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7. 888 Crew Version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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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은 라임, 게임 등등 무수히 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때론 ‘거리의 Poet’ 혹은 ‘Thug Poe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랩의 가사가 시와 마찬가지로 함축과 비유의 언어로 구성되기 때문이었다.
최학림 시인은 888 크루의 가사에 영감을 받아서 랩과 시의 공통점에 주목했고, 덕분에 시와 랩이라는 행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종로구에 있는 메이저 아트 갤러리에서 진행된 시와 랩의 첫 번째 행사는 큰 호평과 많은 주목을 받으며 성공리에 막을 내렸었다.
재미있게도 첫 번째 행사가 끝난 뒤 이런저런 후원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행사를 진행 중이라면 반드시 자신이 첫 번째로 후원하고 싶다는 재벌이나 예술 후원자들의 러브콜이었다.
보통의 아트 갤러리가 후원자들의 후원을 받아서 운영되며 재벌들을 대상으로 예술품들을 판매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모든 대중을 상대로 벌였던 시와 랩에 재벌들이 큰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얼핏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와 랩에는 굉장한 파괴력이 있었다.
888 크루가 랩을 잘해서, 최학림 시인이 시를 잘 써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동화에 나올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재벌들의 과시욕과 지적 허영심 때문이었다. 물론 진실로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도 있었겠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때문에, 영원히 미완의 예술일 수밖에 없는 시간 예술.
이 같은 시간 예술을 갤러리에 전시시켜 공간 예술의 성격을 입혔다는 차별성은, 후원자들 예술적 욕구들을 충분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었다.
시와 랩의 <두 번째 행간>은 후원자들의 충분한 후원을 통해서 한층 진화했다.
예술적인 면을 강화하면서도, 예술이 부르주아만의 것이 아니라는 대중 참여의 의식을 강하게 고취시킨 것이었다.
이런 시와 랩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첫 번째 방식은 시문이 새겨진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는 갤러리 쇼였다.
시의 내용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화가들의 그림은 그 자체로도 예술품이라 칭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준비 시간 관계상 888 크루의 랩이 작품으로 바뀐 것은 세 개뿐이라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었다.
이 같은 전시품들 중 몇 작품의 옆에는 헤드폰이 놓여있었는데, 방문객들은 헤드폰을 통해 888 크루의 랩을 들을 수 있었다. 총 27개의 작품 중 10개의 작품이 랩으로 만들어졌고, 헤드폰을 통해 플레이되고 있었다.
두 번째 방식은 888 크루의 공연이었다.
여기에도 시간 예술과 공간 예술의 장벽이 깨지는 장치가 있었다. 아트 갤러리 메인홀에서 진행되는 888 크루의 공연이 4대의 초고화질 LED 모니터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로 제작되는 것이었다.
888 크루의 표정과 목소리.
관객들의 반응과 호흡.
갤러리 내의 소음과 풍경
이 모든 것을 한 점의 왜곡 없이 담아내는 영상 예술.
아직 한국에 상용화되지 않은 LED 영상기술까지 준비한 것은 최학림 시인이 비디오 아트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왜냐하면 이 같은 프로젝트는, 2006년 1월 29일로 별세한 비디오 아트 창시자 백남준 선생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최학림의 기획은 단순히 비디오 아트의 형식을 빌리는 게 아니었다. 백남준 예술의 영원한 대주제였던 관객참여와 소통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었다.
‘888 크루란 팀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아서, 선생님께서 별세하시기 전에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면…….’
두 번째 행간을 준비하며 최학림 시인이 가장 아쉬워했던 부분이었다.
행위 음악으로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던 백남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 같은 최학림의 예술적 의도는 수많은 예술인들과 아트 매거진들의 시선을 모았고, 한국보다 외국에서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최학림이 백남준의 예술 세계의 향유한다는 점을 공고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개척한 창시자.
독일 <캐피탈> 선정 세계 100대 예술가 중 5위.
미국 <아트뉴스> 선정 세기의 미술인에 피카소, 모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예술가.
위대한 예술가가 백남준.
거인의 예술 세계를 공유하는 두 번째 행간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은 점차 높아져만 갔고, 필연적으로 888 크루의 이름도 함께 거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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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은 긴장된 시선으로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으뜸간다는 한남동 아르떼 갤러리(arte gallery)의 내부를 살폈다.
아르떼가 이탈리아어로 예술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들어서 그런지, 왠지 갤러리 내부가 이태리 전통 성당처럼 느껴졌다.
갤러리를 관람하는 관람객들 중에는 한국인이 반이었고, 외국인이 반이었다.
한국 사람들 중에는 백남준 선생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 제작 팀이 가장 먼저 보였다.
외국인들 중에는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의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기자들과 예술가들, 부호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작품을 감상하고, 노래를 들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이해하고 보는 건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모두 예술 통역관을 대동한 상태였다.
‘예술이라…….’
상현은 당연히 그의 음악이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행사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예술을 두 분류로 차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르주아 층이 즐기는 고상한 예술과 대중이 향유하는 대중예술로 말이다.
그는 예술에 대해 잘 몰랐다. 갤러리 곳곳에서 들리는 부르주아 예술이니, 아방가르드 예술이니 하는 단어들은 그야말로 들어만 본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떤 미사여구를 붙이고 어떤 매체로 포장을 해도 그가 하는 예술은, 랩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고상하게 보거나, 천박하게 보는 것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달린 부분이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충동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소통할 뿐이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888 크루. 우리의.’
그러니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부드러운 직선, 길거리 공연, 클럽 Hommie에서 한 랩과 오늘 아르떼 갤러리에서 할 랩은 똑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상현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크루원들과 함께 갤러리를 돌아보았다.
혹시 지나치게 긴장한 크루원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해주려고 했는데, 표정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다. 모두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상현은 문득 크루원들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오늘 공연 끝나면 작업실로 돌아가서 JFTR의 트랙들 다시 한 번 검토할까요?”
“동의.”
“나도.”
“쳇,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원래 상현이가 멋있는 건 혼자 다하려고 하잖아.”
조심히 물어본 게 민망할 정도로 모든 크루원들이 단숨에 동의를 표했다.
888 크루 멤버들은 오늘 갤러리를 보면서 그동안 그들이 JFTR의 ‘전달 방식’에만 지나치게 집착했을 수도 있다는 반성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오피셜 부틀렉의 성공을 계승하는 세련된 비트들과 화려한 랩, 다양한 색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정작 888 월드에서 가장 중요한 고결한 충동과 진실된 감정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몇몇 트랙들이 떠올랐다.
상현은 드디어 확신이 들었다.
‘JFTR은 잘 될 거야.’
그동안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정규 앨범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잘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이 있었다.
그런 불안함이 없는 뮤지션이 어디 있겠냐만은, 부틀렉 0.5나 오피셜 부틀렉을 만들 때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을 쏟아내고 토해내듯이 랩을 뱉었다.
어쩌면 오경 미디어에 소속되게 되면서 ‘888 크루 이상현’의 음악에는 언더그라운드의 인장이 박혀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것일지도 몰랐다.
‘발매 날짜에 연연하지 말자. 트랙 수에도 연연하지 말고, 남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888 크루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찾아왔던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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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주는 상현을 비롯한 888 크루 멤버들과 인사를 나눴다. 호미의 공연이나 힙합 더 바이브에서 봤기 때문인지 멤버들을 보는 것은 처음임에도 남인 것 같지 않았다.
“별로 긴장하지 않으신 것 같네요?”
“어디서 하든지 제가 하는 음악은 똑같은데 긴장할게 뭐 있나요.”
“전 세계 예술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해도요?”
오연주의 말에 상현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좋은 공연 기대할게요.”
응원의 메시지를 건넨 오연주는 곧 아르떼 갤러리의 작품들을 관람했다. ‘피어난다’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랩을 들어보니 이상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어난다. 그 안에서
피어난다. 그 밖에서
길고긴 인내의 끝에 뿌리를 딛고서
피어난다. 마음 안에서
언제 들어도 매력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사람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목소리.
처음 랩과 시라는 낯선 조합을 듣고는 의아한 마음이 있었는데, 강렬한 리듬으로 탈바꿈한 시에는 시 본연의 느낌과는 다른 색다른 전달력이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고마움이 피어나는 건가?’
오연주는 상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홍경수의 의도를 곡해하는 바람에 곤경에 처했으니 원망하는 모습을 보일 법도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상황을 바로잡을 몇 가지 부탁을 했을 뿐이었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
그녀의 입장에서는 별반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상현의 계획이 가능해지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음악에 달렸다.
오연주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갤러리 쇼를 감상했다. 갤러리를 찾은 이들 중에는 낯익은 얼굴이 꽤나 보였다.
LOC 그룹에서 나온 이들도 보였다.
사실 오연주가 오늘 아르떼 갤러리를 찾은 것도 엄밀히 따지면 LOC 그룹 때문이었다.
오경 그룹은 <두 번째 행간>에 후원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메이저 중의 메이저 갤러리만 후원하는 오경 입장에서 시와 랩은 급이 떨어지는 행사였다.
그러나 꽤 부유한 개인 후원자들이 나타나 두 번째 행간이 첫 번째와 전혀 다른 수준으로 진화하고, 안타깝게도 백남준 선생님이 별세하면서 전 세계 예술계의 관심을 받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공중파 3사 방송에서 두 번째 행간을 언급할 때마다 후원사로 LOC 그룹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문화 예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커진 그룹이다 보니까 이런 쪽에서의 발 빠름은 오경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독히도 LOC 그룹을 싫어하는 회장님의 심기가 점차 불편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구체적인 지시가 없어도 아랫사람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오연주에게 떨어진 특명은 비디오 아트 작품의 자선 경매에 참여해 오경 그룹의 이름으로 최고가로 구매하라는 것.
오늘 888 크루는 총 3곡을 공연할 예정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3개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경매로 판매된다. 판매금액은 전액 기부되고.
예술계에서는 예술 소통의 순간 그 자체를 독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가격이 설정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니 비디오 아트를 최고가로 구입하면 시와 랩과 오경 그룹의 연결점이 생기는 것이었다. 오연주가 오늘 컨펌 받은 낙찰 가능 한도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2막을 시작하겠습니다. 관람객 여러분은 메인홀로 모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때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공지가 4개 이상의 언어로 차분히 방송되었다.
아르떼 갤러리 메인홀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메인홀의 중앙에는 최학림 시인을 선두로 888 크루 멤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 Verse 27. 888 Crew Version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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