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888 크루의 여성 팬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불만이 하나 있었다. 사실 이 불만이 완전히 해결되면 전처럼 888 크루에게 광적으로 열광하지 않을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얽혀있는 일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현 상황에서 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888 크루가 연예인으로써의 자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Q : 888 크루가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넘어서 연예인이라는 포지션에 놓이게 된 시기가 언제쯤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역시 힙합 더 바이브인가요?
신준형 : (눈을 동그랗게 뜨며)연예인이요? 저희는 연예인이 아니에요. 아니, 저희가 왜 연예인이죠?
Q : 그야 음악을 통해서 대중들을 즐겁게 하고, 대중들의 관심과 금전적 이득을 얻으니까 연예인이라고 볼 수 있죠. 좀 더 일차원적으로 답변하자면 TV나 라디오에 나오니까요.
신준형 : 음…… 이렇게 설명할게요. 저희는 축구선수 같은 사람들이에요. 축구 선수는 축구가 직업이죠. 그들은 TV에도 나오고, 대중의 관심을 받고, 대중을 즐겁게 해드리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축구선수가 연예인이라고 말하진 않아요. 은퇴하고야 연예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라운드에 서는 순간은 축구선수죠.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그냥 랩 선수들이에요. 연예인은 아니죠.
Q : 하지만 축구란 대중이 배제되고도 진행될 수 있는 스포츠지만, 음악이란 엔터테인먼트는 다르지 않나요? 대중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는 분야잖아요.
신준형 : 축구 역시 대중이 배제되면 사장되겠죠. 아무도 보지 않는 스포츠에 어떤 구단이 투자를 하겠어요?
888 크루가 홍대 피플이라는 인디 문화 잡지사와 인터뷰를 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인터뷰를 접한 팬들은 저도 모르게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지?’라고 생각해버렸다.
원래 개똥철학은 논리로 이기기 힘든 법이다.
준형의 말은 일견 들으면 ‘어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깊이 파고들면 맹점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일단 준형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진심으로 888 크루가 자신들을 연예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였다.
-888 크루 멤버들은 진짜 너무 함.
-맞아. 솔직히 이거 너무 했어.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이건 팬들을 우롱하는 처사야…….
-이런 꼴까지 봐가면서 팬질을 해야 하나?
-그래도 그나마 정상인이 몇 명 보이니까……. 힘내자, 우리.
-근데 그 정상의 범주가 연예인이 아니잖아…….
‘888 크루의 사복 패션 - 워스트 오브 워스트’
이 같은 제목을 가진 인터넷 기사가 뜰 때마다 달리는 여성 팬들의 댓글이었다. 사복 패션 기사의 단골손님으로는 상현, 준형, 민호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패션 감각이면 바지는 미국 힙합퍼들의 루즈핏을 따라 입어놓고서, 후드티는 딱 달라붙어 가슴 굴곡이 보일 지경인 사이즈를 입을 수가 있을까?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한 패션 감각이었다.
그래도 상현은 준형이나 민호랑은 조금 다른 경우였다. 준형이나 민호가 나름대로 멋을 부리는데도 패션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었다면, 상현은 꾸미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상현은 회사 사장으로써 10년 동안 정장만 입고 산 사람이었다. 주식 금융업이라는 특성상 주말도 없었다. 쉬는 날에는 투자자들을 만나야 했다.
상현이 정장을 입지 않을 때는 골프 칠 때, 운동 할 때, 잘 때. 오직 세 가지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지금에 자유로움을 느끼고 옷차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 관계와는 별개로 외부인들의 시선에는 상현이나 준형이나 민호나 똑같은 패션 고자들이었다.
그나마 꾸밀 줄 알던 인혁은 광주에 남았고, 상미는 공연이나 방송 때를 제외하면 오빠들의 옷차림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김환은 딱 자기만 꾸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실 김환도 그렇게 멋을 잘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888 크루에 있으니까 패션 감각 상위권이 됐을 뿐이지.
마지막으로 하연이나 민지는 안구에 패션 테러를 너무 많이 당해서 이제 이상한지도 못 느낄 만큼 적응한 상태였다.
멤버들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유독 그들에게 비싼 옷 선물이 쏟아지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러나 남자 팬들은 오히려 이런 888 크루의 패션을 조롱하면서도 좋아했다.
-평소에 거지마냥 입다가 공연, 방송 때 잘 입으니까 더 멋있잖아. 이 친구들 똑똑한 친구들이야. 니들 예상을 뛰어넘는다고 부라더.
-그니까ㅋㅋ 내 생각에도 의도한 거라고 본다ㅋㅋㅋ
-근데 방송이야 코디들이 도와주겠지만, 공연 때는 그냥 트리플 에잇 굿즈 입는 거 아니야? 888 Show때 보니까 딱히 잘 입고 못 입고를 모르겠던데.
-잘 입고 못 입고를 모르겠다면 888 크루 베스트 드레스 코드임.
물론 옷을 못 입는다는 게 팬들의 주된 불만은 아니었다. 이건 그냥 888 크루가 연예인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지표 중 하나일 뿐이었다.
888 크루의 골수팬, 특히 여성팬들의 주된 불만은 888 크루에게 ‘팬’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대형 기획사에는 ‘팬 관리’라는 직책만 수행하는 직원이 따로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규직이다. 무대 장치 기술팀이나, 공연 스태프들이 대부분 1년 단위 계약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팬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쏟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비단 팬들이 그들의 앨범과 상품을 팔아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팬은 인기와의 연결고리이다. 그 연결고리가 아무리 약하고 헐거워져도, 존재만 한다면 결국 다시 이어낼 수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인본주의적으로 말하면 연예인의 수명을 결정짓는 엄청난 존재들이다.
이런 팬클럽을 관리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해야 되는 일이 ‘공식 팬클럽’을 지정하는 일이었는데, 888 크루는 공식 팬클럽은 개뿔, 팬클럽에 한 번이나 들어와 봤는지도 모르겠다.
Q : 팬클럽은 자주 들어가시나요?
상현 : 어, 들어가는 가봤죠. 그것도 꽤 많이. 근데 글을 읽어본 적은 없어요. 막상 도메인 화면까지 들어가면 그 이상 클릭을 못하겠더라고요. 저희 사진이 떠있는 걸보면 막 부끄럽고…… 민망하고……. 아, 저번에 저희 이름으로 기부가 진행됐을 때는 몇몇 글을 읽어봤네요.
이곳저곳에 흩어진 888 크루 팬클럽 가입자 수를 합치면 2만 명이 조금 못된다. 팬클럽 회원을 몇 십만씩 보유한 최정상급 가수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888 크루의 팬 계층을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아마 힙합엘이 회원 5만 3천 명 중에 절반은 888 크루의 팬일 것이었다. 게다가 팬클럽 회원도 아니고, 힙합엘이 회원도 아니지만 888 크루의 앨범을 구매할 구매의사 보유 층도 꽤 됐다.
그러니까 팬클럽 회원들이 미치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그들은 그냥 수많은 팬들 중 한 명이다.
뭔가 하고 싶은데, 뭘 할 건 없고. 이상현을 뺀 888 크루는 공연 활동과 간간히 라디오에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보기도 힘들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팬클럽 회장들끼리 대통합의 장을 열고 돈을 모아서, 시와 랩 두 번째 행간에 888 크루의 이름으로 기부도 해봤지만 여전히 서운하다.
888 크루의 싸이월드 클럽에 장문의 감사 인사가 올라왔지만, 그들이 바란 건 그게 아니다. 팬들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각인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즈음, 눈이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각 팬클럽 회장들에게 전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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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888 크루의 리더인 신준형입니다.
2006년 6월 10일. 888 Crew의 정규 1집 앨범 발매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쇼케이스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쇼케이스가 주가 되지만, 저희와 만날 기회가 적은 것을 서운해 하시는 팬들이 많아서 팬 미팅의 성향도 어느 정도 가져보려고 합니다.
때문에 6월 1일부터 신청을 받아 총 800분의 고마우신 팬 분들을 초대하려고 합니다.
1. 힙합엘이 회원 분들 중 200분.
2. 888 크루 클럽을 통해 100분.
3. 믹스테잎 을 구매해주신 분들 중 100분 - 무작위 추첨
4. 도매스틱 브랜드 의 상품을 한 번이라도 구매해주신 분들 중 100분(누적 구매 금액과 관련 없습니다) - 무작위 추첨
5. 가장 회원수가 많은 팬클럽 세 곳에서 각 100분씩 총 300분.
모든 비용은 무료로 진행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부담 없이 신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복 선정과 사이트 별로 인원수에 미달이 발생하면 1차로 888 크루 클럽에서 충원을 하고, 2차로 힙합엘이에서 충원할 예정입니다.
정확한 장소와 일시는 하단에 약도를 첨부해놓았습니다.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6월 10일에 뵙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세 분의 팬클럽 회장님들께만 추가된 부분입니다.
각 회장님들은 팬클럽에서 신청을 받아서 쇼케이스에 참석하실 100분의 회원분들을 공정하게 선출해주시면 됩니다.
선출방식은 임의이고 재량에 맡길 생각입니다만 최대한 공정성을 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그럴 리는 없지만, 금전 혹은 금전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고 쇼케이스 참여권을 거래하신다면 강력한 법적조치를 취할 것임을 미리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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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클럽에서는 난리가 났다.
드디어 공식 팬클럽 후보가 3곳으로 줄어든 것이며, 그동안 팬 문화에 소극적이던 888 크루의 첫 번째 움직임이었기 때문이었다.
888 크루의 팬클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힙합엘이, 888 크루의 클럽, 트리플 에잇 스토어 홈페이지에 888 Crew 정규 1집 앨범 발매소식이 공식적으로 공지되었다.
발매일은 6월 13일. 작년 10월 말에 오피셜 부틀렉이 나왔으니, 얼추 7개월만의 일이었다.
보통 앨범이 나오기 한두 달 전쯤부터 팬들은 어느 정도 앨범발매 소식을 알 수가 있었다.
뮤지션 스스로가 만족감과 기대심리로 떠드는 경우가 제일 많았고, 의도적으로 광고효과를 노리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는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지인을 통해 퍼져나가는 지인피셜이 있었다.
그러나 888 크루의 정규 1집 앨범은 소문하나 돌지 않고 너무나 갑자기 소식이 터져 나왔다. 이 같은 상황의 가장 구체적인 이유는 888 크루 역시 그들의 앨범이 언제 출시될지를 잘 몰랐다는 것에 있었다.
888 크루가 JFTR의 트랙을 90% 이상 완성시킨 시기가 4월 초였다.
그러나 막상 정식녹음을 시작한 것은 5월 중순이었고, 녹음은 단 5일 만에 끝이 났다. 트랙 순서를 결정짓는데 걸린 시간이 녹음 시간보다 길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언제 발매될지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아무튼 난데없는 888 크루의 1집 앨범 발매 소식에 힙합 팬들은 굉장한 기대감을 가지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힙합 더 바이브나 888 Show에서 공개됐던 트랙들을 가지고 트랙 리스트를 예측하기도 했고, 오피셜 부틀렉이 워낙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하기도 했다.
힙합은 믹스테잎 문화가 강하고, 믹스테잎도 하나의 작품으로 쳐주긴 하지만 역시 정규 앨범만큼의 무게는 아니었다.
-이번 888 크루 앨범 좋을까? JFTR?
-좋겠지, 뭐.
-당연히 좋겠죠. 문제는 얼마나 좋은가, 정도의 문제죠. 기대치를 만족시킬 만큼 좋을지, 아니면 그냥 적당히 좋을지.
-이번 앨범이 오피셜 부틀렉만큼만 뽑혀도, 888 크루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에서 탑독 중의 탑독으로 분류될 수 있을 거임. 메인스트림 반응까지 좋다면 드디어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랩스타가 나오는 거고.
-글쎄. 난 888 크루를 굉장히 응원하는 편이지만, 너무 어리지 않나? 좋은 랩을 만들어낼 능력은 있어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될까?
-투팍이 20살 때 낸 데뷔앨범이 50만장이 팔렸는데?
JFTR에 대한 설왕설레가 오가는 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수많은 사람들이 쇼케이스를 신청했다.
상현과 준형은 800명이 너무 적은 수였는가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 이상은 쇼케이스라기보다는 공연에 가까울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6월 10일이 다가왔다.
< Verse 29. Just For The Record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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