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66화 (166/309)

< Verse 24. 2006년 >

***

시인 겸 메이저 신문사의 문화칼럼리스트인 최한림은 ‘LOC 그룹의 월디페’와 ‘오경 그룹의 AIMMF’를 비교하기 위해 용인을 찾았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두 자본이 인디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 이것이 이번 칼럼의 주제였다.

그런 그가 888 크루의 공연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홍보 중 주변 버스커들을 배려하는 888 크루의 모습 때문이었다.

사실 최한림 시인은 랩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인의 입장에서 한국어와 영어가 마구 혼용되고, 욕설이 섞이는 랩을 좋아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문화칼럼리스트란 직업 탓에 화제성 높은 TV 프로그램은 챙겨보는 편임에도 힙합 더 바이브를 끝내보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888 크루의 공연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느꼈다.

‘내가 일부에 대한 편견을 문화 전체로 일반화시키고 있었구나.’

888 크루의 공연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부 래퍼들의 행동을 모든 래퍼들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치부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인혁이란 친구의 어슬렁으로 시작한 888 크루의 공연은 정말 굉장했다. 실력을 떠나서 8명이 똘똘 뭉쳐서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버스킹에 천여 명의 사람이 몰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하지만 정작 최학림 시인이 깊게 몰입한 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888 크루의 가사였다.

‘문학성이 있어.’

888 크루는 3-5곡을 부른 뒤에 버스커들을 초청하는 식으로 공연을 진행했다. 물론 계속 신나는 곡을 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시간의 공연에는 완급조절이란 게 필요했고, 888 크루는 그 완급조절에 버스커들에게 맡겼다.

필요와 호의가 섞인 공생관계.

‘저 팀의 리더가 누구지?’

최학림 시인은 888 크루의 운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네? 저, 저희는 이런 신나는 분위기에 어울릴만한 곡이 없는데요. 어, 어쿠스틱 팀이라서.”

“괜찮아요. 편하게 부르고 싶으신 노래하시면 되요. 다음곡 분위기를 저희가 맞출 거니까요.”

버스커들의 서정적인 노래가 끝나면 888 크루 역시 잔잔한 랩을 공연했다. 이러한 888 크루의 감성곡들은 신나는 곡들 못지않게 큰 호응을 받았다.

관객들은 888 크루의 감성곡을 특별하게 느꼈다.

겨울밤의 한적한 장소.

소음하나 들리지 않는 고립된 곳.

그곳에서 아무 걱정 없는 듯 신나게 놀던 친구가 갑자기 진지한 속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본래 비밀 이야기란 깊은 유대감을 주기 마련이었다.

그때 하연의 벌스로 두드림이라는 곡이 시작되었다.

두드림(Do Dream).

문을 두드린다는 한글 의미와 꿈을 행한다는 영어의 의미가 절묘하게 섞인 제목.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래서 영어와 한글을 섞는 건가?’

그렇게 최학림 시인이 ‘시와 랩’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888 크루를 섭외하게 되는 일의 시작이 될, 두드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가 지금 부를 곡은 부틀렉 0.5에 수록된 두드림이라는 곡입니다. 원래는 셋이서 부르는 곡인데, 어쩌다보니 대학입시를 위해 만든 솔로 버전으로 부르게 되었네요.”

하연의 목소리가 겨울공기를 타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앞선 뮤지션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멋지게 불러서 그런지 몰라도, 분위기가 굉장히 잔잔했다.

관객들이 환호가 아닌 박수를 보냈다.

“이곡은 밴드 L&S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민식 오빠가 기타를 쳐줬고요, L&S의 보컬 미주 언니가 키보드를 쳐줬습니다. 두 분이 자리에 안 계셔서 녹음된 반주로 진행하는 게 조금 아쉽네요.”

스탠드에 편하게 앉은 하연이 민호에게 비트를 틀어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오늘의 스피커는 화면 없이 USB의 파일 순서로만 비트를 고르는 형태였는데, 민호는 50개에 가까운 비트 순서를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일이 하나씩 들어봐야 했을 것이었다.

민호의 숨은 노력 덕분에, 잔잔한 기타소리가 스피커를 흐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서브 기타와 키보드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따뜻한 질감의 연주였지만, 그 속에는 묘한 씁쓸함이 숨어있었다. 스트럼 주법이 어울리는 부분까지 아르페지오 주법으로 치며 사운드를 중첩시킨 느낌이 더욱 그랬다.

특별히 화려한 연주도 아니었고, 특별히 세련된 코드 진행도 아니었다. 그러나 부족함 없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기타와 키보드는 하연의 목소리가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도록 차분히 연주를 이끌어갔다.

그 사이로 하연의 후렴구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꿈을 향해 노크 중

오늘도 내일 향해 노크 중

오늘도 하늘 향해 노크 중

오늘도 나를 향해 노크 중

‘노크 중’이라는 후렴 뒤에 문을 두드리는 듯한 ‘똑똑’ 소리가 들렸다. 단순하지만 곡에 몰입을 만드는 장치였다.

상현은 일전에 하연의 랩을 듣고 ‘눈으로 그려지는 듯한 묘사’를 한다고 평한 적이 있었다. 이 곡은 그러한 묘사력이 절정에 다다른 곡이었다.

관객들은 작고 어린 여자아이가 아주 커다란 밤색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언뜻 떠올랐다.

하연의 랩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꿈을 향해 노크 중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연습들

그동안 잡아왔던, 셀 수 없는 마이크들

내 뿌리를, 공격했던 태풍들

하연이 연예인이 되려는 이유는 자신을 ‘짐’으로 취급하는 집안 어른들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하연은 ‘뿌리’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빠와 자신은 피가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음악, 그리고 또 음악 밖에 없었다. 두드림은 그러한 그녀의 심정을 담고 있는 곡이었다.

성공의 문고리는 여전히 잘 안 열리고 빡빡해

게다가 비좁지, 해진 길거리는 캄캄해

문틈 사이로 환한 빛이 새나오는데

열어 달라 외치느라 내 목은 또 칼칼해

최학림 시인은 하연의 랩을 들으면서 자꾸 어떤 그림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그림인지를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성냥팔이 소녀.’

유명한 동화 화가가 그린 그림이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해진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면서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을 보고 있는 그림.

내가 잡으려는 기회

그건 아마 문을 두드린 횟수에 비례

누군가 안에서- 열어주지 않는다면

난 더 세게 두드려 문을 부숴버릴게-

랩의 느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시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하연은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문 앞에서 절망해도 계속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었다.

계속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다면, 더 세게 두드려 문을 부숴버리겠다.

이것이 두드림이란 제목의 진정한 의미였다.

그리고 그녀는 문을 부수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점은 함께 부숴주는 친구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Start Line은 결코 똑같지 않아

실패는 성공의 범위에 속하지 않아

패배에서 배운다고 하지 마,

난 패배를 부정하고 다시 할 테니까

그리고 또 문을 두드려.

‘패배에서 배운다고 하지 마. 패배를 부정하고 할 테니까.’

곱씹을수록 깊이가 있는 가사였다.

마침내 최학림 시인이 시와 랩을 연결 지어 생각하기 시작했고, 관객들은 신하연이란 ‘사람’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브라운관을 통해, 저 높은 무대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가수가 아니라 생각과 고민을 가진 보통 사람.

오늘도 꿈을 향해 노크 중

오늘도 내일 향해 노크 중

오늘도 하늘 향해 노크 중

오늘도 나를 향해 노크 중

하연의 랩에 몰입해있던 관객들 중 누군가가 ‘노크 중’ 뒤에 혀를 튕기며 ‘똑똑’이라는 소리를 덧붙였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해봤을 시계소리를 내는 방식이었다.

모든 관객들이 그 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연의 목소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침묵하고 있던 관객들이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박자에 맞춰 같은 소리를 내자, 굉장한 울림이 느껴졌다.

그 모습은 좋은 그림을 따기 위해 거치해놨던 CBC의 카메라에 제대로 잡혔다.

‘뉴스 프레임으로 잘라 붙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장면들이야. 다큐멘터리 포맷이라면 정말 완벽한 그림인데…… 한 번 말해봐?’

훌륭한 예술은 자생력을 갖는다고들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888 크루의 음악은 굉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과 다르지 않았다.

오늘도 꿈을 향해 노크 중

오늘도 내일 향해 노크 중

오늘도 하늘 향해 노크 중

오늘도 나를 향해 노크 중

최학림 시인은 888 크루의 공연을 보면서 며칠 내로 작성할 칼럼의 제목을 생각해낼 수 있다.

bhudh-sko

= 진정한 인디펜던트가 거대 자본을 이기다.

bhudh-sko는 busk란 단어의 어원인 인도유럽어로써, ‘이기다, 정복하다’의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최학림은 거대 자본이 투입된 LOC의 월디페나 오경 그룹의 AIMMF보다, 888 크루의 버스킹이 인디펜던트 문화에 더 큰 생명력을 주었다고 평가하는 것이었다.

***

상현은 공연을 홍보할 때 오늘의 버스킹은 정해진 플레이 타임이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2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충동적인 공연이라는 걸 고려해보면 2시간도 긴듯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된 공연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열린 마음의 천여 명의 관객들과 버스커들이 공연에 합류하자, 공연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888 크루 - 버스커 - 888 크루의 반복.

분위기가 고조되고, 가라앉고의 반복.

언뜻 생각하면 망한 공연의 흐름처럼 생각될 수도 있었다. 보통의 공연이 천천히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최고점을 찍었다가 여운과 울림을 남기며 끝맺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보통의 공연이 아니었다.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는 순수한 그들만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한 겨울의 콘서트는 마력이 있었다.

“어우,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 같네요? 서브 스테이지 공연 보고 오셨어요?”

“재미없어요!”

“재미없다뇨. 거기 있는 뮤지션 분들도 전부 엄청 잘하시는 분들인데.”

“888 크루 나오는지 알고 간 거예요!”

공연장을 떠나는 이들은 거의 없고, 합류하는 이들만 점차 늘어났다. 어느새 관객들은 천 명을 훌쩍 넘어 천이백 명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공연이 시작하고 1시간 쯤 뒤에 AIMMF 행사장 쪽에서 폭죽이 터졌을 때 반응도 재미있었다.

“어? 벌써 일곱 시네요? 폭죽 터지는 거 보니까 메인 스테이지 공연 시작했나본데 안 가세요?”

민호가 와이커밍 비트를 찾는 사이, 관객들과 농담을 나누고 있던 인혁이 말했다. 그제야 시계를 확인한 꽤 많은 관객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는 코트를 반쯤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왜 돌아오세요?”

“아…… 나 진짜 어셔 팬인데!”

오늘 메인 스테이지의 하이라이트를 책임지는 가수는 그 유명한 어셔(Usher)였다.

인혁이 어셔 팬이라는 30대 중반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가서 보셔야죠.”

“메인 스테이지 공연은 언젠간 또 볼 기회가 있을 거 같은데, 여긴 아닐 거 같아서요. 아니, 뭐 888 크루도 볼 기회는 있겠지만, 지금 이 장소에서 받는 느낌은 평생 못 느낄 것 같네요.”

“우와, 형님 말 잘하시네요. 근데 어셔는 2004년에 인기가요에도 나왔잖아요. 그거 재방송 보세요.”

인혁이 한동안 방송계의 미스터리로 떠돌았던 어셔의 SBS 인기가요 출연을 입에 담았다.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을 잘 안보는 올드 팬인지, 30대 중반의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인혁과 설전을 벌였다.

남자는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장난치지 말라고 말했고, 인혁은 진짜라고 답답해했다. 몇몇 관객들이 진짜라고 말했지만 남자는 절대 안 믿었다. 사실 나이가 좀 있는 관객들 중에서는 안 믿는 사람이 더 많았다.

“우와, 이 형님 고집이 장난이 아닌데? 내기? 내기?”

“오케이. 얼마 걸고 할까요?”

“돈은 됐고 지면 저희 앨범 열장 사서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주기!”

“제가 이기면요?”

“그럼 제가 앨범 삼십 장 드릴게요.”

“콜!”

“핸드폰 번호부터 교환하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결국 인혁은 진짜로 핸드폰 번호까지 교환했다. 상현이 기가 막혀서 무슨 내기냐고 만류했지만 불붙은 두 남자의 고집은 결과를 보기 전에는 꺾이지 않을 듯했다.

관객들은 너무 재밌어하면서 결과를 꼭 888 크루 싸이월드 클럽에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처럼 온갖 헤프닝이 벌어진 888 크루의 공연은 3시간을 훌쩍 지나, 4시간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 라이브 연습이 좀 부족한 곡을 제외하면 완벽히 부를 수 있는 곡은 거의 다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부르지 않은 곡이 하나 있었다.

바로 퍽 더 쇼 비즈였다.

< Verse 24. 2006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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