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90화 (190/309)

<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

‘엄청난데? 무료라면서 이정도 스케일로 진행할 수가 있나?’

기획사 직원들이 JFTR의 쇼케이스장 내부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888 크루는 언제나처럼 기획사 사람들이나 기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 쇼케이스장에 들어온 연예기획사 직원들은 운이 따라서 입장권을 획득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쇼케이스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주변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로 그들을 감탄케 하는 것은 쇼케이스 장소였다.

거대한 강의실 같은 느낌을 주는 오늘의 쇼케이스 장소는 신촌의 유명 MICE 센터였다. MICE란 국제회의와 전시회를 주축으로 하는 유망 산업 일컫는 말이었다.

신촌 MICE 센터는 장소 자체로 작지 않은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장소 대관비가 비싸다는 것과 공사 계열의 회사라는 것에도 의미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한 번도 연예인들에게 대관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그러니까 MICE 센터에서 888 크루를 일반적인 연예인과 별개의 존재로 본 것이었다.

시와 랩 <두 번째 행간>을 통해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얽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각양각색의 모습을 지닌 팬들이었다.

연예인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팬이 어떤 것일까?

물론 대답은 천차만별일 것이었다. 누군가는 열광적인 팬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고, 기획사의 입장에서는 구매의사가 강한 팬이라고 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은 ‘함께 세월을 흘려보낼 수 있는 팬’을 가장 이상적인 팬의 모습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연예인의 화려한 이미지를 소비하다가 그 이미지가 끝나면 떠나는 팬이 아니라, 이미지 속의 사람을 좋아하는 팬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888 크루의 팬은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성 팬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었다.

20대 중반 이상의 남성들도 꽤나 보였고, 30대 초중반의 남성들도 보였다.

심지어 런디엠씨가 빌보드에 올랐을 때 고등학생이었을 40대의 팬들도 보였으니, 데뷔 1년차의 가수가 보유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굉장히 넓은 스탠스의 팬층이었다.

너무나 이상적인 팬의 모습이기에 기획사 직원들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같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오늘 JFTR에 참여한 팬 들은 888 크루라는 연예인의 이미지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여줄 제대로 된 음악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Eight, Eight, Eight in da house!

팬들의 부름을 받고 등장한 888 크루를 향해 쏟아지는 굉장한 함성에는 그러한 기대감이 숨겨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888 크루입니다.”

7명의 888 크루 멤버들이 무대 위에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약 800명의 팬들은 그들의 인사에 반갑게 화답했다.

연이은 환호성으로.

-팔팔팔 크루! 팔팔팔 크루!

-우와아아아!

신촌 MICE 센터는 이탈리아의 성당처럼 반원형의 천장을 이용해 객석의 소리를 무대 위로 집중, 증폭시키는 구조를 지닌 구조물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무대 위의 888 크루 멤버들이 관객들의 함성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관객들이 포진된 전방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위, 옆, 뒤에서 소리가 쏟아지는 감각.

그리고 그것은 단숨에 그들을 흥분시켰다.

이러한 흥분은 당연하게도 준형의 할리우드 감각(?)을 일깨웠다.

“원래는 지금부터 10분간 JFTR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그에 대한 질의응답을 받고, 사회자님과 농담을 나눌 예정이었습니다. 트랙리스트도 소개해야하고요.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여러분의 응원과 함성, 열정이 제 온 몸을 치고 지나가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관객들이 웃음기 가득한 와아아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준형의 멘트 때문에 지르는 게 아니었다.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준형 등 뒤에서 입을 뻥긋거리는 상현의 익살스러운 태도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준형은 계속 장황하게 그의 몸속에 흐르는 할리우드 정신을 멘트로 쏟아냈다. 멘트가 끊긴 것은 상현이 손가락을 펼쳐 1, 2, 3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크! 할리우드!

-크! 할리우드!

모든 관객들이 이심전심으로 소리를 질렀다.

준형은 그제야 뒤를 돌아봐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상현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야 이 미……!”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입까지 나왔지만 쇼케이스장에서 뱉기는 난감한 단어였다. 그러나 상현은 아니었다.

“뭐, 미친놈아.”

“어?!”

준형이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상하게도 팬들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상현이 그런 준형을 한심하게 보더니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저희는 누누이 말해왔듯이 연예인이 아니라 래퍼입니다. 준형이는 랩 선수라고 말하죠. 저희는 여기 모인 분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저희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선수들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저희가 대중에게 조금 더 드러나는 음악을 할 뿐이죠.”

오늘 행사에 대한 글을 올릴 때는 의미전달을 위해서 ‘쇼케이스’라는 단어를 썼지만, 정확히 말하면 오늘의 자리는 쇼케이스가 아니었다.

비슷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파티.

또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만든 음악을 들려주며 ‘야, 이거 어떠냐? 죽이지?’라고 괜히 한 번 물어보는 자리.

“그러니까 인위적인 이미지의 가면을 쓰고 싶지도 않고, 팬이라는 포지션에 여러분을 국한시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 친구 아이가?”

상현의 장난스러운 마무리에 하얀 와이셔츠를 곱게 입으신 형님 한 분이 크게 외쳤다. 문지연이 그쪽(?)의 향기를 느꼈던 분들 중 한 명이었다.

“어데 건방지게 친구가? 니 몇 살이고?”

장난스럽고 과장된 말투에 관객들이 피식 피식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랩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오늘 공연이 단순한 쇼케이스가 아닌, 친구에게 들려주는 음악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경쾌한 비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민호가 적절한 순간이라는 판단 하에 재빨리 디제이 부스로 이동해 비트를 재생시킨 것이었다.

우민호구라는 별명답게 매사에 순진하고 수동적인 민호였지만, 디제이 부스에 들어갈 때만큼은 달랐다. 디제이의 역할을 수행할 때면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스테이지 메이커가 되는 게 888 크루 활동을 통해 생긴 민호의 변화였다.

DJ. 디스크 자키(Disk Jockey).

디스크 자키라는 단어 중 자키(jockey)는 ‘몰이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민호는 888 크루 음악의 방향성을 디자인하는 몰이꾼이었다.

비트를 듣자마자 상현과 환, 하연이 마이크 머리를 잡은 채 전면으로 나섰다. 몰이꾼의 명을 받아 포문을 여는 노래 ‘라만차(La Mancha)’의 주인이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라만차의 비트는 스페인 건반음악 특유의 우아한 하프시코드 멜로디에 먹통 하드코어 드럼 사운드가 조화를 이루는 비트였다.

‘어?’

기획사의 사람들 중 사운드 전문가들이 하프시코드를 알아차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888 크루는 오케스트라 악기를 선호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다. 그것은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장엄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장엄함이 강렬하면서도 더티한 힙합 드럼과 어울리면 색다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최근 한국의 힙합 뮤지션들이 오케스트라 샘플링을 선호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888 크루 때문에.

하지만 하프시코드(harpsichord)는 약간 다르다.

하프시코드는 16-18세기에 번성한 악기였다. 현대 음악으로 접어들면서 상위호환의 역할을 하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태어났고, 곧 피아노가 하프시코드의 자리를 대체한 것이었다.

물론 발음기구가 달라 완전한 상위호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프시코드는 크레센도나 디미누엔도 등의 섬세한 셈여림을 표현할 수 없는 악기였다.

예리하고 강한 맛이 있는 하프시코드가 19세기에 거의 쓰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현대에 들어 바로크 음악풍이 다시 유행하고, 음악가들이 정격연주에 관심을 가지면서 부활하긴 했지만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아함은 곧 감탄으로 바뀌어야 했다.

예고 없이 시작된 공연 탓에 스테이지 위의 스크린에 한발 늦게 곡명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라 만차(La Mancha).

"라만차라……. 하, 이거 참. 미쳐버리겠네."

누군가 마음속의 생각을 입으로 뱉어버렸다.

그만큼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오늘 888 크루의 앨범이 대중음악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 같다는 예측을 가지고 쇼케이스로 향했다.

그러나 888 크루는 대중음악의 흐름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힙합.

‘힙합 내’에서의 진화뿐이었다.

Just For The Record의 1번 트랙 라만차.

라만차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스페인 실존 마을의 이름이었다.

이것은 돈키호테가 고결한 기사도 이야기(하프시코드 악기)에 너무 탐닉하여 스스로 정신이 이상해진(먹통 하드코어 드럼) 것을 은유하고 있는 악기 사용이었다.

쉽게 말하면 현실이 어떻든 888 크루는 힙합에 미쳐있다는 의미였다.

888 크루는 부틀렉 시리즈와 힙합 더 바이브를 통해서 가사의 전위성 측면에서 한 걸음을 내딛었다고 평가 받는 뮤지션들이었다.

현학적 한문체 단어로 라임을 맞추는 기존 한국 힙합의 발전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 구어체의 능동적인 활용, 중의적 의미의 펀치라인, 도치를 이용한 메시지 강조, ‘돈’이란 주제를 다루며 보여줬던 의식의 드리블링까지.

그야말로 가사로써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888 크루는 그 모든 것이 기본적인 것이었고, 비공식적인 음악이었다고 말하며 JFTR을 선보였다.

그리고 JFTR로 랩이라는 음악을 예술 해석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랩의 기본이 되는 샘플링 소스조차 뮤지션의 창작 의도가 들어가서 해석이 가능한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거 설마 하프시코드란 악기에 약해지거나 강해지지 않는 불변의 사회적 편견이라는 의미도 있는 건가?’

좀 깊이 들어간 이들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888 크루는 이러한 추측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이 다양하고 복잡한 메시지를 숨기는 것은 단지 뮤지션으로써 의도이며 만족일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지 않아도 음악은 즐거워야하고, 음악 그 자체로 완성이 되어야 한다. 해석이 수반되어야지 완성되는 음악은 제대로 된 음악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해석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범주에서 해석할 수 있는 재미를 줄 뿐이었다.

시와 랩 두 번째 행간을 통해 그들이 새로이 갖게 된 신념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단상과 생각을 뒤로 한 채, 상현의 랩이 시작되었다.

힙합만 위해 태어났단 말 따위는 안 해

난 여전히 바래, 행복한 동생, 예쁜 아내

그저 토해낼 뿐이지 많은 것들이 살아 내 안에

내 삶에, 관한 것들을 하나 씩 다 꺼내

프로듀싱에 조예가 깊은 몇몇 기획사 직원들과 달리, 관객들은 라만차의 사운드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 몇몇만이 피아노소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또 몇몇은 오르간 소리나 풍금 소리라고 착각하기도 했고.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악기 사운드가 아니었다. 상현의 랩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현의 랩이 가진 바이브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목소리에 Vibe Right

약간의 강박증을 느끼는 지금이 Highlight

광주를 떠나 이젠 Seoul City 돈키호테

내 가사는 독하고 어려웠지, 해독이 없대

래퍼의 랩 스타일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는 건 불가능했고, 그것은 상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현이 그동안 랩을 해오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그의 가사전달력이 굉장히 뛰어나서, 의도적으로 소리를 잘라먹지 않는 이상은 가사가 깨끗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상현은 발음상의 결락이나 손실을 유도해 플로우를 만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둘째는 소리를 잡아채는 스타일이라는 것이었다. 랩 중에 공기를 흘리는 경우가 없어서 얼핏 들으면 건조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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