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98화 (198/309)

< Verse 30. 보름 >

사실 이건 888 크루의 잘못이 아니었다.

방송국 음향기술팀의 잘못이었다.

컴프레서를 먹인 관중들의 소리가 피크를 터트리려면, 컴프레서 레벨을 뛰어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동안은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컴프레서 레벨을 뛰어넘을 수 없어 보였기에, 음향기술팀은 사운드 밸런스를 고정셋으로 맞춰놓았다.

물론 조절하려면 조절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밸런싱을 잡는 시간 동안 888 크루의 무대가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운드를 조절하는 의미가 없었다. 나한수 피디가 손을 놔버린 이유였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방송 사고를 일으킨 888 크루 멤버들은 갑자기 분주해진 스태프들을 보고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래?”

“몰라?”

888 크루 멤버들은 그들이 일으킨 사건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커밍 업 넥스트가 끝나고 모든 카메라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동시에 888 크루 멤버들의 인이어를 통해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888 크루 생방송 무대. 시작 5초전……, 4초전…….

지미집이 긴 목을 움직여 풀샷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러 대의 카메라들이 각자 지정된 역할을 수행하려 앵글 포인트를 잡아냈다.

-3초전……, 2초전…….

888 크루 멤버들은 각자 지정된 시작 위치를 확인하고는 숨을 골랐다. 어디선가 큼큼 하는 준형의 헛기침소리가 들렸다.

상현은 준형의 헛기침 소리를 들으며 버릇처럼 객석의 관객들을 훑었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까지 쭉 이어지는 그의 시선으로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닌 관객들이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광경.

-1초전……, 레디……!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옆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동료들.

888 크루.

상현은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Let`s Go Get`em!

-큐!

큐 사인과 함께 무대의 조명이 일제히 켜지고, 묵직한 드럼 소리가 온 세상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최초로 기록될 공중파의 Real Hiphop.

JFTR의 성공을 더 거세게 밀어붙일 데뷔 무대.

888 크루란 이름 앞에 영원히 따라붙게 될 ‘랩스타(Rapstar)’란 수식어의 시작.

888 크루의 쇼 타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한국 힙합 씬에는 888 크루 외에도 꽤 많은 래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는 매해가 지날수록 굉장한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데뷔 1주년을 보낸 888 크루는 ‘최고’와 ‘최초’라는 찬사를 휩쓸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이유를 스킬적인 면에서 찾았다. 기존의 한국 힙합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문제점인 ‘작위성’을 해제시켰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누군가는 가사에 담긴 메시지를 언급하기도 했다. 어떤 메시지의 곡도 편안하게 풀어낼 수 있는 888 크루 특유의 가사가, 랩이라는 장르에 최적화 되어 있다고들 말했다.

누군가는 그들의 독특한 사운드를 이유로 꼽았다. 한국 최초의 트랩 뮤직부터 시작해서 흔한 올드스쿨 이스트의 비트들도 888 크루가 만들어내면 독창적인 부분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이건 888 크루의 무대를 실제로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888 크루의 무대를 직접 본 사람들은 888 크루를 최고로 꼽는 이유를 딱 한 가지로 정의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진 팀.’

랩 스킬은 대중들에게 별 메리트가 없는 부분이었다. 대중들이 스킬을 따지며 랩을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가사가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이 좋았지만, 2008년 이후 시작된 후크송의 지독한 선전을 생각해보면 유의미한 가사가 곧 인기의 척도는 아니었다.

사운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중들은 음악을 즐기는 것이지 분석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베이스가 될 뿐이었다.

888 크루의 음악에는 베이스 이상의 것이 숨어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사람을 끌어당기고 흥분시키는 어떤 것.

888 크루의 음악에는 그런 것이 있었고, 그러한 부분이 파퓰러 뮤직에서 제대로 보여 지고 있었다.

그 시작은 상현의 후렴구였다.

Country Code, Eighty Two!

한국대표의 Attitude!

드럼 위, 경기장에서

승리가 반복, Daily Loop!

상현의 후렴이 시작됨과 동시에 관객들의 힘찬 떼창이 시작되었다.

“이거 뭐야?”

“떼창?”

무대를 끝냈거나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가수들과 스태프들, MC들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이, 김 피디. 이거 핫 데뷔 아니야?”

“맞습니다.”

“이게 데뷔 무대라고?”

888 크루를 알긴 하지만 제대로는 모르는 나이 지긋한 원로 가수들도 놀라움을 표했다.

-컨트리 코드 에이리투!

-한국 대표의 애티튜드!

쏟아지는 함성과 호응.

핫 데뷔라는 포맷이 의미하는 ‘기대되는 신인의 데뷔 무대’라는 문장이 참으로 무색해지는 광경이었다.

그 어떤 데뷔 무대에서 떼창이 나온단 말인가.

-드럼 위! 경기장에서!

-승리가 반복! 데일리 루프!

본래 음악방송에서 떼창이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불가능한 일까지는 아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음악방송 방청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특정 스타의 팬덤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팬덤들은 라이벌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일이 없었다.

경쟁의식 때문이었다. 물론 경쟁의식이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가수의 노래 가사를 전부 외우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 888 크루의 무대는 달랐다.

물론 모든 관객이 JFTR의 11번 트랙인 국가대표를 따라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엄밀한 비율을 따져보자면 50%가 조금 못되는 관객들이 떼창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물쩍 따라하는 관객들까지 포함하면 비율은 조금 더 늘어나겠지만.

하지만 그 절반의 관객들이 보여주는 역동성과 흥분은 관객석을 모조리 덮을 만큼 강력했다.

절반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10%가 100%를 전염시키긴 힘들지만, 50%는 100%를 충분히 전염시킬 힘이 있었다.

이러한 떼창은 후렴구를 넘어서 벌스까지 이어졌다.

member of the national team

한국 전체에서 날뜀

-8인의 앙리의 아스날 팀!

-론리 로드의 아스팔트 위!

정박이라는 한계를 극복한 김환의 폭발적인 랩이 시작되자, 후렴구 못지않은 떼창이 이어진 것이었다.

노래를 따라하는 이들 모두가 888 크루의 팬덤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가수의 팬덤으로 파퓰러 뮤직을 찾은 관객들도 이 순간만큼은 888 크루를 응원하고 있었다.

이상하지만 888 크루는 그들이 응원하는 스타의 ‘라이벌 가수’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굳이 경쟁의식을 느낄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라는 감정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이것은 관객들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스템 밖에 존재하는 888 크루의 다름을.

이런 상황이 되니, 888 크루의 노래를 모르는 나머지 절반 정도의 관객은 이상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뭔진 잘 모르겠는데, 주변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흥분해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게 888 크루의 음악이고 JFTR이라는 앨범에 수록됐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노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스치듯 몇 번 들어봤거나, 처음 들어보는 노래.

‘이게 뭐지? 재밌어 보이는데?’

중고등학교의 학급에서 유행하는 컴퓨터 게임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거의 망해서 사용자가 소수인 게임이라 하더라도, 학우들 중 몇 명이 즐겁게 즐기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뛰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즐거움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거나, 소외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 888 크루의 노래를 모르는 나머지 관객들이 느끼고 있는 기분이 꼭 그랬다.

즐거움을 나누고 싶고, 소외되고 싶지 않은 기분.

그들은 마음속으로 집에 돌아가면 888 크루의 노래를 들어볼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다른 감정을 다 제쳐놓더라도, 무대 위에서 랩을 토해내는 888 크루의 모습을 보면 노래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김환 - 신하연 - 신준형 - 오민지.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네 명의 벌스 사이로 후렴을 맡은 상현이 중간 중간 끼어들었다.

상현의 미친 듯한 딜리버리는 여전했다.

이것은 벌스 사이의 공백을 채우고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후렴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본래 888 Show를 할 때까지만 해도 ‘국가대표’는 환과 하연, 인혁이 벌스를 맡고, 상현이 후렴을 맡은 4명의 곡이었다.

그러나 인혁이 앨범 녹음에 불참하게 되면서 벌스를 12마디로 줄이고, 민지와 준형이 추가되는 단체곡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난 국가 대표, 아니, 국가 대포

아니, 국가 래퍼, 누군가에겐 또

현실의 Role Model, 꿈의 이상향,

아니 이상형, 아니, 이상현?

준형의 랩이 시작되자 지금까지의 떼창 중 가장 큰 떼창이 나왔다.

‘꿈의 이상향, 아니 이상형, 아니 이상현?’이라는 익살스러운 부분을 관객들이 목 터져라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다 같이!”

상현이 소리를 지르며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몸을 좌우로 흔듦과 동시에 손을 올렸다 내리며 역동적인 바운스를 만들어냈고, 이러한 바운스는 곧 객석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리듬으로 손을 흔드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무대 위에서 자신들을 향해 손짓하는 인파의 물결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상현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거, 트랙 순서를 잘못 정한 거 아니야?’

국가대표는 두 번째 스킷 다음의 곡으로, ‘미래’의 부분에 포함되는 곡이었다. 10번 트랙까지가 현재의 모습이니까, 11번 트랙은 가까운 미래였다.

888 크루가 한국에서 랩을 가장 잘한다는 선언.

그들이 랩이란 종목의 국가대표라는 자신감.

첫 방송 무대의 데뷔곡으로 이토록 적절한 곡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환호시킬 수 있는 곡이 있을까?

그런데 이러한 선언과 자신감이 미래가 아닌 것 같았다. 당면한 현실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2006년 6월이라는 이 순간에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팀은 없을 것 같았다.

‘스타즈 레코드 형들은 3집 앨범 만드느라 잠수 중이니까!’

상현은 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국가대표. Member of the national team.

그 순간 준형의 랩이 끝이 났고, 또 한 번 상현의 후렴이 돌아왔다.

상현은 이번에는 후렴을 부르는 대신 마이크를 객석에게 넘겨버렸다.

Country Code, Eighty Two!

한국대표의 Attitude!

그렇게 888 크루의 무대는 이어지고 있었다.

***

888 크루는 JFTR의 곡 중 5곡을 프로모션 푸시하기로 결정했다.

3번 트랙 ‘히치하이킹’, 7번 트랙 ‘강변 살자’, 9번 트랙 ‘Seoul City Mind’, 10번 트랙 ‘Just For The Record’, 11번 트랙 ‘국가대표’가 그 목록이었다.

이 중 오늘 무대에서 선보이는 곡은 국가대표와 히치하이킹, 저스트 포 더 레코드였다.

국가대표로 시작된 888 크루의 공연은 상현과 준형의 듀오곡인 히치하이킹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JFTR을 만드는 순간을 묘사하는 Just For The Record로 이어졌다.

< Verse 30. 보름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