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4. 2006년 >
***
거대한 규모의 용인 AIMMF의 행사장은 두 가지 장르의 예술이 섞여있는 네버랜드였다. 두 가지 장르란, 행사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와 음악이었다.
AIMMF 행사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건물은 최대 2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영화상영관이었다.
제 1 상영관이라 불리는 메인 상영관에서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큰 흥행을 기록했던 한·중·일의 영화가 24시간 상영되고 있었다.
이런 메인 상영관 주변에는 다양한 크기의 독립영화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최소 30명부터 최대 8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20개의 부스는 각각의 컨셉에 맞는 독립 영화를 상영하며 관광객들을 유혹했다.
메인 상영관 뒤에는 메인 스테이지기 있었다.
4천명의 스탠딩 관람이 가능한 거대한 규모의 메인스테이지는, 3일간의 행사기간 동안 다양한 메인스트림 가수들이 그들의 음악을 뽐낼 장소였다.
그렇다면 인디펜던트 뮤지션들은 어디에 있을까?
인디펜던트 음악가들은 특정한 장소에 고정되지 않았다.
Everywhere.
그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물론 인디펜던트 음악가들 중에서 AIMMF의 초청을 받은 이들은 서브 스테이지에서 공연을 펼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초청 받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보다 초청 받지 못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그들은 행사장 곳곳에 자리를 잡고 버스킹을 시작했다.
벤치, 주차장, 독립영화 부스 옆.
관람객들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뮤지션들이 존재했다.
누군가는 기타하나만 들고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이동식 스피커로 비트박스를 선보였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격렬한 비보잉을 선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이 같은 버스킹은 AIMMF에서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후원하는 일이었다. 행사장 곳곳에는 버스킹에 사용할 수 있는 플러그가 배치되어 있었고, 주최 측에 버스킹을 신청하면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제공받는다던지, 담요와 이동식 스피커를 무료로 대여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AIMMF는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로 많은 호평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버스킹 프로젝트’가 평이 좋았다. 평론가들은 메인스트림과 인디 문화의 절묘한 조화라며 박수를 쳤고, AIMMF 주최 측은 어깨를 쭉 펴고 잘난 체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가 발생한 것은 행사 이틀 차였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888 크루가 라인업에서 빠졌다고? 설마 메인이 아니라 서브 스테이지에 세웠다고 그런 거야?”
“그건 아닙니다. 공연 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터뷰 업체인 쇼 비즈니스사와 트러블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 888 크루한테 자필로 받은 계약파기 사유서입니다.”
사유서를 읽어본 AIMMF 집행부 팀장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홍보 카피에 888 크루 이름 들어갔지? 크게?”
“네.”
“그럼 뒷말 나올 수도 있겠는데? 하…… 이거 참.”
“저, 팀장님. 그런데 888 크루가 버스킹 신청을 했습니다.”
“버스킹이라니 무슨 소리야? 위약금 내고 공연해주겠다고? 그냥 팬들에게 내세울 면피용 아니야?”
“면피용은 아닌 듯합니다. 스피커도 외부에서 공수해오고, 꽤 크게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흠, 그럼 문제없네.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버스커로 참여했다! 라고 인터뷰 하나 따면 참 좋겠는데……. 아무튼 888 자식들 예의는 있네? 의리가 있는 건가?”
팀장이 표정을 풀었다. 홍보 카피에 등장한 이상 아예 공연을 안 하면 허위광고로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버스킹이라도 실시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팀장님,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 무슨 문제?”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는 것 같습니다.”
“많이 몰리면 좋지 뭐.”
“너무 많이 몰리고 있습니다.”
팀장이 인상을 썼다.
“왜? 안전사고 발생할 거 같아? 그럼 안전요원 투입해. 강 대리, 그것까지 내가 지시해야 해?”
“팀장님. 지금 888 크루는 걸어 다니는 서브 스테이지입니다. 안전 요원을 투입한다면 서브 스테이지에 배정된 인원 전체를 투입해야 합니다.”
“뭐?”
AIMMF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는, 888 크루가 버스킹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
AIMMF의 메인 스테이지 공연은 19시에 시작될 예정이었고, 서브 스테이지 공연은 17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때문에 오늘 공연을 보기 위해 용인 AIMMF를 찾은 관람객들은 17시와 19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들의 머릿속에는 18시라는 새로운 시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888 크루의 버스킹이 18시에 시작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수레를 끄는 한 남자가 있었다.
사내는 구슬땀을 흘리며 무거운 수레를 끌었다.
한 겨울임에도 땀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사내는 힘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를 믿고 따르는 가족들의 눈빛을 보면 항상 힘이 나…….
"힘이 나긴 개뿔! 교체하자고!"
"아, 형 이제 십 분 밀었어요! 제가 삼십 분 밀었거든요!"
"이거 너무 무거워!"
"민호 형 보세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밀잖아요. 얼마나 듬직해요?"
"쟤는 카메라로 단련된 근육이 있잖아……. 민호는 육체파고 나는 두뇌파란 말이야……."
인혁이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수레를 밀었다.
만담(?)을 보는 것 같은 광경에 888 크루를 따라다니던 팬들이 마구 웃었으며 카메라를 놀려댔다.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땀 흘리니 완전 섹시!"
인혁과 민호가 밀고 있는 수레의 정체는 한 수레에 2대씩, 총 4대의 스피커가 담긴 오늘의 홍보수단이었다.
여러 번의 시외 공연을 다니다보니 베스트 드라이버에서 꽤 괜찮은 '워스트 드라이버'로 탈바꿈한 인혁은, 민호와 함께 용산전자상가를 다녀왔다. AIMMF에서 대여해주는 스피커 출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격출력이 110W나 되는 괴물 스피커 4대와 유무선 마이크 8개를 공수해오던 인혁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건설현장에서 사용되는 수레였다.
'민호야, 수레에 스피커 실어서 움직이면서 홍보하면 재밌을 거 같지 않냐? 돌아다니면서 랩하고.'
'오? 괜찮은데? 무빙 스테이지?'
'크, 천재박명이라는데 나 어쩌지?'
그러나 인혁은 그 수레를 자신이 밀어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천재는 아닌 듯했다.
인혁이 아무리 힘들어해도 준형과 상현은 자신들의 할당시간을 채웠기 때문에 세월아 네월아 수레를 따라다녔다.
물론 그냥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팔팔팔- 버스킹-
18시- 10번 부스-
'찹쌀떡- 메밀묵-' 의 찰진 바운스를 따라하며 공연 홍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격출력 110W인 4대의 스피커가 쩌렁쩌렁 울리며 주변 일대에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광경이 꽤나 재밌었는지, 아니면 그냥 888 크루가 좋은 것인지, 수레 주변을 빼곡히 둘러싼 팬들이 금세 홍보 멘트를 따라했다.
팔팔팔- 버스킹-
18시- 10번 부스-
888 크루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녔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는 엄청난 인파를 보고 뭔가 하며 끼어들었다.
상현은 따라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주변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마다 수레를 멈췄다.
"잠시 만요!"
사람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온 상현이 '이게 뭔 일이야'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 버스커들을 발견했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여자가 젬베를 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어……."
난데없는 상현의 등장에 젬베를 치던 여성 뮤지션이 깜짝 놀라며 어버버거렸다. TV에서 볼 수 있던 뮤지션이, 그것도 엄청 좋아하는 뮤지션이 갑자기 먼저 인사를 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888 크루의 이동식 스테이지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공연을 하고 있는 버스커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열심히 공연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는 엄청난 인파가 지나간다면?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상현은 주변을 유의 깊게 살피며 버스커들이 보일 때마다 그들을 수레로 이끌었다.
버스커들과 함께 인파를 헤치며 수레로 돌아오니, 어느새 두 대의 수레가 주둥이를 마주하며 무대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수레의 양쪽에는 각 2대의 스피커가 사선으로 비스듬히 놓여있었다.
"우와……."
순식간에 생긴 길 위의 작은 무대가 버스커들을 반겼다. 뮤지션이라면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공연하셔야죠?”
“네?!”
한 대의 스피커에 어쿠스틱 기타를 연결하고, 한 대의 스피커에 젬베 소리를 잡을 유선 마이크를 연결했다.
이어서 두 대의 마이크 스탠드가 두 뮤지션의 앞에 세워졌다.
"아, 안녕하세요. 저희는 수,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듀엣 뮤지션 프린터입니다."
프린터라는 재미있는 이름에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프린터의 두 멤버들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악 활동을 시작한지 3년이 넘었지만 이처럼 많은 관심과 주목은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프린터는 2분짜리의 짧은 곡 3개를 불렀다.
프린터의 무대는 괜찮았다. 음악의 완성도는 좀 아쉬웠지만 두 뮤지션의 보컬톤이 유니크해서 듣는 맛이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우민호가 송창식과 거미 같다는 말을 했다.
관객들도 가능성 있는 음악가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호응을 보내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를 준 888 크루 선배님들, 아니, 후배님들, 아니, 어……."
호칭 때문에 당황한 프린터에게 인혁이 크게 '친구!'라고 외쳤다.
"친구님들께도 감사하단 말씀을 올립니다!"
친구님이라는 이상한 호칭에 관객들이 웃다가 박수를 쳤다. 그렇게 프린터가 수레에서 내려오고 이제는 888 크루의 차례가 돌아왔다.
무대, 아니 수레에 올라가자마자 상현이 입을 열었다.
"저희 여기서 대충 할 거예요. 곡도 많이 안할 거고, 딱 두 곡만 할 거예요. 왜 그런지는 아세요?"
팔팔팔- 버스킹-
18시- 10번 부스-
처음부터 888 크루를 따라다녔던 관객들이 상현의 홍보 멘트를 소리쳤다. 상현이 씩 웃었다.
"맞아요. 오후 여섯시부터 독립 영화 10번 부스 뒤에 있는 스탠드에서 버스킹이 진행됩니다. 플레이 시간은 안정해져 있어요. 그냥 놀 수 있을 때까지 놀 생각입니다. 와주실 거죠?"
네! 하는 대답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어느새 사람들이 주변에 더욱 몰려들어 있었다. 수레 위로 올라가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힙합 더 바이브에서 게릴라 콘서트할 때보다 더 열심히 홍보하는 거 같네요."
민호가 상현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USB가 장착된 두 대의 스피커가 비트를 토해낼 준비를 끝낸 것이었다.
"딱 두 곡만 하겠습니다! 대충 할 거니까, 그냥 대충 놀아주세요!"
상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빰빰빰! 하는 경쾌한 신디사이저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인혁이 수레로 올라오며 마이크를 잡았다. 인혁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상현아. 형, 지금 공연 못하겠다."
"네? 왜요?"
"지금 공연할 만한 상황이 아니야."
"무슨 말이에요?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 안보여요?"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연출되자, 공연곡을 눈치 챈 관객들이 기대감에 가득찬 소리를 질렀다.
힙합 더 바이브에서 여러 가지로 이슈가 되었던 곡.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어째서요?"
"말할 수 없어."
"형 이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대체 이유가 뭔데요!"
"내가……! 내가……!"
관객들은 이어질 인혁의 대사를 예상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민망한 상황에 처할 때면 느껴지는 어디론가 숨고 싶은 감정.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혁의 연기는 거침이 없었다.
"프린터의 노래를 듣고 지려버렸단 말이야!"
인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객들이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탈의실이다!
그와 동시에 비트가 커지며 후렴구가 시작되었다.
힙합 더 바이브를 통해 탈의실을 접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 Verse 24. 2006년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