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30. 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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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CBC 방송국의 파퓰러 뮤직은 ‘서머 스페셜(Summer Special)’이라는 여름 맞이 특별 기획으로 꾸며질 예정이었다.
888 크루는 이러한 특별 기획 중에서도 골든타임에 위치하는 ‘핫 데뷔(Hot Debut)’ 포맷을 책임지게 되었다.
사실 오늘 방송을 준비하던 CBC 방송국 내부의 피디들 사이에서는 888 크루의 음악방송 출연을 컴백으로 봐야할지, 데뷔로 봐야 할지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았었다.
컴백으로 보자니 888 크루는 힙합 더 바이브를 제외하면 음악방송에 출연한 적이 없다. 이상현은 음악방송에 몇 번 출연했지만 ‘888 크루’라는 팀명으로 꾸며진 무대가 없었던 것은 변함이 없었다.
또한 믹스테잎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생각해보면 888 크루의 ‘공식적인’ 작업물은 JFTR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관점에서 888 크루는 신인이 맞았다.
하지만 신인이란 틀을 씌워놓고 보자니,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떤 미친 신인이 발매 첫 주에 앨범 5만장을 팔아치우고, 데뷔 무대에서 1위 후보로 오른단 말인가.
어떤 미친 신인이 쇼케이스 한 번으로 각종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하고, KRS-ONE과 같은 전설적인 뮤지션과 콜라보레이션을 한단 말인가.
컴백으로 보자니 뭐를 기준으로 컴백하는지가 모호하고, 데뷔로 보자니 지나치게 거물이다.
CBC 방송국은 장고 끝에 888 크루를 데뷔로 결정지었다.
사실 이 같은 결정에는 ‘비아냥거림’의 의미도 있었다. 이 비아냥거림의 대상은 나머지 두 곳의 공중파 방송국이었다.
대한민국의 공중파 방송국인 MSC, KSC, CBC 중에서 CBC 방송국은 은근한 따돌림과 괄시를 받고 있는 방송국이었다.
왜냐면 CBC 방송국만 공영방송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공영방송.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 행하는 방송.
1948년부터 내려온 공영방송의 프라이드 때문인지 MSC나 KSC의 임원들 중에는 CBC 방송국의 피디들을 ‘광고팔이’라고 낮춰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이 시스템적이나 프로그램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으니, CBC 방송국 입장에서는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CBC 방송국은 888 크루에게 ‘핫 데뷔’를 맡겼다. MSC나 KSC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린 888 크루가 그야말로 핫한 데뷔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888 크루의 JFTR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만들어냈기에 CBC 방송국에서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지간한 수준의 성공이었다면 CBC 방송국도 여타 두 방송국에 날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통쾌한 일이었다.
아마 MSC나 KSC에서는 끝까지 888 크루를 섭외하지 않을 것이었다. 자존심이 있으니까.
그러나 CBC 방송국의 음악방송에서 888 크루가 1위를 차지한다면? 그것도 경쟁자가 없는 독보적인 1위를?
시청자들도 직감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CBC 방송국에서는 1위를 차지했는데 MSC나 KSC에서는 1위 후보는커녕 무대조차 내어주지 않는 게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888 크루와 비슷한 성적을 내는 팀조차 없다.
이것이 CBC 방송국이 888 크루를 음악방송 출연을 허가한데는 이러한 의도들이 깔려있었다.
물론 888 크루가 CBC 라디오 방송국에 호의적이고, 이상현이 CBC 방송국에 호의적이라는 부분도 한 몫을 했지만.
본래 슈퍼스타는 가만히 있어도 주변이 저절로 움직인다. 알아서 열광하고, 알아서 반응하며 주변의 시스템이 꿈틀거린다.
888 크루는 아직 슈퍼스타는 아닐지라도, 그들을 둘러싼 시스템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단지 앨범을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말이다.
888 크루 멤버들은 그들을 둘러싼 시스템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는 알지 못한 채,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며 한참 서성거리던 준형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무대를 경험했지만 오늘만큼 떨리는…….”
“아, 또!”
준형이 평소처럼 ‘오늘만큼 떨리는 무대는 없고, 너무 긴장된다.’는 주접을 떨려고 하자 상미가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준형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애처롭게 물었다.
“상미야, 요즘 오빠한테 왜 그러니? 오빠가 양말 몇 번 뒤집어 벗은 걸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치약을 중간부터 짜서 써서 그래? 그것도 아니면 네가 끓인 국을 상현이가 한 줄 알고 맛없다고 해서?”
“……까먹고 있었는데.”
상미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하자 준형이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상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이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멘트인데? 누가 들으면 둘이 같이 사는 줄 알겠어.”
“아, 그런가? 근데 그게 왜 오해야. 같이 사는 거 맞잖아?”
“상미 혼삿길 막히니까, 그 조동아리에 지퍼를 채워주지 않으련?”
“으, 아저씨냐. 고등학생한테 혼삿길이 뭐야.”
상미가 이번에는 상현을 타박했다.
그때 저 멀리서 ‘와아아아’ 하는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또 한 팀의 무대가 끝난 모양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민지가 물었다.
“지금 누구 끝난 거지? 이제 곧 우리 차례 아니야?”
“글쎄요. 알아보고 올까요?”
“아냐. 기다리면 누군가 와서 알려주겠지, 뭐.”
사전녹화와 생방송이 섞여서 진행이 되는 파퓰러 뮤직인 만큼 관객들의 환호소리만으로는 모든 순서를 알아차리기는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때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조연출이 들어왔다.
“888 크루분들! 세 타임 뒤에 888 크루입니다. 이동할게요!”
“세 타임이면 얼마나 걸려요?”
“이십분 정도 걸릴 겁니다.”
“그럼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준형과 우민호가 빨리 다녀오라는 조연출의 성화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머지 멤버들은 가사를 점검하거나 물을 마시며 긴장을 풀었다.
상미가 준형을 타박하긴 했지만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은 무대를 몇 만 번 경험해도 변하지 않을 일이었다.
아니, 변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두근거림과 기분 좋은 긴장을 즐기기 때문에 그들이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잠시 뒤 888 크루는 조연출을 따라서 스테이지와 MC석 옆의 대기 위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엄청난 비명이 터졌다.
-꺄아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아!
TV로 음악방송을 보다보면 별로 유명한 가수도 아니고, 히트한 곡을 부르는 것도 아닌데 미칠 듯한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사실 그러한 일들은 카메라 앵글 밖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 888 크루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이 지르는 미친 듯한 비명소리는, TV를 통해보면 스테이지 위의 가수들에게 쏟아지는 것처럼 들릴 테니까.
“와…… 엄청나네요.”
“그러게. 저 사람들이 888 크루지?”
“네. 기획사에서 만든 팀도 아닌데 다들 잘생기시고 예쁘시네요.”
마일드라는 예쁘장한 여자 아이돌과, 20대 중반의 인기 배우인 추일훈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마일드와 추일훈은 벌써 1년이 넘게 파퓰러 뮤직의 MC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도 이토록 열광적인 함성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대에 오른 것도 아니고, 단지 대기 라인에 등장했을 뿐인데 말이다.
“저 친구가 인디 키드와 오늘이 지나면을 불렀던 친구 맞지? 파이브식스였나?”
“네, 맞아요. 근데 파이브식스보다는 본명인 이상현으로 더 많이 불려요.”
“888 크루가 그렇게 대단한 팀인가?”
추일훈은 영화, 드라마, 예능 등등에 바쁘게 출연하다보니, 프로그램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최신 트렌드에 둔감한 경향이 있었다.
파퓰러 뮤직 MC를 보고 있지 않다면 그가 알고 있는 최신곡은 아마 2002 월드컵의 ‘오 필승 코리아’였을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음악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한 열흘 전쯤부터 그의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자주 들리는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팔팔팔이었다.
영화 촬영장을 가도, 드라마 세트장을 가도, 다른 예능 프로그램을 가도 888이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고 들렸다.
사실 추일훈 같은 배우들이나 트렌드에 둔감하지, 트렌드로 먹고 사는 쇼 비즈니스 종사자들은 이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888 크루는 열흘 전부터 이슈 중에서도 탑 이슈였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감 자체가 888 크루 때문에 뒤흔들리고 있었다.
듣자하니 지금 찍고 있는 영화의 음악 팀에서는 OST에 랩을 넣을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888 크루를 섭외해서 말이다.
“오빠는 잘 모르겠지만, 진짜 멋있는 사람들이에요. 특히 아이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대단해요. 아이돌들의 아이돌이라고 하면 되려나?”
마일드가 대답하는 순간 인이어를 통해서 멘트를 준비하라는 피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일드와 추일훈은 잡담을 멈추고 미리 숙지해두었던 대본을 다시 한 번 훑었다.
잠시 뒤 무대가 끝이 났다.
“네! 정말 여름 냄새 물씬 나는 무대였죠?”
“어서 빨리 휴가를 떠나고 싶은 무대였습니다. 자, 마일드 양. 다음 곡은 어떤 곡인가요?”
“난 몰라~ 난 몰라~”
MC들의 음악방송 특유의 유치한 곡 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곡 소개가 두 번 더 나온 다음에는, 드디어 888 크루의 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
888 크루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서는 순간, 파퓰러 뮤직의 세트장이 뒤흔들리는 비명소리가 터졌다. 무대 아래에서 대기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리였다.
재밌는 것은, 성인 남성들의 고함소리도 꽤나 크게 들렸다는 것이었다. 10대 남녀 학생들이 70% 이상을 이루는 방청객들 사이에서 꽤나 이질적인 고함소리였다.
-우와아아아악!
-우오오오오!
888 크루 멤버들은 환호성 아닌 기괴한 고함 소리에 웃어버렸다.
그들은 힙합엘이를 눈팅하면서 파퓰러 뮤직 세트장에 꽤 많은 힙합 팬들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888 크루의 음악을 듣기 위해 평생 겪을 리 없을 것 같던 일들을 경험하는 팬들.
이러한 생소한 경험은 평생 동안 기억될 것이고, 그 경험을 떠올릴 때면 888 크루의 음악 역시 기억 한 편에 보관될 것이니까.
상현은 문득 가슴 한 편에 치솟는 고마움이 느껴졌다. 마이크를 잡고 리스펙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샤라웃 힙합엘이! 샤라웃 한국 힙합!”
상현의 난데없는 외침에 888 크루 멤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샤라웃 한국 힙합 팬들!”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888 크루의 외침에 방청석은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
힙합 팬이나 888 크루의 팬들이 아니라면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용함은 짧았고, 환호소리는 길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샤라우우웃!!
-팔팔팔 크루!
엄청난 환호성이 무대를 덮었다.
상현을 비롯한 888 크루 멤버들과 제법 친분이 있는 나한수 피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어휴, 왜 가만히 있나 했다.”
“피디님, 이거 어쩌죠?”
“몰라, 나도. 사운드 밸런싱은 진작 끝났는데 이제 와서 뭘 어째? 시간도 없잖아.”
나한수 피디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냥 손을 놔버렸다. 어쩌면 이런 면이 사람들이 888 크루에 그토록 열광하게 만드는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888 크루의 소개가 끝나고 ‘핫 데뷔’ 무대가 나오기 전에 ‘Coming up next(커밍 업 넥스트)’ 영상이 나가는 시점이었다.
원래 다음 차례로 이어질 무대들을 소개하는 커밍 업 넥스트 때는 관객들이 내는 현장 소리를 살려놓은 채로 영상을 내보낸다. 가수들의 마이크 사운드는 빠지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내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기대감이 가득한 함성은 현장감을 높이고 생방송이라는 티를 낼 수 있는 훌륭한 장치이기 때문이었다. 소리가 너무 튀지 않게 약간의 컴프레서는 걸어줘야 했지만.
보통 커밍 업 넥스트 때 가수들은 바쁘다.
무대 위에서 포지션을 잡고, 동선을 체크하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888 크루는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신이 나서 그런지 관중들의 함성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빽빽이 터지는 피크들이 커밍 업 넥스트 오디오를 먹어버렸다. 한 마디로 관객들의 고함 소리가 영상 오디오와 물렸다는 말이었다.
지금 TV로 파퓰러 뮤직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고함소리만 듣고 있을 게 분명했다.
< Verse 30. 보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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