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6. 888 Show >
888 Show를 찾은 기자들도 상상 이상의 열광적인 반응에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들은 연신 주변을 살피며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본래 888 Show를 찾은 기자들은 훨씬 더 많았다. 메이저 자본과 언더그라운드의 만남이라는 이슈가 뜨거운 상황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막상 공연장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888 크루가 기자들에게 ‘귀빈’ 대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888 크루는 기자들이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만 특별석을 내어준다거나, 포토 촬영에 응한다거나, 공짜로 들어오게 하진 않았다.
공연을 보고 싶고, 888 크루를 보고 싶으면 정당하게 입장료를 내고 한 사람의 관객으로 들어오라는 게 888 크루의 입장이었다. 결국 888 크루의 행동에 빈정이 상한 기자들 중 대부분은 취재를 포기한 것이었다.
이것은 준형의 리더로써 내린 결정이었고, 888 크루의 포지션에 대해 명확한 선을 그은 것이었다.
준형은 상현이 어떤 마음으로 오경 미디어로 들어갔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888 Show의 본질 자체가 이슈로 포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던 관객들의 떼창이 멈춘 것은 한순간이었다. 어둠에 쌓여있던 무대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888 크루의 노래를 틀던 스피커가 일제히 멈췄고,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무대를 비췄다.
-꺄아아아악!
-와아아아아!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저들끼리 텐션을 올리고 있던 관객들이 무대 위의 래퍼를 보고서 큰 환호를 보냈다.
조명이 비추는 사람은 888 크루의 리더, 신준형이었다.
“안녕하세요. 888 크루의 리더 J.Bro 신준형입니다.”
888 X 888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준형이 환호를 즐기며 관객석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뻔한 멘트처럼 들리는 건 아는데, 정말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 몰랐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정말 너무 감사하고, 888 크루라는 이름이 자랑스럽습니다.”
준형이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관객들이 목청 높여 호응했다.
-잘생겼어요!
-멋있다!
“그렇게 상투적이고 진심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뻔한 말, 되게 좋아합니다.”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제가 입고 있는 옷이 뭔지 아시죠? 입고 계신 분들도 꽤 많이 보이네요. 그럼 조명이 꺼졌을 때 야광으로 빛날 문구도 아시겠죠?”
준형의 말과 함께 관객들의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문구.
062 X RAP.
‘공육이’와 ‘랩’이라는 단어가 산발적으로 들리기 시작하자 준형이 양손으로 후드티의 가슴팍을 잡고 내밀었다.
그 순간,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888 X 888 티셔츠를 입고 있던 관객들은 자신들의 가슴팍에서 야광으로 빛나는 062 X RAP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대 위에 떠오른 글자는 062 X RAP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넓은 곳을 의미하는 글자였다.
82 X RAP
82라는 숫자의 의미를 얼른 들어오지 않아 관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어둠 속에서 준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Country Code. Eighty Two.”
눈치 빠른 이들이 먼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국가번호. 82”
이어지는 나직한 준형의 목소리.
“888 크루. 한국 랩 국가대표.”
그 순간 일제히 켜지는 조명. 1300여명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 선 8명의 ‘국가대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팔팔팔! 팔팔팔!
-888 크루!
“맞지?”
준형의 익살스런 물음과 함께 터진 드럼소리가 랩의 시작을 알렸다.
드럼이 모든 이들의 심장을 터트리겠다는 듯이 스피커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흑인 음악 특유의 박자, 투포(Two-Four) 리듬.
일설에 따르면 음악은 사람의 심장박동을 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의 심장이 뛰는 것을 4분의 4박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기본 리듬은 원쓰리(One-Three) 리듬이다.
쿵!-쉬고-쾅!-쉬고,
쿵!-쉬고-쾅!-쉬고.
원과 쓰리에 강세가 들어가는 것이다.
투포 리듬이 사람을 흥분시키는 이유는 온몸을 때리는 스피커의 진동 때문에 심장박동이 자연스럽게 빨라지기 때문이다.
클럽이나 나이트에 들어가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뛰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888 Show를 찾아온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한국 랩! 국가 대표! 맞지-!”
-꺄아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악!
비트 사이를 파고든 준형의 고함에 관객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전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처음부터 최고조를 때려버리는 888 크루 특유의 오프닝이 여실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관객들의 환호를 배경삼아 묵직한 드럼과 다양한 악기들이 어우러졌다. 이러한 사운드의 정점을 찍은 것은 상현의 훅이었다.
Country Code, Eighty Two!
한국대표의 Attitude!
드럼 위, 경기장에서
승리가 반복, Daily Loop!
82 X RAP.
한국 랩 국가대표.
‘국가대표’란 제목을 가진 이 노래는 888 크루가 그동안 만들었던 그 어떤 노래보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가장 랩을 잘한다는 선전포고.
그동안 888 크루가 그려낸 힙합 특유의 로컬 자부심을 지역감정이란 단어로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888 크루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역감정을 표하려는 게 아니었다.
투팍의 캘리포니아, N.W.A의 캄튼, 에미넴의 디트로이트가 888 크루에게 광주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888 크루는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들의 새로운 감정이 공유되는 도시, 한국의 수도 서울. 888 크루가 이러한 서울을 집어 삼킨다면?
레퍼젠트(Represent) 한국 힙합.
한국 힙합을 대표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Country Code, Eighty Two!
한국대표 Attitude!
드럼 위, 경기장에서
승리가 반복, Daily Loop!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우민호의 비트.
하드코어 질감의 드럼 소스에 90년대 서부 갱스터 힙합의 지저분한 악기 소리를 완벽하게 녹여낸 사운드가 먼저 판을 깔았다. 그 위로 한국 최고의 딜리버리를 가진 상현의 목소리가 얹어졌다.
이 둘의 만남은 888 크루를 추격하는 수많은 래퍼들에게는 반칙과도 같았다.
Country Code, Eighty Two!
한국대표 Attitude!
드럼 위, 경기장에서
승리가 반복, Daily Loop!
‘더 크로닉?’
G-Funk를 창시했던 닥터 드레(Dr.Dre)의 전설적인 명반 더 크로닉(The Chronic). 더 크로닉의 전 세계적인 히트의 절반이 스눕 독 덕임을 부정하는 힙합 팬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특히 타이틀곡 'Nothin` but a G Thang' 의 시작을 여는 스눕 독의 그루비하면서 여유로운 목소리는 전 세계 힙합 팬들의 마음을 단숨에 훔쳤었다.
지금 상현의 목소리가 딱 그랬다.
아니, 강렬한 비트에 어울리는 땜핑감을 유지하면서도 그루브와 여유가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92년의 스눕 독보다 뛰어나게 느껴질 정도였다.
좀처럼 팔짱을 풀지 않는 올드 힙합 팬들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토요일 출근을 끝내자마자 공연장을 찾은 넥타이 부대의 거친 함성은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랩의 시작을 알릴 1번 타자를 찾기 시작했다.
DJ 부스의 우민호를 제외한 7명의 멤버들이 모두 마이크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888 크루의 음악 특성상 훅을 부르는 상현은 1번 타자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신준형? 박인혁? 아니면…… 신하연?’
그 순간 상현을 제치며 무대 앞으로 나오는 래퍼가 있었다. 래퍼는 마이크를 꽉 쥔 채로 별다른 퍼포먼스 없이 랩을 시작했다.
관객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
김환이었다.
김환은 자신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사람이 많기 때문은 아니었다. 1300명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해본 경험은 많았다. 심지어 광주 타이거즈의 공연 때는 만 명이 훌쩍 넘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긴장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888 크루의 첫 단독공연, 투어의 첫 도시, 공연의 오프닝, 그리고 첫 벌스.
1이라는 숫자가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환은 인혁이 음악과 학업에 대해서 고민할 때 가장 큰 아쉬움을 느꼈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쉬움은 동갑내기 친구인 인혁에 대한 인간적인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인혁이 스스로의 음악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다.
왜냐하면 김환이 생각하기에 인혁은 그보다 래퍼로써의 재능이 더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고민하는데 나도 고민을 해야 하나?’
하지만 김환은 이제 1년이 남은 대학교를 자퇴할 만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상태였다.
결국 그의 고민은 음악적인 것으로 이어졌다. 그가 리스펙하는 인혁을 뛰어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들의 적은 언제나 거울 속의 888 크루였으니까.
‘정박을 벗어나 볼까? 어떻게 해야 나만의 색깔이 살아날까?’
김환이라고 엇박이나 변박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 없는 감정을 전달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플로우를 형성하는데 정박이 가장 편했다.
하지만 기본적이란 것은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김환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별다른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최선을 다해서 ‘국가대표’의 벌스를 만들 뿐이었다.
그런데 크루원들의 반응이 아주 이상했다.
‘와, 형 뭐에요? 뭐지? 이거 어떻게 한 거지?’
‘응? 뭐가?’
‘아니, 잠깐만요. 이거 뭐지?’
준형과 상현이 그의 벌스를 듣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 쑥덕거림에는 곧 하연과 인혁이 끼어들었다.
‘정박은 정박인데, 뭐지?’
‘왜 이상해?’
‘아뇨, 너무 좋아서요. 근데 좀 이상한데? 라임 포인트가 계속 달라지는데 왜 느낌은 정박 같지?’
한참동안 자신의 랩을 분석하던 상현이 그 해답을 내놓았다.
‘이거 4마디 단위로 중심악기가 달라지네. 그러니까 16마디의 정박 랩이 아니라, 4마디짜리 정박 랩이 4개가 붙어있는 거네. 근데 그 4마디는 길이가 다 다르고.’
‘그걸 정박이라고 볼 수가 있나?’
‘지금 듣고 있잖아요. 와, 이거 신기하다.’
보통 랩에서 ‘정박’이라는 표현은 ‘스네어’에 라임을 맞춘다는 의미였다. 마디를 세는 기준이 되는 스네어에 랩 호흡의 기준이 되는 라임을 맞춘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반대로 말하면 본인이 정확한 박자만 지킬 수 있다면, 임의로 기준을 설정하고 동일한 포인트에 라임을 계속 맞추는 것도 랩 안에서는 정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옆에서 스네어가 쾅쾅 터지면서 여기다가 강세를 두라고 유혹하는데 전혀 다른 곳에 동일한 라임 포인트를 잡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이것은 재즈 연주자들이 대중을 상대로 3박자의 곡을 연주 할 때 종종 벌어지는 헤프닝과 같은 맥락의 어려움이었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인데, 대중들이 응원을 담아서 치는 박수 때문에 재즈 연주자들이 박자를 놓쳐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빈번했다. 특히 배우는 중인 학생 연주자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대중의 박수가 ‘짝짝짝짝’ 4분의 4박자로 시종일관 귀를 때려대는데 그것을 들으면서 3박자의 템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환은 그것을 해낸 것이었다.
‘크, 이거 완전 칼인데? 라임이 엄청 세게 터지니까 꼭 하이헷이랑 킥 사이에 스네어가 숨겨져 있는 거 같다.’
‘형, 이거 메트로늄 키고 했어요? 이게 가능한가?’
그렇게 모든 크루원들을 놀라게 만든 김환의 벌스는 만장일치로 국가대표의 1 벌스로 정해졌다.
상현을 비롯한 888 크루 멤버들은 오늘의 공연이 뮤지션으로써 김환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열쇠라고 생각했다.
‘보여줘!’
멤버들의 응원을 들은 듯 김환의 랩이 폭발적으로 시작되었다.
< Verse 26. 888 Show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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