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7. 888 Crew Version 2 >
서율예고가 있는 평창동은 크게 번화한 동네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적은 동네도 아니었다. 때문에 나란히 하교를 하는 상현과 준형, 상미는 교문을 나서자마자 교복 안에 받쳐 입은 후드를 푹 눌러써야만 했다.
‘여름에는 어쩌지? 그때쯤 되면 동네에서는 익숙한 사람이 되려나?’
상현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도보로 10분쯤 걸리는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 그들은 다시 집에서 나와야했다. 작업실로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광주에서는 상현의 집 안에 크루 작업실이 있었지만, 서울로 올라오면서 집과 작업실을 따로 분리하게 되었다. 서율예고와 가까우면서 소음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거주와 작업실을 분리할 수 있을만한 적당한 크기의 집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888 크루는 한 팀의 뮤지션들과 공동 투자를 해서 아주 큰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교외의 한적한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근처에 내부순환도로가 있어서 가끔씩 시끄럽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두의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다.
사실 사업가였던 과거의 상현이라면 공동 스튜디오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지녔을 것이었다. 스튜디오를 만드는데 들어간 돈이 결코 적지 않았고, 공동투자 형식으로 만들어졌기에 양 팀의 신뢰가 깨진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888 크루에게는 그 어떤 팀보다 신뢰할 수 있는 뮤지션들이 있었다. 바로 밴드 L&S였다.
“왔어?”
“형들은 어디가고 누나만 있어요?”
스튜디오에 들어가자 가사를 쓰고 있던 미주가 그들을 반겼다.
“어제 밤새 작업하고 다들 이층에서 자고 있어.”
“밥은 먹었어요?”
“여섯시에 멤버들 깨워서 같이 먹어야지.”
L&S는 케이블 채널 스타일 영의 ‘로얄 밴드’에 출연을 하게 되면서 올해 초,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로얄 밴드가 끝나면 다시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장시간의 고민 끝에 888 크루와 공동으로 작업실을 차리고 홍대에서 활동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밴드 플레이어 입장에서 밴드 팬들이 많은 홍대만큼 활동하기 좋은 도시가 없었으니까.
중요한 결정에서 소심해진다는 콤플렉스를 가진 방민식이 888 크루의 과감한 결정들을 접하면서 조금씩 변모한 결과였다.
“내일이면 로얄 밴드 첫 방송이네요. 준형이 조언은 기억하면서 녹화했죠?”
“응? 준형이가 뭐 조언을 해줬었나?”
“방귀 끼면 마이크에 들어간다고…… 악!”
미주에게 장난을 걸던 상현은 오랜만에 손바닥으로 등짝을 얻어맞았다. 둘의 투닥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민식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작업실 거실로 나왔다.
“으어, 피곤하다. 미주 너는 꾀죄죄하더니 언제 그렇게 꽃단장을 하고 왔냐? 어디가?”
“어? 원래 친구랑 약속이 있었는데 파토가 나서…….”
“그럼 밥 안 먹었겠네? 애들 깨워서 밥이나 먹자.”
L&S가 밥을 먹는 사이, 밖에 나가있던 888 크루 멤버들이 하나둘씩 작업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작업실은 11명의 뮤지션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다.
“언니, 음대는 원래 이렇게 실기가 많아요?”
“교수님마다 다르긴 한데, 1학년 때는 그렇게 많이 안내줄 텐데? 오히려 1학년 때는 기초를 쌓으라고 이론에 관한 레포트를 많이 내주지. 나는 악기 쪽이라서 실용음악 쪽은 잘 모르긴 해.”
예대 선배인 미주와 하연이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고, 각 팀의 작곡을 책임지는 우민호와 방민식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만나면 항상 신나는 용준과 준형으로 이루어진 ‘준 브라더’는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농담을 던지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끼어들기 바빴다.
“근데 인혁이 이 자식은 공부는 잘 하고 있으려나?”
“제 생각에 인혁이 형 지금 가사 쓰고 있지 않을까요? 법전 한 귀퉁이에.”
“그 자식 언제 올라올까? 나는 6월 본다.”
“6월은 너무 빠르고, 한 5월?”
“그럼 난 4월.”
888 크루 멤버들이 자신의 소망을 담은 시간을 말했다. 항상 들리던 ‘크’ 소리가 없으니 어딘가 어색하고 심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888 크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방민식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상현아 너 회사에서 인현이 만난 적 있냐? 차인현 이 자식은 왜 전화하면 받질 않지? 나온다던 노래는 나오질 않고.”
“아, 직접 만난 적은 없고요. 듣기로는 주요한이 지금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그거 때문에 앨범 발매가 연기됐다던데요.”
“그래? 근데 왜 이 자식은 부재중을 보고 전화를 안 하지? 쪽팔려서 그런가? 우리한테까지 그럴 게 있나?”
“글쎄요…….”
상현이 말꼬리를 흘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박인혁에서 차인현으로 이어졌던 화제는 자연스럽게 내일 첫 방송을 가질 로얄 밴드로 이어졌다.
로얄 밴드는 프로그램 자체는 힙합 더 바이브 2의 아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꽤 괜찮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힙합 더 바이브가 현장 관객들만으로 점수를 매겼다면 로얄 밴드는 쟁쟁한 인기가수들이 심사위원으로 나온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888 크루 멤버들과 L&S 멤버들이 로얄 밴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상현은 조용히 차인현에 대해서 떠올렸다.
사실 그는 오경 미디어에서 차인현을 만났었다. 그리고는 차인현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적의에 적잖이 놀랐다.
‘왜 차인현이 나한테 이토록 강렬한 적의를 보이는 거지?’
물론 차인현이 자신을 반가워하는 건 말도 안 되긴 했다. 자신은 그의 잘못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헤어질 때만해도 차인현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다는 자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서 의아할 뿐이었다.
사실 주요한의 타이틀곡이 될 거라던 칼립의 한번뿐인 삶이 발매되지 않자, 상현은 마지막 기대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차인현이 뮤지션으로써 최소한의 양심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
그러나 그의 적대적인 행동과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차인현은 그 스스로가 덫으로 걸어 들어올 운명이었다.
“그만 놀고 작업이나 하자!”
한참 잡담을 나누던 888 크루와 L&S는 곧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상미는 웹툰 세이브 원고를 위해서 그녀만의 작업실로 들어갔고, L&S 멤버들은 그들의 2집 앨범 Long & Short의 최종 마스터링에 몰두했다.
나머지 888 크루 멤버들은 3분의 1정도 가이드 녹음된 정규 1집 JFTR(Just For The Record)을 위해서 노력했다.
광주를 떠나온 888 크루 멤버들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학업 배경 자체가 예술로 바뀐 상현, 준형, 상미, 하연은 말할 것도 없었고, 민호는 홍대의 DJ들과 교분을 쌓으며 부족한 것들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환과 민지는 888 크루가 아닌 다른 팀의 래퍼들과 간간히 작업을 하면서 스펙트럼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생활에서 새롭게 시작된 888 크루.
888 Crew Version 2가 진정으로 시작되는 날은, 기나긴 작업이 끝나고 정규 1집 앨범 Just For The Record가 발매되는 순간일 것이 분명했다.
***
“어, 왔어?”
“네, 형. 여기 박카스요.”
상현이 오경 미디어 7층에 위치한 채대한의 작업실로 들어가면서 박카스 세 박스를 건넸다.
“어어, 갑자기 배송이 지연돼서 딱 떨어졌네. 이거 10개 들입짜리가 얼마더라?”
“괜찮아요. 그냥 저녁에 밥이나 시켜주세요.”
상현은 박카스를 꺼내먹으며 지갑을 뒤지는 채대한에게 손사래를 쳤다. 근데 얼핏 지갑을 보니 현금은 없고 카드밖에 없는 것 같다.
“형 근데 카드…….”
“캬, 역시 박카스야. 너 내가 박카스 회사 망할까봐 동아제약 주식 사주는 거 아냐?”
“박카스 회사는 절대 안 망할 걸요? 적어도 2025년까지는.”
“뭐라는 거야?”
채대한은 심각할 정도로 박카스에 중독된 사람이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맛있어서 먹는 거라고 했다. 도박 중독자가 그냥 재밌어서 도박을 한다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타우린도 중독이 있던가? 그럼 저거 병인데.’
상현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굉장한 호의를 보이는 채대한이었지만, 어쨌든 제자된 도리로써 스승의 허물(?)을 마구 까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사실 성격이 지랄 맞은 것도 한몫했고.
“너 이 새끼…… 방금 형 한심하게 봤지?”
“아니옵니다. 스승님.”
“너 숙제다 해왔냐?”
“당연하죠.”
상현이 웃으며 채대한의 방에 마련된 자신의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곧 큐베이스(Cubase : 작곡 프로그램) 화면이 떴다.
상현의 컴퓨터에는 큐베이스 뿐만 아니라 누엔도, 로직, 어도비 등등 힙합에 사용되는 수많은 작곡 프로그램이 깔려있었다.
이는 채대한의 신념 때문이었는데, 그는 음악 스타일과 악기의 종류에 따라 그에 알맞은 프로그램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상현은 머리가 터져라 다양한 프로그램 사용방법들을 배우고 있었다.
과정이 어려운 만큼 배움에 있어서는 대단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서로 다른 프로그램의 시스템 체계를 이해하다보니 각각의 이펙트 컨트롤에 대한 이해가 날로 늘어만 가는 것이었다.
숙제를 검사하던 채대한이 헤드폰을 벗으며 말했다.
“드럼 소스를 바꿨네?”
“네. 아무리 믹싱을 해도 드럼 소리가 딥하게 안 들려서 아예 바꿔봤어요.”
“그래? 그럼 결국 원하던 악기를 포기하고 도망간 거네? 이게 마스터링까지 끝나서 CD로 나오면 처음 네 영감을 정확히 표현해줬던 Stylus 드럼 질감과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 CD는 그렇다고 쳐도 만약에 이게 LP로 나오면? 그때도 똑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어?”
“음…… 아니요. 다르겠죠.”
상현이 단번에 잘못을 수긍했다. 채대한은 이런 상현의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절대 도망가지 않고 물어본다. 뭔가를 지적당하면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시도하고, 고민하고, 분석한 다음에 싸움을 건다.
아마 이상현은 이번 주 안으로 새로 만든 비트와 원래 드럼 소스로 만든 비트를 가져와서 싸움을 걸 것이다. 아주 유쾌한 싸움을.
“물론 나는 바뀐 쪽이 더 좋아. 내가 원래 칭찬 잘 안하는 사람인데 너한테는 진짜로 2006년의 사운드를 뛰어넘는 어떤 영감이 있어. 하지만 결과가 좋다고 다는 아니야. 과정에서 도망쳤다면 그건 가짜야. Fake ass.”
상현이 채대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채대한에게 엄청난 배움을 얻고 있었다. 22살에 기타하나 메고 뉴욕으로 가서 배웠던 본토 블랙 뮤직의 정수를 배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무런 대가 없이.
사실 상현이 채대한에게 작곡을 배우는 것 때문에 다른 연습생들과 서브 작곡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불만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속사에서 작곡을 가르치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 어깨너머로 배우고 독학을 한다. 막히는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것만 해도 꽤나 고마운 일이다.
제대로 된 한 명의 작곡가가 탄생하려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최소한 5년은 걸린다. 아니, 5년도 짧다.
그러나 문제는 5년 이상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작곡가를 키웠다고 해도, 그 작곡가가 히트 작곡가가 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돈을 들여 작곡가를 키울 바에는 이미 잘하는 작곡가를 고용하는 것이 회사 입장에서는 훨씬 수지타산에 맞는 일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재능유출의 이유였다.
회사는 전속작곡가든 프리랜서 작곡가든 그 재능을 온전히 독점하기를 원했다. 그러니 일 년에도 무수히 많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연습생들에게 그런 기회를 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별놈 아닌 줄 알고 연습생 계약을 파기했는데 갑자기 몇 년 뒤에 소속 작곡가한테 배운 걸로 거물 작곡가가 된다면? 배가 아픈 것을 떠나서 회사 소속 작곡가의 독창성이 복제되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장기적인 인사이트로 음악계 전체를 본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럴 리가 없는 게 한국 기획사들이었다.
그러니 상현이 채대한에게 작곡을 배우는 일을 대부분의 연습생들이 부당한 특혜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집요하게.
이에 대해서 채대한은 대답은 간단했다.
‘니들 중에 나한테 작곡 배우겠다고 찾아온 놈이나 있어? 진심으로 가르쳐달라고 부탁해본 사람이나 있었냐?’
며칠 뒤 몇몇 연습생들이 박카스를 사들고 채대한을 찾아갔을 때, 그의 대답은 더욱 간단했다.
‘니들은 재능 없으니, 꺼져.’
쇼 비즈니스에는 재능이 있지만 뮤지션으로써는 재능이 없는 이들. 한 번도 티낸 적 없었지만 그는 오경 미디어의 연습생들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었다.
< Verse 27. 888 Crew Version 2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