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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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엔터테인먼트의 문지연 대리는 쇼케이스 입장을 시작하는 888 크루 팬들을 보면서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3년째 무대 제작 일을 하고 있었지만 쇼케이스를 주관한 적은 처음이었다.
보통 쇼케이스나 팬미팅은 팬 규모가 꽤 되는 메이저 연예인들이 진행하는 일이었다. 그런 연예인들 등 뒤에는 소속사의 무대 기술팀이 있었고 때문에 외주 팀까지 섭외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888 크루는 참으로 독보적인 존재였다.
소속사가 없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앨범 발매를 기념해 쇼케이스를 벌이는 경우는 처음이니까.
그것도 무료로. 800명이나.
‘이제 언더그라운드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긴 하지만.’
아무튼 888 Show 이후로 888 크루는 외주 업체가 필요한 일이면 항상 드림 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계약조건도 괜찮은 편이었고, 뮤지션들의 성품도 까다롭지 않았기에 드림 엔터테인먼트에게 888 크루가 최고의 VIP 고객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지연 대리가 쇼케이스 전반 진행을 책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때 그녀의 인이어를 통해 입장을 관리하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리님. 현수막은 어떻게 할까요?
-현수막이요? 사이즈가 얼마나 되는데요?
-좌우로 펼치면 2M가 넘습니다.
-현수막 지지대 재질은요?
-각목입니다.
-저희 쪽에서 외곽에 설치한 다음에 쇼케이스가 끝나면 돌려준다고 하세요. 팬 분들 기분 상하지 않게 잘 설명해드리고요.
-알겠습니다.
공연도 마찬가지지만, 쇼케이스나 팬 미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공연장의 사고가 인파가 몰려서 발생하는 안전사고라면, 쇼케이스나 팬미팅의 사고는 광적인 팬들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스타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사생팬이 된다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띄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비틀즈의 존 레논을 죽인 마크 채프먼도 살해동기를 ‘관심을 끌려고’라고 대답했으니까 말이다.
‘근데 아무리 사생팬이 있다고 해도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짓을 할 용기가 있을까?’
문지연 대리는 문득 입장을 끝내고 지정석을 찾아 헤매는 한 무리의 남성팬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왠지 부끄러워하는 듯한 태도로 소심하게 문지연 대리의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외양은 전혀 소심하지 않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각진 머리.
구릿빛 피부에 두꺼운 몸.
실수로 어깨가 부딪치는 순간 ‘뭐시여?’라고 윽박지를 것만 같은 느낌.
나름 말쑥하게 차려입은 정장의 와이셔츠에서 묘하게 그쪽(?)의 냄새가 풍겼다.
쇼케이스란 단어에 심히 어울리지 않는 분들인 것 같았지만, 888 크루의 음악 장르를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사실 아직까지도 힙합이라고 하면 건들거리고 껄렁껄렁한 양아치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물론 저분들이 정말로 그쪽(?) 분들인지, 아니면 그냥 외양만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쇼케이스에는 남자 팬들이 정말 많았다.
보통의 쇼케이스가 남녀 비율이 2:8, 심하면 1:9까지 벌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4:6정도로 보이는 888 크루 쇼케이스 팬 비율은 신기한 일이었다.
-입장 400명 돌파했습니다.
다시 한 번 문지연의 인이어를 통해 무전이 전해졌다.
쇼케이스 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
눅눅한 먼지 사이로 팬들의 웃음소리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그러나 위치가 위치인 만큼 명확하게 어떤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말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어우, 긴장돼. 팔백 명 다 온 거 맞지?”
“아, 몇 번을 물어봐. 맞다니까.”
“아니 막상 나갔는데 팔십 명 있을까봐.”
상현을 비롯한 7명의 888 크루 멤버들은 무대 뒤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호명할 쇼케이스 사회자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쇼케이스의 진행을 흔쾌히 수락해준 사람은 CBC의 라디오 프로그램 <20시 스테이션>의 진행자이자, 충무로에서 인정받는 여배우 ‘신혜연’이었다.
힙합 더 바이브에 방청을 왔다가 상현에게 ‘누나한테 장가와라’라는 말을 한 이후로, 그녀는 공공연하게 888 크루의 팬이라는 것을 밝혀왔다.
얼마 전 신혜연은 영화홍보를 위해서 모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었다. 그 프로그램에는 매니저가 자신의 고충을 토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신혜연의 매니저는 자꾸 그녀가 운전 중에 랩 배틀을 걸어서 곤란하다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었다.
이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신혜연은 888 크루의 여성팬, 특히 상현의 여성팬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888 크루와 아주 친한 관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신혜연은 광주 타이거즈의 야구선수 한광수를 제외하면 그들이 유일하게 친분을 유지하는 유명인이기도 했다.
“혜연이 누나한테 고맙긴 한데, 인혁이 형이 있었으면 인혁이 형이 사회를 봤을 텐데.”
“그러니까. 좀 아쉽다.”
사회자 섭외에 흔쾌히 응해준 신혜연이 고맙기도 했지만, 인혁의 빈자리가 못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근데 너무 긴장된다. 오늘이 그동안 겪은 수없는 대기 시간 중에 가장 긴장되는 것 같아.”
“준형 오빠는 맨날 그 소리하더라. 힙합 더 바이브 때도 그랬잖아.”
“그러니까 그때보다 지금이 더 긴장된다는 말이지 상미야. 그리고 오늘은 그냥 공연 날이야? 쇼케이스라고!”
준형의 말에 모든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쇼케이스(Showcase).
패션 신제품 론칭이나, 가수들의 새 음반 발표를 위해서 초연을 선보이는 이벤트 행사.
오늘 888 크루는 JFTR의 14트랙 중 정확히 절반인 7곡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듣지 못했던 JFTR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날이라는 말이었다.
그때 뭔가를 생각하던 민지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작년 이맘때쯤 처음으로 만났었지? 날짜도 거의 비슷한 거 같은데?”
“어, 그러네. 처음 만났을 때가 6월 초였나? 중순이었나?”
“초일 걸요? 6월 3일인가 그랬는데. 아무튼 그때 저희 아무 것도 몰랐었는데…… 진짜 신기하네요.”
준형의 말에 김환이 웃으며 덧붙였다.
“잘 알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잖아?”
“아! 그 잘난 척 하던 사람들? 그러네.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뭐하고 있을까?”
상현은 두 번째 모임부터 참여해서 보지 못했지만, 첫 모임 때는 커뮤니티를 통해 모인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고 했다. 다만 너무 거만하고, 잘난 척이 심해서 준형이 빼버렸었다.
“민지 누나 그거 알아요? 그 4명 전부다 저한테 다시 연락 온 거? 그래도 초창기 멤버였는데 다시 888 크루에 들어갈 수 없겠냐고.”
“웃긴다. 무슨 초창기 멤버야. 언제 연락 왔는데?”
“다 달라요. 제일 빨리 온 사람이 퍽 더 쇼 비즈 때였고, 그 다음이 광주 타이거즈 공연할 때인 거 같은데? 힙합 더 바이브 예고편 나온 날에는 4명한테 다시 다 문자왔고. 땅을 치고 후회하는 거 같아서 좀 미안하긴 했는데, 받아줄 수가 없더라고요.”
“처음에 그 사람들 받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글쎄요. 쇼 비즈니스 인터뷰 때문에 전국적으로 욕먹고 있을 때 다 나가지 않았을까요?”
“아, 그렇겠구나.”
민지와 준형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현은 마음속으로 888 크루 멤버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덕분에 상미가 부모님의 납골당에서 웃을 수 있었다.
“근데 갑자기 생각난 건데. 상현이는 첫 모임이 아니라 두 번째 모임부터 나왔잖아요. 그럼 상현이가 저희 후배 아니에요? 저희가 888 크루 1기, 상현이가 2기.”
준형의 말에 상현이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888 크루 멤버는 소중한데 이 웬수 놈은 좀 제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따지면 민호 형은 3기고, 상미는 4기냐?”
“오, 그렇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우리 막내 상미, 하늘같은 선배님한테 선배님- 한 번 해야지?”
준형의 주접에 상미와 상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오늘이 888 크루 1주년이었단 사실은 몰랐던 것이라서 감회가 새로웠다.
‘어느새 1년이 됐네. 아니, 이제 고작 1년인 건가?’
1년 전, 888 크루를 모집할 때만해도 그들이 앨범을 발매하면서 쇼케이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누군가 그게 고작 1년 후이며 1집 앨범을 발매할 때라고 말해줬다면 더욱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현은 만족하지 못했다. 만족은커녕 제대로 시작도 안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욕심 없고 착한 888 크루 사람들이었지만, 음악적 성취에 대한 탐욕은 엄청났으니까.
그리고 오늘이 그 첫 발자국이 될 것이었다.
정규 1집 앨범.
Just For The Record.
공식적인 기록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JFTR은 굉장히 오만하고 광오한 앨범 제목이었다.
그 이름에는 부틀렉 0.5와 오피셜 부틀렉, 힙합 더 바이브, 심지어 888 Show까지 ‘비공식적인 행보’였다는 의미가 숨어져 있었다. 그들이 광주 인디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인기를 구가하게 된 수많은 음악들이 고작 ‘비공식적인 행보’에서 비롯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888 크루를 좋아하는 수많은 팬들이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만큼의 비난을 받겠지만, 888 크루는,
“자신 있죠?”
“당연하지.”
“말이라고 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만든 건데.”
저 멀리서 ‘Eight, Eight, Eight in da house!'라는 팬들의 힘찬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참 신혜연이 8mile이나 Hustle & Flow같은 힙합 영화에 빠졌다고 하더니, 거기서 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We-!"
준형의 선창에 모든 크루 멤버들이 힘차게 소리를 질렀다.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자신감 가득한 888 크루의 ‘발걸음’이 어두운 무대 뒤에서 ‘무대 위’로 향했다.
2006년 6월 10일.
한국 힙합씬 뿐만 아니라, 한국 뮤직 인더스트리 자체에 큰 변화를 몰고 올 JFTR의 힘찬 발걸음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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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전조 없이 난데없이 펑 터진 888 크루의 앨범 발매 소식에 가장 촉각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누굴까?
너무 당연한 소리인 888 크루의 골수팬들과 힙합 매니아들을 제외하자면 정답은 한 분류의 사람들 밖에 없었다.
바로 연예기획사의 사람들이었다.
대중들 중 일부는 연예기획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시장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사업의 관성이 굉장히 약하며, 시장이 시시각각 바뀌는 심각한 레드오션의 세계였다. 만약 연예기획사가 그렇게 쉬운 사업이었다면 삼성, 두산 등의 대한민국 대기업들이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었다.
쇼 비즈니스, 그 중 뮤직 인더스트리는 승자독식과 승자의 저주, 하이리스크 랜덤리턴이 만연한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도 아니었고, 영리한 사람도 아니었다.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감이 좋다는 말은 대중들의 니즈를 잘 읽어내는 사람이었고,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이란 의미였다. 그리고 그들은 트렌드에 민감하면 민감할수록 888 크루의 음악에 굉장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 비약하자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 한국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이후 가장 큰 변화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래 이 같은 평가는 후크송의 인기와 아이돌 전쟁의 서막을 알린 2007년의 텔미가 받아야할 평가였다.
그러나 2006년 6월, 888 크루는 그러한 평가를 가로채고 있었다.
<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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