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60화 (160/309)

< Verse 24. 2006년 >

***

상현이 스탠다드의 전화를 받은 것은 인혁을 제외한 크루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한참 공연곡을 선정하는 회의 중이었다.

스탠다드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투덜거렸다.

-왜 이렇게 전화 통화하기가 힘들어?

“왜? 무슨 일 있어? 급하면 핸드폰으로 걸어. 맨날 집전화로 걸지 말고.”

LA와 한국은 17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즉, LA가 17시(오후 5시)일 때 한국이 오전 10시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누구 한 명이 늦게 자거나 일찍 일어나면 통화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진 않았지만, 상현이 학교를 다니는 중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LA시간으로 자정이 상현의 하교 시간인데, 스탠다드는 디제이라는 직업 특성상 자정이면 한창 파티에 몰두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학교에 있을 때는 핸드폰으로 전화하지 말란 게 누군데 그래?

“지금은 방학이잖아. 그리고 부재중도 한 개 밖에 안 찍혀 있던데?”

-내가 한 번 밖에 전화를 안 했나?

“그래.”

-어…… 사실은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행사에 참여하느라 바빴어.

“공연진으로?”

-아니, 파티 피플로!

상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수화기 너머의 스탠다드도 웃음소리를 냈다. 왠지 모르게 스탠다드가 좀 들떠있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LA면 지금 새벽 세시 아니야? 술 마셨어?”

-여기 새벽 여섯시야.

“한국이 저녁 여덟신데 어떻게 여섯시야.”

-멜팅 팟(Melting Pot) 빅애플! 뉴욕이거든.

빅애플을 몇 번이나 강조하던 스탠다드가 ‘Standard in a Empire state Building!'이라며 재미없는 말장난을 쳤다.

보통 인 어 빌딩(in a Buildin′)은 인 더 하우스(In da House)와 같은 의미로, 스테이지로 래퍼들이 등장할 때 외치는 말이었다. 커리어 초기의 제이지는 무대에 올라갈 때면 늘 ‘호바(Hova) 인 어 빌딩!’이라고 외치곤 했다.

스탠다드의 말은 뉴욕의 유명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이용한 말장난이었다. 그러나 재미는 별로 없었다.

“뉴욕은 왜 갔는데? 그냥 자랑하려고 전화한 건 아닐 거고.”

-그냥 자랑하려고 전화했는데?

“자랑하고 싶으면 비트부터 보내고 자랑해. 죽이는 거 보내주면 그깟 자랑은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부럽지?

“말이라고 해?”

상현은 괜히 심통 난 척 툴툴거렸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2010년부터 빌보드와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 프로듀서와 사소한 농담을 나누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스탠다드와 성격적으로 잘 맞아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데도 꽤나 친밀감이 느껴졌다.

-부러우면 너도 오면 되잖아.

“갈 일이 있어야 가지.”

-올 일이 생긴 거 같은데?

“응?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스탠다드의 말에 상현이 반문했다. 그러자 스탠다드가 갑자기 악을 쓰며 흥분된 말투로 외쳤다.

“부기 다운(Boogie Down)의 블래스트 마스터(Blast Master)가 나랑 널 보고 싶어 한다고!”

“뭐? 진짜? 블래스트 마스터가 나를? 진짜로?”

상현이 ‘Really?’만 반복하자 스탠다드가 그답지 않게 ‘와하하’하는 이상한 웃음을 내면서 Absolutely만 미친 듯이 외쳐댔다.

침을 꿀꺽 삼킨 상현이 물었다.

블래스트 마스터라니……! 이건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블래스트 마스터가 누군데?”

-블래스트 마스터를 모른다고? 한국에서는 별로 안 유명한 인물인가? 그래도 너는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처음 듣는데? 유명한 래퍼야?”

-근데 왜 흥분한 척했어.

“그냥. 너 좋으라고.”

놀림을 당한 스탠다드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정확히 5초 뒤, 상현은 정말로 수화기를 떨어트릴 만큼 깜짝 놀라야했다.

-정말 부기 다운 프로덕션(Boogie Down Production)의 Blast Master, KRS-One을 모른다고?

상현은 스탠다드가 이상한 억양으로 ‘케이알에스원’이라는 단어를 뱉자,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케이알에스원? 내가 아는 그 케이알에스원? 혹성탈출 유인원 닮은 아저씨?”

-내가 3시간 뒤에 케이알에스원을 만나면 그대로 전해줄게.

“노노노노, 방금 한 말은 취소야.”

상현이 잔뜩 흥분한 말투로 황급히 말하자 스탠다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리턴 오브 더 붐뱁(Return of the Boom-Bap)의 케이알에스원 맞아? 사기꾼 아니야?”

-리턴 오브 더 붐뱁이면 도대체 언제 적 앨범을 말하는 거야? 아무튼 확실해. 내가 케이알에스원의 레이블인 코흐 레코드(Koch Record)에 전화를 해서 개인번호를 확인해봤어.

“으아아아아! 말도 안 돼!”

스탠다드의 말에 상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국어로 소리를 질렀다. 스탠다드가 시끄럽다고 투덜거렸다.

물을 마시러나온 상미는 거실에서 발광을 하며 통화하는 상현을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작업실로 들어갔다.

“케이알에스원이 날 어떻게 알아? 너가 말했어? 아니, 애당초 너랑 친분이 있었나? 근데 그런 말 한적 없었잖아?”

-하나씩 물어. 우선 케이알에스원 매니저가 먼저 네가 LA에 살고 있는지 물어봤어. 유투브를 통해서 봤다던데.

“오 마이 갓! 유투브로 봤다고?”

상현은 잔뜩 흥분한 채로 스탠드다와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케이알에스원은 2006년 말에 출시할 그의 14번째 앨범 에 스탠드다의 트랙과 자신의 랩을 수록하길 원하고 있었다.

솔직히 상현은 케이알에스원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의 손꼽히는 명반인 <리턴 오브 더 붐뱁>만 들어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이키 에어포스원 런칭 25주년’을 기념하는 트랙, 클래식(Classic) 이외에는 말이었다.

하지만 케이알에스원이 전미에서 유명한 메이저 래퍼이며, 수많은 래퍼들에게 리스펙트를 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시기도 적절해.

“무슨 시기?”

-파커가 2004년에 낸 앨범이 완전 망했거든. 평론 사이트에서 별 반개를 주기도 아깝다고 평가할 정도였으니까 말 다했지. 그러니 이번 앨범은 기대치가 없는 앨범이야. 프로모션은 빵빵한데 기대치가 없다니, 얼마나 좋아?

스탠다드의 말에 따르면, 케이알에스원은 2004년의 앨범 이후로 심각한 퇴물소리를 듣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상현은 왠지 느낌이 좋았다.

만약 정말로 2004년 이후 케이알에스원의 커리어가 하락세였다면, 그는 2007년에 나오는 나이키 Classic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클래식(Classic)은 곡의 제목처럼 힙합 클래식을 만들기 위한 전설들의 콜라보레이션 곡이었다.

프로듀서 진으로는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와 릭 루빈(Rick Rubin)이 참여했고, 래퍼로는 칸예 웨스트(Kanye West), 나스(Nas), 라킴(Rakim), 그리고 케이알에스 원(KRS-One)이 참여했었다.

당시 칸예 웨스트는 커리어로 따지면 신인이었지만, 몇 년 뒤의 관점에서 보면 그도 저 라인업에 낄 자격이 충분했다.

상현은 Classic이 굉장한 인기를 끌며 그래미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은 잘된다는 소릴 거야. 그게 이번 2006년의 앨범이 아닐까?’

상현은 그렇게 스탠다드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주 중요한 문제를 깨달았다.

“아, 근데 어쩌지? 지금 당장 뉴욕에 갈 여건이 아니야. 2월말에 투어가 있어서 그걸 준비하느라 바쁜데…….”

-뭐? 네가 벌써 투어를 돌 정도로 유명해졌어? 몇 곳이나 돌아?

“세 곳.”

-응? 세 곳을 투어라고 부를 수가 있나?

보통 미국에서는 투어를 할 때면 기본적으로 10회 이상을 돌곤 했다. 미국 전역을 돌 때는 30회 이상을 돌기도 했다. 인구수와 시장 규모에 따른 차이였다.

-근데 뭐 파커가 홈 레코딩으로 믹스테잎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급하게 진행되진 않을 거야. 한국 여름방학은 언제야?

“7월 중순 정도.”

-그럼 가이드 트랙은 한국에서 만들고, 7월에 녹음을 하면 되겠네. 내가 파커한테 네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알려줄게.

“파커가 케이알에스원이지?”

-응. 메일 발신자가 로렌스 파커면 케이알에스원인 줄 알고 있어. 괜히 매니저냐고 물어봐서 나처럼 민망해지지 말고.

스탠다드의 말에 상현이 크게 웃었다.

그들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스탠다드는 힙합 더 바이브 이후로 888 크루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궁금해 했고, 상현은 LA에서 888 리믹스와 스탠다드의 인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궁금해 했다.

그렇게 30분이 더 흘러 스탠다드와의 통화가 끝났다. 통화가 끝났음에도 상현은 한참동안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멍하니 서있었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아니, 그보다 이거 꿈은 아니겠지?’

보일러를 틀지않은 거실의 냉기 때문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 꿈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

상현이 소리를 지르며 작업실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뒤 작업실에서도 불신, 놀람, 축하가 뒤섞인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

1월은 정말 쏜살같이 흘렀다.

우선 상미는 예고 입시를 끝내고 최종합격 통지를 받았다. 어차피 학교 측에서 상미에게 먼저 제안을 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들 예상하던 바였다. 상미는 최종합격 통지를 받고는 정말 좋아했지만, 그만큼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제 서울의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면 888 크루와의 생활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하연 역시 부지런히 노력했다. 예고와 달리 예대 입시는 1월 말부터 2월이 피크였기 때문에 하연은 여전히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건 다 문제가 없는데 청음(피아노 음을 듣고 음계를 맞추는 테스트)이 생각보다 잘 늘지 않는 듯했다.

나머지 크루원들은 말 그대로 침식을 잊은 채 888 Show와 정규앨범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앨범에 수록한 곡들의 컨셉이 속속 정해졌고, 공연의 셋 리스트가 대부분이 나왔다.

이외에도 888 크루가 공을 들이는 작업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L&S의 2집 앨범이었다.

1월 중순부터 L&S 2집 앨범의 레코딩이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2집 앨범이라기보다는 미주가 보컬로 들어온 새로운 L&S의 1집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앨범 제목은 .

피쳐링 진은 888 크루와 인디 키드였다.

L&S는 레코딩 때문에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정신이 없었다. 랩 피쳐링에 참여한 888 크루 멤버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888 크루의 작업실에서 녹음을 하면 좋았겠지만, 888 크루의 작업실에는 랩 레코딩을 위한 장비들 밖에 없어서 밴드 플레이어의 필요를 100% 충족시키기는 힘들었다. 밴드 레코딩과 랩 레코딩은 차이가 꽤 큰 분야였다.

그렇게 앨범 준비, 공연 준비, L&S 앨범 피쳐링 준비로 1월의 대부분을 보내던 888 크루는 오랜만에 방송가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상현, 신준형, 김환, 우민호가 프로그램에 출연을 한 것이었는데, TV 프로그램이 아니라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그들이 출연한 프로그램은 20시 스테이션이었다.

공중파 방송국 중 하나인 CBC 라디오의 <20시 스테이션>은 유독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고등학생들의 청취율이 높은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888 크루가 출연한 편에는 고등학생 청취율이 높은 게 아니라,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전국의 모든 인문계 고등학생들이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높은 청취율이 기록되었다.

사실 888 크루는 고등학생들에게 롤 모델이나 이상향의 느낌이 강했다. 상현과 준형은 인문계 고3으로써 학업 대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은 존재들이었고, 민지나 김환 같은 경우는 얼마 전부터 연세대라는 명문대를 자퇴하고 음악에 매진하는 이들이었다.

고민이 많은 고등학생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세대학교를 자퇴할 때 부모님에게 어떻게 말씀을 드렸나요?

-공부도 잘하셨을 텐데 왜 음악으로 뛰어드셨어요?

-이상현, 신준형의 고등학교 내신이 궁금합니다.

문자 메시지가 쏟아지자 20시 스테이션 스태프들은 싱글벙글했다. 20시 스테이션을 이끄는 충무로의 유명 배우 신혜연이 적극적으로 888 크루 멤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 Verse 24. 2006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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