섭게 세트장을 가득 채우는 비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TV로 보는 이들은 히치하이킹이 끝나고 화면이 방청석을 향했다가, 금방 무대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던 888 크루 멤버들이 어느새 전부 하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것이고.

이처럼 실제 무대와 브라운관을 타고 퍼져나가는 무대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음악이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경쾌한 드럼 스네어가 마디의 위치를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888 크루 멤버들은 그 위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박자를 탔다.

스네어와 스네어의 사이는 그들의 놀이터이자 경기장이었고, 평생을 보낼 직장이자 편안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였다.

잠시 뒤, 인트로가 끝나고 본격적인 벌스가 시작될 때는 그들의 영감을 그릴 도화지이자 그들의 이야기를 적어낼 원고지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비트가 점점 고조되고, 관객들의 기대어린 시선이 무대 위로 집중되는 순간, 상현의 오른쪽에 서있던 민지가 앞으로 나오며 마이크를 잡았다.

민지가 먼저 멘트를 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888 크루 멤버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민지의 말을 듣는 순간, 크루원들은 동시에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뭐하고 있냐? 박인혁.”

그랬다. 지금 그들의 즐거움을 제대로 보아야할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박인혁.

민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루원들이 지금까지는 까먹고 있었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인혁이 형, 법전은 재밌어요?”

“공부 재밌냐? 우린 지금 더 재밌다.”

“부럽냐?”

당연히 크루원들의 말은 인혁을 향한 조롱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제 자리로 돌아오라는 응원의 메시지이자, 그리움을 표현하는 그들의 방식이었다.

이러한 888 크루의 모습은 마치 음악방송의 마지막에 1위를 확정짓고 앵콜 무대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무대를 지켜보거나, 직접 나와서 두 눈으로 무대를 보던 가수들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듯 바뀌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음악방송 무대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시스템의 제약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이들.

시스템 밖의 존재.

이런 888 크루를 대표하는 래퍼, 이상현의 벌스가 마지막 무대의 포문을 열었다.

작년 이쯤 세종악기사에서 알렸던 시작.

아무 것도 모른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

내 영웅이던 런디엠씨에게 외쳤던 샤라웃!

홍사장님과 L&S, 첫 번째 팬, 고마운 사람

랩을 시작한 상현의 입가에는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런 디스 타운(Run This Town)이 아직은 워크 디스 웨이(Walk This Way)이던 시절.

그 순간으로부터 1년.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매일이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부정할 수가 없어. I'm Happy

이 곡을 녹음하는 순간조차, 내 옆이

비어있지 않다는 사실에 웃음을 지을게

부정적인 생각과 미움을 지우는 지우개

상현의 8마디가 경쾌한 리듬에 맞춰 스네어와 스네어 사이를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행복한 사람과 함께할 때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양의 에너지가 전염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관객들은 지금 상현의 에너지에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에 대한 보답은 어느새 쉬어버린 목소리로 또 한 번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 없었다.

-우와아아아아!

-아아아아악!

자신의 8마디 랩을 끝낸 상현이 슬쩍 옆으로 빠졌다.

그 순간 무대의 중앙으로 치고 나오는 이는 888 크루의 듬직한 리더, 준형이었다.

준형의 랩은 상현의 가사를 이어받아 진행되는 내용이었다.

그게 JFTR! 우리 첫 번째 앨범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내 Elbow

Club Hommie부터 무등 경기장과 힙합 더 바이브-

손이 닿지 않은 거리에서 관객과 하이파이브-

관객들은 준형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높은 톤을 유지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톤의 변화가 음악적 의도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는 흥분 때문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신이 나니까.

당신의 함성을 가득채운 배는 이미 만선

객석을 수-놓는 당신들의 목소리에서

꽃향기가 나, 옆에서 상현이가 ‘할리우드’

라고 날 놀려도 여전히 피우지 난 ‘난리굿’

이 트랙을 만들 때 준형의 ‘꽃향기가 나’라는 가사를 보고 상현이 버릇처럼 ‘크, 할리우드’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준형은 그것을 가사에 삽입했다.

왜냐하면 Just For The Record는 JFTR을 만드는 순간에 생겨난 즐거움을 기록한 노래기 때문이었다.

< Verse 30. 보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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