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91화 (191/309)

<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

이 같이 건조한 랩 바이브를 지닌 래퍼를 힙합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꼽자면 에미넴, 켄드릭 라마, 루페 피에스코 등등을 생각할 수가 있었다. 한국으로 넘어오자면 팔로알토, 버벌진트, 매드클라운 등등을 생각해볼 수 있었고.

물론 예술이기 때문에 100%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곡의 분위기에 맞춰서 미묘한 차이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이들이 일류 뮤지션들이었으니까. 상현 역시 데이드림 같은 곡을 부를 때면 건조함을 버리고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현의 랩은 그런 것들과는 달랐다.

내 삶에 걸린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은 다음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단 말은 전부 거짓말

때로 덧셈과 뺄셈은 정확하지 않아

1을 뺐는데 100을 얻었지. 좁은 내 방안

상현의 랩이 차분히 진행되자 관객들은 묘한 감상을 느끼며 깊이 빠져들었다.

라만차는 신나는 곡이 아님에도 관객을 몰입시키고, 고조시키는 느낌이 있었다. 마치 겟 댓 머니 월컴 투 스쿨처럼.

‘내 삶에 걸린 무언가를 포기하진 않지만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단 말은 전부 거짓말…….’

관객들이 상현의 가사를 곱씹었다.

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가사가 눈에 보였다가 귀로 들어오는 것 같은 놀라운 느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커리어 초창기부터 888 크루를 지켜봐온 이들은 지금 부르는 ‘라만차’라는 곡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이것은 제일 처음 888 크루의 모습이었다.

대학, 학업, 또 다른 진로 등등의 현실적인 조건들을 포기해가면서, 랩으로만 더 나은 삶을 추구하던 그들의 시작을 그린 랩이었다.

상현은 언젠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과거로의 회귀라는 믿지 못할 기적이 준 것은 음악에 대한 재능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지식도 아니라고. 바로 원하는 ‘길’을 걸을 수 있는 확신이라고.

본래 상현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겁이 너무 많아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스스로를 꽁꽁 싸맸고, 준형을 제외한 이들을 모두 밀어냈으며, 래퍼라는 꿈을 포기했고, 심지어 상미까지 보듬어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른들에게 보호받고 싶은 모순적인 소망 때문에 보험설계사 박윤희 같은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불확실과 충동을 축복으로 여기고, 확신을 가진 채 조금씩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상현은 랩을 하다가 회귀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래퍼로써 성공한다는 확신은 없었다. 음악적 흐름을 알고 있다는 치트키는 있었지만, 그 치트키를 진짜로 사용하려면 래퍼가 아닌 프로듀서가 됐어야했다. 아니, 성공을 위해 미래의 지식을 사용하려면 과거처럼 사업가가 되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깊게 몰입했고, 충동을 느꼈고, 속된 말로 미쳐버렸다. 마치 라만차에서 기사도에 미쳐서 길을 떠나는 돈키호테처럼.

남들을 미쳤다고 혀를 찰 수도 있지만, 가슴 깊이 차오르는 충동과 열정에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것처럼.

상현의 랩이 평소와 다른 바이브를 가지는 것은, 그가 가장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의 방식으로 랩을 뱉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자.’

그 곳에서 랩을 시작할 때의 그 다짐

두려웠냐고 물어보면 Nothing, 그다지

뮤지션의 태도를 배웠고, 가사를 쓰고 맘 안차

밤을 새며 8명이 찢었던 공책, 작업실, 라만차

오피셜 부틀렉, 힙합 더 바이브, 그 외 수많은 공연을 거치며 제련되고 완성된 방식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충동의 축복 세례를 받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시작했던 1년 전, 그의 순수하면서도 투박했던 목소리로.

준형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움직여야지’를 만들고, 쇼 비즈니스에 복수하기 위해서 ‘퍽 더 쇼 비즈’를 만들고, 음악이 출발한 도시를 샤라웃하기 위해서 ‘광주 업’을 부를 때의 느낌으로.

‘아……!’

관객들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 공연장이 놀랍도록 고요해졌다.

단 16마디. 단 48초로 뮤지컬이나 오페라 같은 기승전결을 주는 뮤지션이 이상현 말고 또 있을까?

오직 랩의 기술적인 요소만 따지자면 상현과 888 크루의 멤버들, 한국 최정상의 래퍼들 간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현이 넘버원의 카테고리 안으로 분류되고, ‘더 특별한’ 래퍼로 분류되는 것은 이러한 감정의 엘리베이팅에 있었다.

듣는 이를 흥분시키고, 고조시키는 목소리.

관객들은 상현의 랩이 계속되길 바랐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어느새 16마디는 다가왔고, 상현의 랩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들은 곧 888 크루에 상현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상현의 랩이 끝나는 순간 하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비트 사이로 끼어든 것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부족해, 배 안 차

아무리 달려도 멀쩡해, 숨 안 차

텅 빈 무대가 여덟에, 가득 차

모두가 모였고 시작해, 라만차

멜로디를 강하게 체크하는 단단한 목소리.

미디움 R&B 템포와 랩 리듬의 사이를 담담히 오가는 멜로디.

이런 방식의 훅은 하연이 커리어 초창기에 선호하던 것이었다. 상현이 병원에서 들었던 'Remission' 후렴이 꼭 그랬다.

물론 하연과 상현이 초창기의 느낌을 냈다고 해서, 그들의 전달방식이 촌스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랩은 완숙의 경지에 올랐고, 특히 상현은 ‘완성’의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랩 뮤지션이었다. 못하는 것처럼 들리는 게 더욱 어려운 수준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부족해, 배 안 차

아무리 달려도 멀쩡해, 숨 안 차

텅 빈 무대가 여덟에, 가득 차

모두가 모였고 시작해, 라만차

두 번째 후렴이 이어질 때쯤 관객들은 멜로디를 어렴풋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기억나는 대로 흥얼거리다가 아주 작게 ‘-차’라는 라임을 따라 하기도 했다.

묘사력이 강하고,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를 만들어낸다는 하연의 장점이 적극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흥이 오른 것에 비해서 아주 조용한 상태를 유지했다. 흥얼거리고, 라임을 따라하는 것도 목소리가 아주 작아서 타인에게 잘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JFTR이 최초로 공개되는 곳이었다.

괜한 환호성과 박수로 음악을 놓치기보다는 깊이 집중하고, 잘 기억해두고 싶었다. 오직 이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닌가?

물론 JFTR의 발매일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단 며칠이라도 ‘독점’하고 싶은 음악이 888 크루의 음악이었다.

두 번의 후렴구가 끝나고, 브릿지가 시작되었다.

드럼을 비롯한 퍼커션 소리가 일순간에 쫙 빠지며 하프시코드의 예리하고 강한 느낌이 장음계를 가지며 깊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드럼이 빠지고 스케일(Scale)이 바뀌니 벌스와 후렴보다 훨씬 명랑한 느낌의 연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브릿지를 라만차의 주인공 상현, 하연, 김환이 마치 공놀이를 하듯이 단어를 주고받으며 채우기 시작했다.

세 명의 입가에는 가벼운 웃음이 걸려있었고, 아주 신나고 경쾌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상현은 박자를 타며 어깨를 들썩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하연의 호응에 맞춰 2-3 템포로 박수를 쳤다. 짝짝 하는 소리가 박자에 맞춰 MICE 센터를 가득 채웠다.

라만차, 라만차,

라만차, 라만차, 라만차

잠 안 자, 잠 안 자,

꿈을 이루려고 잠 안 자

888 크루는 굉장히 유쾌한 팀이었지만, 음악에서는 인혁을 제외하면 장난스럽거나 익살스러운 모습을 찾기가 힘들었다.

어슬렁이나 탈의실 같은 곡들을 제외하면 말이었다.

그러나 라만차는 장난스럽게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브릿지에서 그러한 느낌이 나고 있었다. 본래 브릿지가 훅이나 벌스의 주제부에서 약간 빗나간 실험적인 부분을 다루는 곳이긴 했지만.

“아아……!”

그때 800명 중 절반정도의 관객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탄성을 내뱉은 관객들은 자신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나머지 절반의 관객들은 왜 갑자기 주변에서 탄성이 나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상현의 굉장한 벌스가 나올 때도 참아냈던 탄성이 왜 통통 튀는 브릿지에서 나오는 걸까? 게다가 탄성은 놀라서 지르는 것이라기보다는 뭔가를 깨달아서 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뭔가에 놀라서 탄성을 지른 관객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888 크루의 음악을 초창기 때부터 지켜봤다는 것이었다. 물론 힙합 더 바이브를 통해 888 크루를 알게 된 이후에, 초창기 음악을 탐색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라만차에 숨겨진 또 하나의 의도를 깨달았다.

‘팬이라는 포지션에 여러분을 국한시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 친구 아이가?’

상현이 랩을 시작하기 전에 장난스럽게 뱉었던 말이었다.

상현의 말처럼, ‘JFTR의 1번 트랙 라만차’는 정말 친구에게 불려고 만든 곡이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는 ‘우리가 처음 랩을 시작할 때는 이랬어.’라고 말해주는 곡이었으며, 오래된 친구들에게는 ‘그때 기억나지?’라고 물어보는 곡이었다.

그러니 888 크루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무대 위의 888 크루 멤버들은 관객들 중 다수가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생각처럼 라만차는 처음에는 888 크루원들끼리 ‘자신이 음악을 시작하던 때’를 솔직히 털어놓는 느낌으로 기획된 곡이었다. 원래 제목은 도돌이표였고.

다만 만들다보니까 단순히 888 크루를 넘어서 밴드 L&S, 스타즈 레코드, 칼립, 신혜연같은 모든 친구들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었다.

브릿지가 끝나는 순간 하연의 랩이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이번에는 하연이 들려줄 이야기를 기다하며 그녀의 랩에 깊이 빠져들었다.

***

“자자, 자리에 앉아주세요!”

약간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늘 쇼케이스의 사회자 신혜연이 888 크루 멤버들을 자리로 인도했다.

사실 혜연도 JFTR의 곡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888 크루 멤버들이 완성형의 앨범으로 들으라고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쇼케이스를 진행하러 왔지만 그보다는 음악에 더욱 관심이 갔다.

“다 앉으셨나요?”

가운데의 신혜연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하연, 상미, 민지의 여성멤버들이 순서대로 앉았고, 왼쪽에는 준형, 상현, 김환의 남성멤버들이 순서대로 앉았다.

민호는 그런 그들과 관객들의 사이에 위치한 디제이 부스에 앉았다. 디제이 부스라고는 해도 혼자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들과 더 가까운 사선 방향이었다.

“아, 노래 너무 좋은데요? 본분을 잊어버리고 소리만 질렀네요. 제목이 라만차? 맞죠. 이게 1번 트랙인가요?”

“네. JFTR의 오프닝을 알리는 1번 트랙이고요. 그 의미는 돈키호테의 고향입니다.”

“곡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상현이 라만차의 의미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다. 하지만 악기 사용에 담긴 의미나 가사 내용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리스너 스스로가 알아차려야 의미가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곡에 대한 소개를 끝낸 상현이 문득 신혜연이 존댓말을 쓰니까 소름이 돋는다고 투덜거렸다.

“어차피 단순한 의미의 쇼케이스는 아닌데, 그냥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어우, 나도 좀 민망하더라.”

혜연이 한 점 거리낌 없이 말을 놓았다. 신혜연을 공공의 적으로 취급하는 여성팬들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남성팬들이 환호했다.

“사실 원래는 간단한 토크가 있었는데, 이 친구들이 갑자기 음악을 시작해서 좀 당황했네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잡다한 근황이나 이미 철지난 888 Show에 대한 것 말고, 바로 JFTR에 대해서 물어보는 게 좋겠죠? 자, 준형아. JFTR은 어떤 앨범이야?”

사회자 신혜연의 질문에 잠시 말을 정리하던 준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JFTR은 제목 그대로 공식적인 기록이에요. 그동안 발표한 부틀렉 0.5나 오피셜 부틀렉 같은 경우는 저희의 충돌하는 영감에서 튄 불씨로 불을 붙인 노래들이었거든요? 원초적이고 순수한 노래들이지만 전체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담진 못했죠. 근데 JFTR은 좀 달라요. 기획과 구성 단계에서부터 저희의 메시지와 의도가 들어간 아주 공식적인 기록입니다.”

“정확히 어떤 메시지와 어떤 의도야?”

“시간의 흐름이요. 888 크루가 음악을 시작했던 순간부터 1번 트랙이 시작해요. 짐작하셨듯이 라만차는 저희의 시작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곡이죠. 그리고는 트랙이 진행될수록 저희의 지난 시간을 추적해요. 퍽 더 쇼 비즈, 클럽 호미, 무등 경기장, 부틀렉 시리즈, 힙합 더 바이브…….”

준형의 말에 관객들은 각자 자신이 처음 888 크루를 접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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