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6. 888 Show >
Verse 26. 888 Show
이상현의 오경 미디어 영입 소식은 대중들 사이에서 오가는 많은 논쟁을 탄생시켰다. 자본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을 삼킨 것이냐, 뮤지션이 자본을 등에 업은 것이냐의 논쟁부터 시작해, 상현에 대한 비난과 옹호의 어조가 팽팽히 맞섰다.
그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그래서 왜? 뭐가 문제인데? 잘 된 거 아니야?’에 가까웠다. 그들은 이상현의 음악에 특별함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상현이 오경 미디어에 들어가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 한국에서 가장 좋은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다는 것은 축하받을 일이 아닌가? 이게 대중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느끼기에 이상현은 본래부터 가수였다. 소속사 없이 셀프 메이드로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TV에도 나오고, 라디오, 인터넷 뉴스, 차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소속사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느껴져 본 적이 없으니 언더그라운드 팬들의 느끼는 감정과 온도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서 언더그라운드 팬들은 두 분류로 나눠져서 격렬히 싸웠다.
2008년에 래퍼 산이가 JYP에 들어갈 때의 논리와, 2015년에 팔로알토의 하이라이트 레코즈가 CJ E&M에 인수될 때의 논리가 충돌한 것이었다.
산이가 JYP에 들어갈 때 언더그라운드 팬들은 큰 지지를 보내주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대형 기획사에 랩으로만 인정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산이가 일반 대중들에게 별로 유명하지 않았기에 잘되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대중들에게 보여줄 리얼 힙합.
껍데기만 힙합을 두른 대중음악 사이에서 진짜 힙합의 맛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이 산이를 지지하던 언더그라운드 팬들의 마음이었다.
이와 반대로 하이라이트 레코즈가 CJ E&M에 인수될 때 힙합 팬들은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부었다. 비난 의견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이라이트 레코즈가 쇼미더머니 등으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와 자본에 적대적인 포지션(음악, 가사)을 형성해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팬들이 보기에 하이라이트의 CJ E&M 인수는 그간 그들이 구축해온 이미지와 정반대되는 일이었다.
상현에 대한 힙합 팬들의 반응은 이러한 두 가지가 시선이 섞여있었다.
-도대체 왜 이상현을 욕하는 거지? 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제이지, 에미넴, 투팍, 비기, 닥터 드레도 전부 메이저 자본과 결합한 래퍼들인데? 비기가 여성 보컬 훅이 있는 Juicy를 녹음하기 싫다고 했을 때 매니저가 그랬지. 이 곡이 없으면 네 커리어는 랩 잘하는 언더그라운드 래퍼에서 끝나는 거고, 이 곡이 있으면 슈퍼스타가 되는 거라고.
-하지만 이상현을 비롯한 888 크루는 언더그라운드 포지션을 강력하게 고수하면서 인기를 얻었잖아요. 근데 갑자기 자본의 총아인 오경 미디어라뇨? 그건 888 크루 음악의 변질이죠.
-지금은 이상현의 이야기만 하는 거임. 888 크루가 오경 미디어로 소속된 게 아니라. 888 크루가 이상현 혼자 이끄는 팀도 아닌데 왜 자꾸 이상현과 888 크루를 동일시하는 거지?
-언더그라운드 가치를 내세우며 성장한 팀원이 오경 미디어로 들어가겠다는 건 돈 맛을 보고 싶다는 거 아닌가요?
-내 기억이 이상한 건가? 888 크루는, 아니 이상현으로 한정합시다. 이상현은 단 한 번도 자본에 적대적이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힙합 더 바이브에 나가지도 않았을 거고, 굿즈를 팔지도 않았겠지. 오늘이 지나면 피쳐링 하지도 않았을 거고, 파퓰러 뮤직에 출연하지도 않았겠지.
-아니죠. 이전까지 그런 모든 활동의 주가 되는 마인드가 비 더 언더그라운드였다면 이제는 활동의 주가 되는 마인드를 오경 미디어에서 정해준다는 거죠.
-이상현은 오경 미디어랑 별개로 888 크루 활동을 그대로 한다니까요? 아 진짜 답답하네. 888 크루가 원했다면 팀 전체가 서브 레이블로 오경 미디어에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게 아니잖아요. 왜 그랬겠어요? 이상현만 돈 벌라고? 아니죠. 888 크루의 음악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의미죠.
-난 지금 이상현을 비난하는 힙합 팬들이 이상현을 찬양하게 되는 날을 알고 있음. 이상현이 나스의 'N.Y State Of Mind'같은 곡을 들고 공중파 음방에 나와서 1위하면 됨. 그럼 게임 셋. 한국의 나스 등극.
-N.Y State Of Mind는 너무 매니악하고, 에미넴의 Lose yourself 정도가 현실성 있겠네요. 아니면 오경 미디어 세션맨들 조져서 런 디스 타운 같은 랩 메탈을 진짜 제대로 하나 하던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앨범 타이틀곡은 사랑노래를 하고, 나머지 트랙을 자본과 제대로 결합된 리얼 힙합의 좋은 예를 보여줘야죠. 솔직히 오경 미디어 돈이면 오케스트라 섭외해서 Lonely Road 리얼 사운드 버전도 만들 수 있을 걸요.
-와, 론리 로드 리얼 사운드면 진짜 개간지 나겠다.
-이상현은 이 댓글보고 존나 웃겠네. 언더그라운드 버리고 돈으로 투신해도 팬들이 좋다고 박수쳐주니까 살맛나겠다.
-돈으로 투신? 너 진짜 그러다가 이상현이 블루 프린트 같은 거 들고 오면 어쩌려고 그러냐? 너 같은 새끼들은 제이지 송 크라이(Song Cry)도 한국 래퍼가 불렀으면 그냥 사랑노래라고 존나 깠을 거야? 그치?
논란은 많았지만 결론은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상현이 오경 미디어에서 보여줄 작업물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힙합 팬들 사이에서 상현의 오경 미디어 행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사이, 888 크루는 그들의 단독공연인 888 Show에 대한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마침내 2월 17일 토요일.
888 Show의 시작을 알리는 광주 공연의 아침이 밝았다.
***
“민호 형, 이거 비트 하이가 너무 센 거 아니에요? EQ좀 만져야 될 거 같은데?”
“아니야. 그거 모니터링 스피커가 좀 이상해서 그래. 교체해달라고 했으니까 조금 이따가 다시 리허설 해봐.”
리허설에 매진하는 888 크루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것은 단순히 공연에 대한 설렘 때문은 아니었다.
공연을 기획할 당시 888 Show의 예상 관객은 서울이 1000명 안팎, 부산이 600명 안팎, 광주가 400명 안팎이었다.
그동안 888 크루같은 독특한 위치를 획득한 뮤지션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아니었고, 메이저 가수들의 관객 평균과 인디 밴드들의 관객 평균을 근거로 적당한 산출한 수치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예상 관객 수는 ‘예매 관객 수’가 되어버렸다.
Yes 24와 인터파크를 통해 진행한 888 Show의 예매 자가 2400명을 훌쩍 돌파한 것이었다.
그 중 1000명이 서울 공연을 예매했고, 600명이 부산 공연을 예매했다. 나머지 800명은 당연히 광주 공연의 예매 자들이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는 관객 수를 예상하면서 데이터만 신경 썼지, 광주 시민들의 888 크루 사랑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이것은 LA메탈의 대표 아이콘인 밴드 머틀리 크루(Motley Crue)가 허구한 날 사고를 치고 다녀도, ‘에이 망할 놈들’이라며 LA 시민들이 그들을 지지해주던 것과 비슷했다.
같은 시간과 같은 도시를 공유하는 뛰어난 뮤지션.
게다가 그들의 음악에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 묻어난다면 팬들은 쉽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888 크루가 광주를 주 타겟층으로 삼는 팀은 아니었지만 랩이란 장르가 워낙 개인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다보니 생겨난 현상이었다. 이제 곧 서울에서 활동을 하게 되니 그들의 음악에 Seoul City에 대한 바이브가 공유될 날도 머지않았다.
“민호야, 갑자기 든 생각인데 여기서 4마디를 무반주로 하는 건 어떨까?”
“아, 그런 건 연습 때 말하라고. 이렇게 갑자기 말하면 어떡해?”
“이보게, 디제이 선생. 넓은 무대에서 리허설을 하니 사나이의 가슴에 새로운 청운이 꿈틀거리는 걸 어쩌겠나?”
인혁의 말에 민호가 한심하단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근데 무반주가 가능해? 엇박으로 들어가서 엇박으로 나오는 부분을 무반주로 정확히 맞출 수 있어?”
“니가 퍼즈를 걸었다가 내 랩을 잘 듣고 맞춰주면 되잖아.”
“야 이 미친놈아. 그러면 그 부담이 내 몫이 되잖아!”
“그것이 바로 디 선생의 숙명이지.”
인혁과 민호가 리허설 중에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싸움의 승자는 인혁이었다.
인혁이 거짓 눈물을 훔치며 ‘난 이제 공연 기회가 몇 번 남지 않았는데…… 그래 알았어…….’라고 민호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혁과 민호가 타이밍을 맞춰보는 사이 날씨를 확인해보겠다던 하연이 공연장으로 들어왔다.
상미의 치마가 짧다며 잔소리를 하고 있던 상현이 하연을 반겼다.
“눈은 좀 그쳤어?”
“아니, 엄청 많이 와. 무슨 2월 중순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오지? 입장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너무 춥겠더라.”
“어? 벌써 온 사람이 있어?”
“빨리 와야 앞자리에 서잖아. 오십 명 정도 있던데……. 총 몇 명이나 올까?”
“인디 키드 형들이 그랬는데, 보통 예매자수의 절반 정도가 현매자로 추가된데.”
“예매가 800명이니까…… 총 1200명 정도?”
“근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려고 했다가도 포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아무튼 많이 오면 좋겠다.”
하연이 기대를 담아 말했다.
888 Show는 그동안 그들이 만나지 못했던 성격의 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오늘 공연을 찾을 팬들은 Hommie 공연이나 힙합 더 바이브, 그 외 여러 행사장에서 만났던 팬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후자의 팬들이 888 크루도 좋아하지만 다른 팀도 좋아서 찾아온 이들이었다면, 888 Show의 관객들은 오직 888 크루의 음악을 듣기위해 찾아온 이들이었다. 적지 않은 돈과 수고를 들여가면서 말이다.
“많이 오는 것도 중요한데, 우선은 잘해야지.”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가 언제 못하는 거 봤어?”
“어쭈, 예대 붙었다고 건방진 거 봐라?”
“어디 감히 예고생 주제에 예대생을 평가해? 고삐리, 빨리 누나라고 해봐.”
“……!”
상현은 갑작스런 하연의 공격에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무시하고 무대로 올라갔다. 때마침 자신의 리허설 차례가 된 것이었다.
그렇게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888 Show의 리허설과 무대 점검은 오후 3시가 돼서야 끝났다.
888 크루 멤버들이 점심을 못 먹어 허기진 배를 채우는 사이, 공연 시작 90분 전인 오후 4시 30분에 관객들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입장과 동시에 드림 엔터테인먼트는 관객수 카운팅에 들어갔고, 카운팅은 입장이 종료된 5시 30분에 끝이 났다.
1322명.
오후 6시에 시작된 ‘888 Show - 광주’를 찾아온 관객의 수였다.
오늘의 공연이 벌어지는 김대중 컨벤션센터의 메인 전시장은 스탠딩으로 3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였다.
그러나 공연장이 너무 텅 비는 것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조언에 따라 맥시멈 입장을 1500명으로 잡고 뷰 라인(View Line)을 구성했다.
덕분에 888 크루는 관객 1322명에 안전요원, 스태프가 포함되자 공연장이 알맞게 꽉 차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대단하다.’
드림 엔터의 문지연 대리는 공연이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두 가지의 사실 굉장히 감탄 중이었다.
우선은 1322명이라는 입장 관객수였다.
숫자의 절대치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총 입장 관객이 6000명 이상인 대규모 공연도 준비해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상대적인 숫자였다.
드림 엔터테인먼트에서 예상했던 광주 관객은 400명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모인 사람들이 그 3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었을까? 888 크루의 매력이 뭐지?’
그녀가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공연장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관객들의 떼창이었다.
공연 시작 전인데 말이다.
-오늘도 비트로 시간 맞춰 출근하지!
공연장에서 공연 전 흥을 띄우기 위해 노래를 트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 노래는 공연진들의 노래일 수도 있었고, 씬에서 핫한 노래일 수도 있었다.
888 Show에서는 888 크루의 노래가 틀어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 랩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후렴뿐만 아니라 벌스 가사까지.
문지연이 놀란 부분은 현재 관객들이 부르는 노래를 그녀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대중문화 트렌드에 민감해야하는 직업이기에 차트 50위까지의 노래는 억지로라도 챙겨듣는데도 말이었다.
아이돌 가수의 열성팬들도 앨범에 있는 모든 곡을 외우진 않는다. 앨범으로 공개하지 않은 곡은 당연히 모른다.
그러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888 크루의 매니아. 유명 곡뿐만 아니라 앨범에 있는 모든 곡을 챙겨듣는 이들. 그리고 그 숫자가 광주에만 천 명이 넘는다는 게 문지연을 놀라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 Verse 26. 888 Show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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