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5. 스타(Star) >
Verse 25. 스타
AIMMF 이후 소소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동안 888 크루는 10대와 20대, 그리고 힙합 문화를 사랑하는 소수의 30대에게만 어필하는 팀이었다. 10대와 20대 중에서도 888 크루의 음악은 즐겨듣지만 888 크루란 팀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도 제법 존재했다.
물론 힙합 더 바이브는 그야말로 빅 히트를 쳤지만, 2005년의 케이블 채널은 2010년 이후의 케이블 채널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매체는 아니었다. 방송계에서는 2009년의 슈퍼스타 K 이후부터 케이블 채널이 공중파 못지않은 문화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고 평가하곤 했다.
게다가 888 크루가 뛰어든 힙합 문화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힙합 문화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미지 메이킹 된 갱스터 래퍼와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888 크루가 시간을 앞당겼다고는 하지만, 본래 이러한 힙합 문화가 진정한 의미의 주류로 올라서는 것은 2014년이 지나야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뉴스’와 ‘신문’이라는 전달매체는, 888 크루가 그동안 커버하지 못했던 분야에 그들의 이름을 알리게 해줬다.
최학림 시인의 메이저 신문 사설과 CBC 방송국의 뉴스데스크에서 888 크루를 긍정적으로 조명했기 때문이었다.
힙합엘이 게시판에서는 한동안 888 크루가 ‘얼마나 유명한지’에 대해서 이런저런 갑론을박이 오가기도 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힙합을 좋아하다 못해 커뮤니티까지 찾아온 사람들이니까 888 크루가 엄청 유명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음. 당장 우리 엄마만 해도 888 크루란 팀 자체를 모르는데.
-제 주변에는 888 크루 모르는 사람 없는데요?
-몇 살인데요.
-고1이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나 유명하지. 당장 대학로만가도 술집에서 888 크루 노래 나온 적이 없었음.
-이 새끼는 뭐라는 거냐. 그거야 당연히 888 크루가 음원등록을 안했으니까 안 나오지.
-몇 곡 하지 않았나요? 음원 사이트에서 봤던 것 같은데.
-그건 파티 플레이 트랙이 아니잖아요. 님은 술집에서 ‘움직여야지’ 듣고 싶음? 그 노래 들으면 왠지 공부해야될 거 같던데.
-맞아. 그 노래들으면 왠지 움직여야 될 거 같음. 놀면 안 될 거 같아.
-우리학교 밥 먹을 때 그 노래 나온다. 방송부 미친 새끼들이 자꾸 그 노래 튼다. 이제 수능도 1년 남았는데 개빡친다.
-그리고 너의 수능대박은 데이드림이 되겠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강남 클럽 쪽에서 와이커밍은 가끔 플레이 됨. 근데 꼭 디제이들이 와이커밍이랑 린킨 파크 노래랑 섞어 틀더라. 엄밀히 따지면 두 음악은 장르가 다른데.
-뭐가 달라요? 똑같지 않음?
-주 장르가 다르죠. 와이커밍은 랩 메탈이고, 린킨 파크는 메탈에 랩 장치가 된 걸로 봐야함.
-근데 확실한 건 888 크루는 일반적인 언더그라운드 팀은 아니에요. 일단 888 크루는 광주 사람들이나 야구팬들이 되게 많이 알아요. 나이가 좀 있는 분들도요. 일반 힙합 팀들이 힙합 팬들만 뜯어먹고 산다면 888 크루는 시장이 훨씬 넓은 집단이죠. 힙합 더 바이브 덕분에 그 시장은 더욱 넓어졌고요.
-근데 니들 되게 웃긴 거 아냐. 888 크루가 음악을 5년을 했냐? 아님 10년을 했냐? 이제 1년 했는데 얼마나 유명한지 따지는 게 의미가 있나? ‘점점 유명해지는 중’이게 정답 아냐?
-맞아요. 유명해지는 중이죠. 정확히 표현하면 비 힙합 팬들한테까지 이름을 알리는 중. 저희 아버지도 얼마 전에 뉴스보시다가 888 크루보고 쟤네 중국 가수들이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중국은 8자가 들어간 가수들이 엄청 많다고 하면서.
-원래 중국에서 8이 길한 숫자라서 그래요. 8이란 숫자 발음이 돈 벌다라는 발음과 같아요. 그래서 가격을 88, 888위엔으로 해놓으면 구두쇠 아줌마들도 가격을 안 깎곤 하죠.
-근데 저는 888 크루가 안 유명해지면 좋겠어요. 왠지 좀 뺏기는 기분이 들어요.
-한 가지 확실한 건 888 크루는 유명한 걸 떠나서 되게 매력 어필을 잘하는 팀인 것 같아요. 팬들 충성도가 높다고 해야 되나?
-AIMMF가서 888 크루 버스킹 봤으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진짜 그날 공연은 전설이었음. 개강하고 친구들한테 자랑할 거 생각하면 벌써 신남.
-버스킹 보셨음? 존나 재밌었다던데.
-그날 다 미쳤어요. 가수 대 팬이 아니라 무슨 친구들 모인 것처럼 놀았음. 나중에는 888 크루가 가이드라인 쳐 놓은 수레도 치워버렸는데 AIMMF 안전요원들이 위험하다고 짜증나게 하고.
-거기서 같이 놀다가 눈 맞은 사람들도 꽤 많았어요. 부대껴서 놀다보니 호감 생기고 번호 따고 막 그런 사람들.
-님도 오셨나 봐요? 완전 재밌었죠.
-재밌긴 한데 저는 돈을 너무 많이 썼어요.
-무슨 돈이요? 공연 공짜였잖아요.
-2004년에 어셔가 인기가요에 나왔더라고요…….
Real Hiphop 888 st공연이 가져온 변화는 외부적인 인지도뿐만이 아니었다. 888 크루는 AIMMF 공연 덕분에 최학림 시인이 주최하는 ‘시와 랩’이라는 공연에 초청되기도 했다.
시와 랩은 종로구에 있는 큰 전시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공연을 위해 최학림 시인이 쓴 시에 살을 붙여 랩으로 만들고, 888 크루의 랩을 최학림 시인이 시로 만드는 과정은 꽤나 재미있었다. 또한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음악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었다.
“여기서 신하연 양이 ‘Start Line은 절대 똑같지 않아’라는 가사를 썼잖아요?”
“네.”
“왜 스타트 라인이라고 영어로 쓰셨어요? 출발선이라고 쓰지 않고?”
최학림 시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하연이 답했다.
“그게 ‘스타트 라인’은 5음절이고 ‘출발선’은 3음절이잖아요. 비트에 랩을 맞추려니 3음절은 너무 짧아서요.”
“저는 음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시 낭송회를 할 때도 이 단어를 얼마의 길이로 읽을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단어 자체를 바꾸는 일은 없죠. 그냥 2음절만큼을 쉬고 출발선이라는 한글로 쓰면 안 되나요? 어차피 2음절이라고 해봐야 0.5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아닌가요?”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말씀하신 바도 맞는데요, 스타트라인은 그 자체로도 랩 스킬이 가미된 단어거든요. 스타-트라-인은 절대 똑같-지 않-아-. 이렇게 ‘ㅏ’ 모음에 강세를 주는 거죠.”
최학림은 집요하게 888 크루의 가사를 파고들었다. 그의 질문에는 랩 가사를 소리가 아닌 글로 생각하다보니 음악성이 결여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날카로운 질문들도 꽤나 많았다.
888 크루는 최학림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최학림 시인은 랩이란 장르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시는 읽히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무게를 두는 예술이지만 랩은 보이는 것보다 읽히는 게 더 중요한 예술이었다. 이러한 두 장르의 차이를 이해해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888 크루가 ‘시와 랩’ 공연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사이, 쇼 비즈니스는 꽤 거친 홍역을 겪고 있었다.
-도 넘은 언론사의 노이즈 마케팅.
-판매부수에 팔린 언론인의 양심.
-거대 자본에 잠식당한 언론사.
쇼 비즈니스에 대한 공격은 동종업계 경쟁업체인 킨들러 코리아 쪽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AIMMF 행사장에서 888 크루와 쇼 비즈니스의 이야기를 접한 기자들은 많았지만, 섣불리 기사는 나지 않고 있었다. 쇼 비즈니스의 모그룹인 오경 그룹의 파워가 두려워 기자들이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킨들러 코리아 쪽에서 집중 공격을 시작하자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쇼 비즈니스에 대한 성토를 시작했다.
-찌라시가 되어가는 언론사.
-메이저 잡지사의 매출경쟁.
888 크루 외에도 피해자들은 많았고, 그러한 피해자들의 인터뷰가 뒤늦게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그들의 억울함이 수면 위로 부각되지 않은 것은 피해자들이 대응할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888 크루는 힘이 없던 시절에도 ‘퍽 더 쇼 비즈’를 통해 아주 적극적인 의사표명을 했고, 이러한 의사표명은 888 크루가 유명해지면서 같이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쓰레기들이네. 888 크루가 실력이 엄청나니까 살아남은 거지, 하마터면 쇼 비즈니스 때문에 없어질 뻔했네.
-솔직히 요즘 언론사랑 찌라시랑 차이가 뭐냐.
-정확히 888 크루가 어느 부분이 억울하다는 거임?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퍽 더 쇼 비즈 들어보세요.
-괜히 투팍 형님과 비기 형님의 디스전이 동서부의 총격전으로 바뀐 게 아니다. 힙합 하는 애들은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쇼 비즈니스가 몰랐네.
한국 네티즌들은 뜨겁게 달아오를 때는 아주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들이었다. 기사에는 엄청난 수의 댓글이 달렸고, 888 크루를 지지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Fuck Tha Show Biz'의 플레이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400만을 돌파했고, 위젯을 제공하는 미디어 앰플 사는 깜짝 놀라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상현에게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쇼 비즈니스의 게시판은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이상한데?’
888 크루 멤버들은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쇼 비즈니스가 벌을 받았다고 기뻐했지만 상현이 보기에는 좀 이상했다.
솔직히 킨들러 코리아가 공격을 한 시점에 오경 그룹이 마음먹고 압박을 넣었다면 이슈가 될 수가 없었다. 킨들러 코리아는 오경 그룹과 비교하면 먼지나 다름없는 회사였다. 애초에 킨들러 코리아가 공격을 한 것부터가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에 기사가 떴다. 문제를 일으킨 쇼 비즈니스의 임원 일부를 해임하고 관련자들을 징계함과 동시에, 쇼 비즈니스가 오경 엔터로 완전 흡수가 된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오경 엔터에서 덩치가 가장 큰 미디어 콘텐츠 부서는 오경 Media로 계열사 분리가 이루어졌다.
‘그럼 그렇지. 킨들러 코리아가 오경 그룹의 사내 정치에 이용된 거였네.’
오경 엔터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언론인의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엄격한 사내 규율을 적용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엄청난 노이즈가 일어났던 쇼 비즈니스는 오경 엔터로 흡수됐고, 그 노이즈의 반대급부는 오경 엔터의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상현은 그쪽 세계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만 기쁠 뿐이었다. 황주철 편집장은 퇴사를 고려할 만큼의 엄청난 징계를 먹었고, 인터뷰를 컨펌한 사장이 해임되었기 때문이었다.
황 편집장이 인터뷰를 조작할 당시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결국 벌어진 것이었다.
만약 상현이 모든 사업적 수완과 미래의 기억이라는 능력을 발휘해 쇼 비즈니스를 공격했다면? 아마도 지금과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과거와 비슷한 삶을 살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상현은 음악을 했고, 영향력을 높였고, 오직 음악으로 복수를 이뤄냈다. 오경 그룹의 정치 싸움이 개입된 것은 틀림없지만, 888 크루가 끝까지 쇼 비즈니스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황 편집장이나 쇼 비즈니스의 사장이 죗값을 치루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오직 음악으로 이루어낸 결과.’
한결 홀가분해진 888 크루는 가벼운 마음으로 888 Show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 888 투어의 시작인 2월 17일 광주 공연이 채 열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이 하연의 대학 합격 발표가 났고, 상미의 중학교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꺄아아아악!
-888 크루다!!
7명의 멤버들은 당연히 꽃다발을 사들고 상미의 졸업식을 찾아갔고, 졸업식장은 난리가 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엄청난 수의 기자들도 몰려있었다.
“뭔 기자가 이렇게 많아?”
“몰라? 좀 많긴 하다.”
“으어, 피곤해.”
그러나 888 크루의 8명은 마냥 피곤할 뿐이었다. 어제도 거의 밤을 새다시피 공연 연습에 매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888 크루에게 몇몇 기자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어진 기자들의 질문에, 상현을 비롯한 멤버들의 잠은 완전히 사라졌다.
“오늘 아침 오경 미디어에서 이상현 씨와 계약을 맺었다는 공식 발표를 했는데요.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밤새 공연을 준비를 하고, 상미의 졸업식에 참여하느라 볼 시간이 없었던 인터넷 포탈.
포탈에는 하나의 기사가 도배되어 있었다.
-888 크루의 이상현! 오경 미디어에 둥지를 틀다.
< Verse 25. 스타(Star)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