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57화 (157/309)

< Verse 24. 2006년 >

888 크루의 음원은 제법 잘 팔렸다.

음원 판매와 수익 정산 사이에 제법 긴 텀이 있어서 정확한 정산 금액을 알 수는 없었지만, 허태진 피디의 말에 따르면 3곡 모두 차트에서 5 ~ 10위권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888 크루는 차트 상위권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뒤를 봐줄 소속사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판매 성적이 사이트에 반영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888 Crew’란 이름은 항상 20위권 언저리에 기록되어 있었다. 방송국에서 힙합 더 바이브를 위해 적극적으로 푸시하는 준형의 단체곡을 제외하면 말이었다.

-신인가수 수야! 섹시한 산타로 변신한…….

2005년 12월의 차트는 대형기획사들이 내놓은 크리스마스 캐럴로 가득 차 있었다.

“우와, 드디어 클럽 BGM을 우리 노래로 해놓네.”

“음원 등록하니까 이게 좋네.”

그러나 888 크루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음악 위가 아닌 금자탑 위에 세워진 차트에 연연하는 팀이 아니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888 크루는 몇 건의 행사를 꾸준히 소화했고, 방송 섭외를 꾸준히 거부했다. 윤도현의 러브레터 같은 프로그램이라면 나갈 마음이 있었지만, 섭외가 들어오는 방송들은 대부분 이상한 예능프로였다.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검토하던 공중파의 크리스마스 특별 음악 방송은 Hommie Vol.3와 일정이 겹쳤다. 아쉽긴 했지만 Hommie Vol.3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기에 방송을 포기해야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는 Hommie Vol.3가 예정된 날이었다.

4개월 만에 찾는 클럽 호미와 4개월 만에 만나는 언더그라운드 힙합 팬들은 변한 것 없이 여전했다. 변한 것은 오직 888 크루의 인기였다.

4달 전, Hommie Vol.1때 기록한 관객수는 1200명이었다.

888 크루가 빠지고 라인업이 조금 부실했던 2달 전의 Vol.2 때는 700명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2500명이었다.

‘이천오백 명이라니!’

그나마 2500명도 클럽 호미의 최대 수용 인원에 맞춰진 숫자였다. 배가의 말에 따르면 장소만 더 넓었다면 3000명 이상도 노려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상현은 2500명이라는 숫자에 전율을 느꼈다.

물론 조용필이나 싸이, 동방신기 등등의 대형가수들의 관객동원력과 비교하자면 2500명은 턱없이 부족한 숫자긴 했다.

가왕 조용필은 2003년에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의 5만석을 매진시켰고, 싸이는 강남스타일의 빅 히트 이후 2013년에 상암 올림픽 경기장의 5만석을 매진시켰다.

언더그라운드 힙합으로 넘어가자면 빈지노나 일리네어, 저스트 뮤직 역시 매년 2000석 이상을 매진시킬 티켓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힙합 뮤지션들이 모여서 2500명밖에 못 불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이브 특수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은 2005년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2005년과 현재의 2005년이 달라진 것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888 크루가 등장했다는 것.

“안녕하세요! 888 크루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악!!!

-팔팔팔 크루-!!

888 크루 8명이 Hommie의 무대에 오르자 환호성도 아니고 함성도 아닌 이상한 괴성이 터졌다. 무대 위의 뮤지션들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어렸다.

힙합 더 바이브 같은 방송 무대도 재밌고, 행사나 축제에 참여하는 것도 재밌지만, 역시 언더그라운드 클럽 공연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Vol.1 때에 비하면 일반 관중들이 많이 늘어난 편이지만, 역시 이곳에는 1999년부터 시작된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총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꺄아아아악!

괴성에 가까운 함성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앞선 2시간의 러닝타임동안 놀만큼 놀았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시작부터 이렇게 흥분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첫 곡으로 뭘 할 줄 알고? Eight, Eight, Eight Remix 같은 거 하면 어쩌려고?”

상현의 말에 2500명의 함성 소리가, 한 문장의 언어로 바뀌었다.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환호를 즐기던 준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서 어떡하죠. 저희 첫 곡은 좀 심심한 곡으로 할 건데.”

준형의 말에 Eight, Eight, Eight의 후렴을 외치던 관객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곳저곳에서 ‘괜찮아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민호 형! 비트 주세요!”

준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잔잔한 기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렉 기타도 아니었고, 드럼 사운드도 겸비되지 않은 순수한 어쿠스틱 기타의 독주였다.

폴링 슬로우리(Falling Slowly)의 도입부와 비슷한 기타 소리가 들리자 관객들이 조용해졌다. 난데없는 어쿠스틱 기타가 관객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찰나,

“뛰어-!”

침묵을 깨는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무대 위의 888 크루 멤버들이 다함께 점프하며 손에 들고 있던 트리플 에잇 티셔츠와 수건, 뉴에라를 던졌다.

높이 뛰어올랐던 그들의 발이 무대를 딛는 순간, 콰쾅하는 드럼 소리와 함께 Eight, Eight, Eight Remix의 비트가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아악!

-우와아아아!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에 관객들이 환호로 보답했다.

30분간 이어질 미친 공연의 시작이었다.

888 크루는 상미의 조언처럼 트리플 에잇의 수록곡들과 힙합 더 바이브에서 불렀던 노래 위주로 공연을 진행했다. 당연히 관객들은 모든 곡을 따라 불렀고, 분위기는 좋다 못해 폭발할 지경까지 고조 되었다.

특히 힙합 더 바이브의 대미를 장식했던 ‘런 디스 씬’을 부를 때는, 이천오백명이 아니라 이만오천명이 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함성이 터졌다.

함성의 절정은 스페셜 게스트 칼립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SHOUT-OUT TO MY MAN! QALIP!"

-칼립이다!

-꺄아아악! 칼립!

칼립은 힙합 더 바이브가 방송된 이후에 엄청난 인지도 상승을 맛봤다. 짧은 방송 분량을 생각하면 기적적인 수준이었다. 이러한 인지도 상승의 원인에는 랩이 좋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잘생긴 외모도 꽤 큰 플러스 요인이었다.

지금은 꼬질꼬질하고 옷도 못 입어서 좀 촌스러웠지만 칼립은 원래부터가 굉장히 미남이었다. 소지섭이 힙합 앨범을 내자 우스갯소리로, ‘칼립이 래퍼 외모 원탑을 빼앗겼다’라는 말도 나왔다.

물론 칼립의 가장 큰 무기는 랩이었지만, 한번뿐인 삶의 예기치 못한 히트에는 이러한 배경도 숨어 있었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준형과 인혁이 여성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칼립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칼립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 있게 랩을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관객들의 랩에 목소리를 보탰다고 해야 할까?

Run This Scene! 한국 힙합 위를 Walk!

twenty-four seven, 가사 쓰는 게 내 업!

2월로 예정된 Hommie Vol.4에는 칼립을 비롯한 소울 메이커즈 멤버들이 오프닝을 장식할 예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한번뿐인 삶이 발매되는 것이 2007년이니 1년 이상 빠르게 수면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빅 히트곡을 도둑맞은 칼립에 대한 빚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현은 흐뭇한 표정으로 랩을 하는 칼립을 지켜보았다.

이런 상현의 표정과 랩에 열중인 칼립의 모습을 절묘한 구도로 찍은 사진이 ‘소속 연예인을 보는 매니저의 표정.jpg’이란 제목으로 올라오는 것은 며칠 뒤에 벌어질 일이었다.

히든 게스트 칼립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이제 888 크루에게 남은 곡은 한 곡뿐이었다.

“혹시 다음 차례가 누군지 아세요?”

-스타즈 레코드요!

-스타즈 레코드!

“맞습니다. 사사건건 저희의 앞길을 방해하는 스타즈 형들이죠. 이 형들이 참 저희를 많이 괴롭혀요. 근데 또 형들 덕분에 호미 공연이 생겨난 거라서 뭐라고 할 수가 없네요.”

준형의 말을 상현이 이어받았다.

“한국에서 힙합을 하다보면 스타즈 레코드 형들을 피해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게, 피할 수 없으면 적당히 이용해먹으려고요. 뭐, 경력이 있으니까 저희 백업 맨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관객들이 스타즈 레코드를 연호하기 시작하자 준형이 손을 휘휘 저었다.

“스타즈 레코드 나오는 거 맞긴 한데 괜히 마음에도 없는 환호 같은 거 하실 필요 없어요. 아유,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노인네들 귀청 떨어져요.”

준형의 너스레에 청개구리 같은 관객들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 이러면 괜히 스타즈 형들 콧대만 높아져요. 저희를 향한 환호성이 형들 건줄 알고 오해한다니까요? 민호 형 그냥 빨리 비트 주세요.”

인트로가 들리자마자 화내는 액션을 취하는 스타즈 레코드가 등장했다. 배가가 상현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헤드락을 걸려고 했지만, 상현은 냉큼 상미 옆으로 붙었다.

관객들이 웃음 섞인 소리를 질렀다.

888 크루의 마지막 공연곡은 오피셜 부틀렉의 콜라보 트랙이자, 힙합 더 바이브의 단체 배틀 곡이었던 Forecast였다.

오늘 공연할 버전은 힙합 더 바이브 버전이 아니라 오피셜 부틀렉에 수록된 정식 버전이었다. 정식 버전의 첫 라이브였지만 6주간의 촬영을 통해 한 단계 진화한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는 흠잡을 곳 없는 공연을 이어갔다.

귀신 들린 거 같은 신-기

Wannabe 래퍼들에게는 신-기

내 약점을 봤다고 느낀 건 신-기

루를 착각하신 듯 하시-지

마지막 벌스를 책임진 상현의 랩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이윽고 완전한 암전으로 변한 무대 위로 야광으로 빛나는 13개의 문구가 떠올랐다.

STARZ X 888

단순한 무지 검은색 티처럼 보였던 옷에 숨겨져 있는 문구였다. 오늘 공연을 위해 상현이 특별이 제작한 옷이었다.

뮤지션들이 뒤로 도는 듯, 어둠 속의 야광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다시 조명이 들어왔을 때는 무대 위의 888 크루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마지막 쇼 타임을 책임질 스타즈 레코드가 남아 있었다.

-스타즈 레코드!

-888 크루!

그러나 두 팀을 연호하는 관객들의 목소리는 영원할 것처럼 이어졌다.

***

너무나 즐거웠던 클럽 호미의 공연을 끝으로 888 크루는 더 이상의 공연을 잡지 않고 짧은 휴식을 가졌다.

크루원들 전체가 반년이 넘게 크루 일에만 힘쓰다보니까 가족을 비롯해 소원해진 관계에 서운해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준형은 뭔 놈의 아들 얼굴보기가 이렇게 힘드냐며 등짝을 찰싹찰싹 맞아가며 짧은 가족여행을 떠났다. 준형의 부모님은 상현과 상미도 같이 가길 원했지만, 상미가 앞으로 보기 힘들어질 중3 친구들과의 여행을 계획한 터라 정중히 거절해야만 했다.

대전이 집인 우민호는 연말을 맞이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고, 연세대를 자퇴하기로 결심한 오민지와 김환은 같은 과 동기들과의 송별회 겸 송년회를 위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하연은 고3 친구들과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고, 인혁은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이곳저곳에서 부르는 친구들과 만나며 휴식을 취했다.

< Verse 24. 2006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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