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5. 스타(Star) (完) - [12.03 수정] >
홍경수 팀장이 화들짝 놀랐다가 곧 표정관리를 했다. 그러나 상현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더라고요. 진짜 오경 미디어에서 자신만만했다면 저한테 다이렉트로 의사전달을 했겠죠. 이렇게 제 주변만 들쑤시는 게 아니라. 제 결론은 이겁니다. 지금의 상황은 홍경수 팀장이 책임을 지고 진행하는 플랜 B다.”
사실 뮤지션의 가치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대형 기획사에서 별의별 수단을 다 써서 영입을 제안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오경 미디어가 상현을 일인 레이블 취급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말이었다.
지켜야 될 것을 명확히 설정하니 상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홍 팀장님.”
“이제 과장입니다.”
“홍 과장님. 혹시 이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저를 비롯한 888 크루가 전부 LOC 엔터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한다면 그 구멍 숭숭 뚫린 계획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LOC 엔터에서 이상현 씨를 위해 소송이라도 걸어줄 거라는 생각은 너무 치기어린 생각 아닙니까?”
“소송비용을 제가 부담하면 되지요. 그냥 LOC는 뒤에 서있기만 해주면 됩니다. 저 한 명이면 모르겠지만 888 크루를 제시하면 그 정도는 해줍니다. 원래 두 그룹은 앙숙 아닙니까?”
“……!”
“그럼 결론은 이렇게 납니다. 오경 미디어는 저를 잡지도 못하고, 첫 행보를 거짓말로 점철하게 됩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오경 그룹에서 보상금을 주면서 묻으려고 했던 교통사고에 대한 진실도 세상에 드러나지요. 누구 때문에? 홍경수 팀장, 아니 과장님 때문에요.”
홍경수의 안색이 변했다.
“이제 이야기할 마음이 드십니까? 제가 홍경수 과장님께 제 이미지를 드리겠습니다. 888 크루를 지켜주시겠습니까?”
상현이 쇼 비즈니스를 무너트린 것은 자본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꾸준하고 매력 있는 음악이었다.
오경 미디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888 크루의 음악이 유지된다면 이 또한 지나가는 일이다.
3년 반 동안 상현은 888 크루는 888 크루대로 활동을 하고, 오경 미디어에서는 필요한 것만 취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오경 미디어에는 채대한이 있지? 채대한이 날 알까? 그 사람과 친분을 쌓으면 정말 좋을 텐데.’
상현이 무표정을 짓고 있는데 반해서 홍경수는 매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임 변호사는 상현을 보면서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홍경수가 무식한 패를 들이미니까, 이상현은 더 무식한 패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상현의 패는 무식하면서도 무시무시한 패였다.
‘LOC 엔터테인먼트가 끼어든다면 이상현의 말처럼 흘러갈 가능성이 높지.’
정말 모든 888 크루 멤버가 LOC 엔터로 들어갈 마음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의 끈끈함을 생각해보면 영 불가능한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물론 888 크루는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수틀리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게 중요했다.
치킨 레이스.
홍경수가 먼저 핸들을 꺾을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영리행위에 대한 제약이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협박입니다. 다만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협박이죠. 이제 협상 테이블에 앉으실 준비가 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협상…….”
“계약서 가져오셨습니까?”
그렇게 상현과 홍경수의 기나긴 협상이 시작되었다.
상현은 마냥 거칠게 밀어붙이진 않았다. 언뜻 생각하면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우세는 홍경수 개인에 대한 우세였다.
차선책인 LOC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상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유명해져야하고, 더 많은 아군을 만들어야해. 내가 만약 투팍이나 제이지 같은 거물이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랩스타(Rapstar).
랩을 하는 유명인에게 으레 붙는 수식어가 아닌, 진짜 전설들과 비교할 수 있는 랩 스타, 랩 슈퍼스타가 되어야했다.
홍경수 과장과의 협상은 장장 3시간에 걸쳐서 끝이 났다.
“마지막이군요. 계약 위반 시 제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양쪽 다 계약을 위반할 염두가 안 나게 하시죠.”
“계약 기간 내 활동 수익의 전액을 배상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제 쪽에서만 불리한 조건 아닙니까? 오경 미디어도 배상하기 부담스러운 금액으로 설정해야 형평성이 맞겠죠.”
결과적으로 계약의 형태는 상현에게 많이 유리해졌다. 연습생 계약이라기보다는 외주 작곡가의 계약 형태와 비슷한 조건이 되었다.
우선 상현이 음악을 통해 버는 수익의 세전 35%는 오경 미디어로 귀속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수익은 손대지 않기로 합의했다.
상현의 사외 수익은 888 크루의 전체수익 9분의 1로 결정이 되었지만, 트리플 에잇 같은 굿즈(goods)의 수익은 음악 이외의 수익으로 인정이 되었다.
음악 활동으로 들어가면 상현은 계약기간동안 7곡의 디지털 싱글, 혹은 7곡 이상으로 구성된 앨범을 발매해야 했고, 1년 중 40일은 프로모션 스케쥴에 따를 의무를 지녔다. 다만 음악방송과 라디오 이외의 방송은 출연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따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자잘한 조건들은 더 있었다. 계약기간 내 오경 미디어 주최 콘서트 4회, 화보촬영 6회와 광고촬영 3회, 행사 참여 15회 등등의 조건이었다.
물론 오경 미디어의 활동으로 발생하는 수입은 상현에게 정산이 되었다. 그것도 소속 가수들의 평균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정산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상현에게는 투자비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계약금은 새로 지급될 예정이었다. 전부 조건부 계약인 것을 생각하면 꽤 큰돈이 책정되었다.
오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계약을 살펴보면 상현에게 꽤 큰 이득이 되는 계약이었다. 888 크루로 활동하는 것에도 지장이 없는 계약이었다.
반대로 오경 미디어는 회사의 방향성과 색깔을 단숨에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계약이었다.
그동안 줄기차게 메이저 소속사의 러브콜을 거절해온 이상현이 새로 출범한 오경 미디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꽤 유의미한 선전이 될 수 있었다.
윈윈전략이라고 생각했는지 협상을 끝낸 홍경수 과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방식은 보통 미국의 메이저 레이블 계약이나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채택하는 방법인데……. 법무 팀과 A&R팀에서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홍경수 팀장님의 무능을 저한테까지 증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정도는 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정도도 안 되는 사람한테 낚인 제가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상현의 대답에는 일말의 호의도 섞여있지 않았다. 혐오가 뚝뚝 떨어지는 상현의 날선 대답에 홍경수 과장은 불현듯 화가 나서 입을 열었다.
이상현에게 제공된 편의는 엄청난 특혜였다. 이 정도로 굽혀준 채 계약이 진행됐으면 좀 웃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오경 미디어를 싫어하십니까? 이상현 씨는 음악으로서 먹고 사는 사람 아닙니까? 오경 미디어는 소속 가수를 스타로 키우고, 좋은 대우해주기로 유명한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이상현 씨! 말이 심하……!”
“스타? 대우? 내가 그걸 원했다고? 오경 미디어가 내 턱에 칼을 들이대고 계약을 종용한 걸 잊었습니까? 이 협상이 자발적으로 진행됐습니까? 아니면 제가 칼을 드니까 진행됐습니까?”
“…….”
“오경 미디어가 나한테 888 크루와 오경 미디어의 공동비전을 제시하고 영입을 제안 했습니까? 삼고초려라도 했습니까?”
상현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의미가 되어서 홍경수의 귀로 파고들었다. 홍경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런 홍경수의 귀로 마지막 상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경 미디어가 나한테 퍼부은 건 폭력이고, 난 절대로 그걸 잊을 생각이 없습니다. 귓구멍 씻고 잘 들으시죠. 홍경수 씨는 오늘 있었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상현이 계약서를 던졌다.
“단 한 조항이라도 빠지면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하겠습니다. 차후 진행사항은 임 변호사님과 이야기하시죠.”
상현은 그렇게 일식집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지켜야할, 그리고 지키고 싶은 최우선의 가치는 지켜냈지만 그렇다고 유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분은 홍경수 역시 느끼게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자신 있었다.
홍경수는 자신을 얕봤다. 그가 승리의 달콤함에 고취되어있는 사이, 상현은 몰래 지뢰를 심어놓았다.
‘그러고 보면 차인현도 오경 엔터였지.’
상현은 차인현과 오경 미디어, 둘 중 누가 먼저 지뢰를 터트릴 지를 겨울바람 속에서 생각했다.
결론은 같았다. 누가 먼저 터트려도 상관없었고, 최상의 시나리오는 동시에 터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상현은 오경 미디어의 소속이 되었다.
랩스타를 꿈꾸는 뮤지션이 가짜 스타들이 즐비한 쇼 비즈니스로 뛰어들게 되었고, 그것이 가져올 파문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
상현이 오경 미디어 소속이 된 것은 888 크루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침내 그들이 광주의 보금자리를 벗어나 서울로 이동할 계기가 된 것이었다.
상미와 하연은 본래 3월부터 학업을 위해 서울로 이동할 예정이었고, 우민호, 김환, 오민지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이들이었다.
이제 상현까지 서울로 이동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888 크루는 근거지를 서울로 이동시키는 게 훨씬 편해졌다. 광주의 작업실이 사라지는 것도 큰 의미를 지녔다.
상현은 상미와 같은 학교인 서울예고로 편입절차가 진행되었다. 사실 고3이 예고로 편입하는 일은 흔한 경우가 아니었고, 그 흔하지 않은 경우의 대부분은 예고에서 예고로 편입하는 경우였다.
상현처럼 고3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명문 사립 예고로 편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일이 가능하게된 것은 편입생이 ‘이상현’이라는 예고 입장에서 탐이 날 수밖에 없는 대어라는 점과, 서울예고의 지원금 대부분이 오경 그룹에서 나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서울예고의 이사장은 오경 그룹의 입김이 닿는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준형의 부모님은 상현의 이야기를 듣고는 준형의 서울 전학을 먼저 제안하셨다. 고3때 전학을 가서 적응하는 게 힘들지 않다면, 서울로 올라가서 크루와 함께 음악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준형은 당연히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상현은 오경 미디어에 강력한 요구를 했고, 결국 준형도 예고로 편입이 결정되었다. 순식간에 서울예고에 888 크루 3명이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상미는 기숙사 입주를 포기했고, 준형과 상현, 상미는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작업실은 집 안에 만들 것인지 아니면 작업실용 공간을 따로 얻을 것인지는 고민 중에 있었다.
그렇게 888 크루의 7명이 서울로 이동 준비하는 사이, 인혁은 침묵을 유지했다. 멤버들이 수차례 인혁을 설득했지만 그는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멤버들은 인혁이 결국은 그들을 선택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888 크루는 8명이서 함께해야지 888 크루였다. 상현이 순순히 오경 미디어에 소속된 가장 큰 이유도 888 크루라는 단체의 흐름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혁이 내린 결정은 보류였다.
“얘들아, 나한테 일 년만 시간을 줄래?”
“일 년……?”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 음악 할 때는 진짜 목숨 걸고 하잖아. 밤새는 건 아무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머릿속이 음악으로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어려울 정도잖아. 완전히 미친놈 마냥.”
인혁이 담담히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그런데 내가 공부를 할 때는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더라고. 밤샘은 고사하고 최선을 다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아.”
“형.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수 있는 분야를 적성이라고 말하고, 천직이라고 여겨요. 형이 지금까지 공부에 하지 못했던 전력을 음악에 기울일 수 있다면, 그건 음악이 형이 천직인 거예요.”
“크, 상현이가 멘트가 참 좋아.”
“나도 상현이가 한말이 맞다고 생각해.”
민호와 김환의 말에 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근데 사람은 각자 상황이란 게 있고, 생각이란 게 있잖아. 1년 동안 죽어라 공부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나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크루원들 앞에서 부모님의 허물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자세한 말은 삼갔지만, 인혁은 지금 음악을 선택하면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부모님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어진다.
1년이란 시간은 확신이 얻는 시간이었고 부모님을 설득하는 시간이었다.
“그럼 형 하나만 약속해요. 일 년 뒤에는 스스로한테 거짓말하지 말아요. 공부하다가 답이 안 나오면 서울로 오라고요. 집 큰 거 구해놓을 테니까.”
“아니, 근데 나 서울 투어까지는 하는데 왜 벌써 떠나는 사람 취급 하냐?”
“아, 몰라.”
상현이 보기 드물게 짜증을 내자 인혁이 웃었다. 누가 뭐래도 상현과 준형은 참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888 크루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뭘 하고 있었을까?
상현과 준형이 환하게 빛나는 태양이라면 그는 태양을 맴도는 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멀리서보면 태양만 밝을 수도 있겠지만, 막상 사람이 사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떨어진 별이니까.
‘아니, 근데 실력으로 따지면 내가 수성 아니야? 얘들 다음에는 내가 탑 먹는 거 같은데?’
인혁은 래퍼다운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2월 17일의 888 Show 광주 공연 날이 밝았다.
< Verse 25. 스타(Star) (完) - [12.03 수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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