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7. 888 Crew Version 2 >
그렇게 완성된 비트는 그랜드 피아노의 클래식 풍 연주를 중심으로 드럼과 베이스, 오보에가 서브 사운드로 배치된 것이었다. 피아노와 오보에가 쓰였지만 소리가 풍성하다기보다는 어딘지 쓸쓸한 느낌이 강했다.
그때 하연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평소보다 조금은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존재하는 강변을 향하기 시작했다.
하연의 ‘강변 살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방송국 주재원이셨다가 사고로 돌아간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본인의 가정사를 크루원들에게 털어놓았다. 하연의 어머니가 안 계시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크루원들이었지만, 아버지까지 친 아버지가 아니라는 이야기에 모두들 가슴 아파했다.
특히 상미가 하연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많이 울어서 오히려 하연이 당황할 정도였다.
하연은 그녀를 꼭 안아주는 민지와 상미의 품 안에서 미완이던 가사를 단번에 생각해낼 수 있었다.
엄마야, 아빠야, 강변 살자.
얼핏 기억나는 우리 집 담장
그 아래 피어 있던 민들레는 이젠 혼자,
민들레 홀씨, 부는 바람
본래 김소월 시인의 시에서 강변이 의미하는 것은 평화로운 곳이지만 하연에게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강변이란 곳은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두 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적 그녀의 집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고, 큰 담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담장 밑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노란색 민들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러나 이제 민들레는 홀씨가 되어 혼자 남았다.
그녀를 향해 불었던 바람 때문에.
하늘로 날아간 두 민들레 홀씨
땅 아래 남은 홀씨를 봐줄까 혹시
그대들이 올 시, 내 가슴 깊이
숨겨놓은 울음이 길을 밝히리
그렇게 두 분의 부모님은 하늘로 떠나가셨고, 과거의 하연은 하늘로 날아가기 직전의 흔들리는 마지막 홀씨였다. 너무 슬퍼서 삶에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살아가고, 슬픔을 가슴 깊이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은 하늘에서 부모님이 보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연의 목소리가 격정적으로 변했다.
리허설을 하면서 감정에 과잉되지 말자고 다짐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하연의 눈이 붉어졌고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랩이 흔들리거나, 완성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자들은 순간적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하연을 바라봤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까지 그녀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야, 아빠야, 강변 살자
두 홀씨가 뿌리 내린 산장
소나무가 구름을 잡고
청설모가 뛰어오는 방안
하늘로 훌훌 날아간 두 개의 민들레 홀씨는 어디로 갔을까?
하연은 진심으로 그곳이 강변이길 바랬다.
물이 보이는 한 편에 놓인 산장. 그림같이 뻗은 소나무 끝에 구름이 걸려있고, 밥 냄새를 맡은 청솔모가 방안으로 뛰어드는 곳.
첫 마디의 ‘엄마야, 아빠야, 강변 살자’는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나오는 아홉 마디의 ‘엄마야, 아빠야, 강변 살자’는 두 분이 하늘나라에서 알콩달콩 강변에서 살길 바라는 소망이었다.
그 소망에는 그녀가 함께할 수 없다는 체념의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야, 아빠야, 강변 살자
내 홀씨의 고독이 뿌리내린 사람
봄이 오지 않았음에도 내 싹을 틔운
물이 흐르는 그곳보다 더 큰 사랑
12마디의 ‘엄마야, 아빠야, 강변 살자’는 하늘에 계신 부모님을 향하는 나는 괜찮다는 위로의 말이었다. 그러니 두 분이 강변에서 행복해도 된다는 말.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홀씨의 고독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봄이 오지 않은 계절에도 싹을 틔우게 해준 사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아버지가 되어준 지금의 아빠였다.
이제 그러한 사람은 한 명 뿐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생긴 새로운 가족, 888 크루.
7명의 멤버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그들은 모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상현이 가장 좋았다.
상현의 냄새, 표정, 말투, 목소리. 어느 하나 싫은 것이 없었다.
‘그래. 하연이 너는 예쁘니까 꼭 티비에 나올 수 있을 거야.’
처음으로 모인 888 크루의 자리에 자신을 보고 상현이 한 말이었다.
사실 하연은 맨 처음에 상현의 말을 듣고 좀 이상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괜한 수작을 거는 것 같아서 불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현의 눈빛에 그 같은 느낌이 없어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상현이 그녀의 꿈을 이루어주었다.
그의 뒤를 따라서 차분히 걷다보니 어느새 티비에 나올 수가 있었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그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저녁에 하연은 상현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둘의 첫 만남이 크루원들이 모였던 카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원에서 불렀던 Remission.
그 자리에 상현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제야 하연은 상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상현은 자신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근데 왜 병원에서 나 봤다는 이야기 안했어?’
‘말하면 신경 쓰일 수도 있잖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채널 헤븐, 만들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하연의 단단한 목소리가 온 힘을 다해 후렴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후렴구는 원작인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그대로 차용한 가사였다.
쓸쓸함과 아쉬움으로 가득 차있던 하연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실렸고, 희망이 생겼다.
그녀가 외치는 ‘엄마’와 ‘누나’는 민지였고 인혁이었고 환이었다. 준형일 수도 있었고, 상미일 수도 있었고, 민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상현일 수도 있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그 순간 스피커 사이로 절묘하게 믹싱된 ‘우우’하는 소리가 깔렸다. 피치가 다운되고, 음압이 강하게 압축되어 베이스 소리처럼도 들리고 통로를 지나는 바람 소리처럼도 들리는 소리.
소리가 피아노와 오보에 사이로 절묘하게 스며들자 쓸쓸한 느낌이 한층 더 가미되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그러나 이윽고 ‘아아’하는 하이피치 소리가 기존의 쓸쓸한 사운드의 위치로 대체되었다. 순식간에 비트가 여전히 쓸쓸하지만, 희망이 느껴지는 느낌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민호의 굉장한 사운드 컨트롤이었다.
그 순간 관람객들은 두 사운드 샘플이 아주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들어본…….’
그것은 공연 시작 직전 그들이 냈던 환호 소리와 야유 소리였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노래의 반환점을 맞이하는 터닝포인트의 중요한 장치가 된 것이었다.
단순히 분위기를 풀기 위한 여흥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참여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모두들 가슴 속에 차오르는 한 가지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가지고 싶다.’
이 순간을 독점하고 싶다는 소유욕.
오늘 비디오 아트로 만들어지는 888 크루의 공연은 시문이 새겨진 그림과 함께 오로지 경매 낙찰자에게 귀속된다. 더 이상 똑같은 작품을 만들지 않으며 전시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매 금액은 전액 기부되는데 그 방법 역시 구매의사를 높인다. 갤러리에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갤러리에서 기부하는 형식이 아니라 구매자가 직접 한국에 기부를 하고 기부 영수증을 갤러리에 제시하는 형식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는 기부 세금 공제가 75%에서 100% 사이다. 천문학적인 세금을 내야하는 이들에게 기부는 익숙한 문화였다.
그렇게 공연이 진행되는 것과 별개로 갤러리어들 사이에서 작은 경쟁의 감정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하연과 민지의 강변 살자 이후로 준형, 김환의 ‘거울’이 이어졌다.
거울이라는 곡은, 거울을 바라본 채 오른손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왼손을 들고, 왼손을 들면 오른손을 든다는 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곡이었다.
나는 오른손을 들었지만 거울에 비친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왼손을 들었다는 것이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준형과 환은 모든 결과에는 왜곡이 일어날 수가 있지만, 손을 들었다는 과정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주제로 곡을 풀어갔다. 해석할 여지가 굉장히 많은 가사들이었기에 노래를 감상하는 이들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두 곡이 끝이 나고, 두 번째 행간 2막의 대미를 장식할 상현의 순서가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888 크루의 이상현이라고 합니다.”
상현의 인사에 작은 박수가 흘러나왔다.
“제가 오늘 부를 노래는 고결한 충동이라는 곡입니다.”
상현은 영어로 곡에 대한 짤막한 소개를 했다. 영어실력을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이들 대부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영어였기 때문이었다.
고결한 충동은 제목 그대로 충동이란 감정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존엄함을 노래한 곡이었다.
“따뜻해지고 싶다는 충동이 없었다면 불이라는 게 탄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밤에도 빛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없었다면 에디슨은 전구를 만들지 않았겠죠.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어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충동은 전화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천천히 이어지는 상현의 설명 뒤로 우민호의 MPC가 비트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상현의 말은 마치 노래의 인트로와 같은 느낌을 주게 되었다. 처음부터 의도된 구성이었다.
고결한 충동의 비트는 론리 로드처럼 오케스트라 하모니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곡이었다. 하지만 비트의 형식은 ‘연주’가 아니라 ‘부딪침’이었다.
팀파니와 심벌즈의 사운드가 부딪치는 순간, 클라리넷과 플루트가 부딪치는 순간, 바이올린과 첼로가 부딪치는 순간. 그 순간의 사운드를 잘게 쪼개서 마치 하나의 악기처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현악기나 금관악기의 소리가 마치 퍼커션(두드리고 때리는 행위로 음을 내는 악기)처럼 느껴지는 재미있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소리와 소리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드럼과 베이스의 고스트 노트가 포진되어 있었지만.
우민호의 MPC 라이브 퍼포먼스가 이어지는 사이 멘트를 끝낸 상현이 버릇처럼 갤러리 내부를 훑어보았다. 꽤나 많은 갤러리어들이 보였고, 그들의 표정이 보였다.
지금 그들은 어떤 충동을 지니고 있을까?
누군가는 비트에 맞춰 춤을 추고 싶을 수도 있었고, 누군가는 이 자리가 너무 지루해서 당장 뛰쳐나가고 싶을 수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화장실이 급할 수도 있었고.
그리고 상현은, 랩을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부릉부릉 달리고 싶은 스포츠카도 제대로 된 도로가 없으면 달릴 수가 없었다. 괜히 어설픈 도로를 달리려다가 과속방지턱에 걸려서 차체 바닥만 까지기 마련이었다.
‘실제 경험이지.’
그러니 그는 인내를 가지고 민호가 깔아주는 완전한 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민호의 비트가 완성되었다.
고결한 충동의 비트는 앞선 두 곡과는 사뭇 다름의 느낌의 비트였다. 앞선 두 곡이 절제미를 중시했다면 지금의 곡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폭발하는 느낌이 강했다.
심벌즈와 팀파니가 거칠게 충돌하는 곳으로 상현의 랩이 벌컥 뛰어들기 시작했다.
< Verse 27. 888 Crew Version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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