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56화 (156/309)

< Verse 24. 2006년 >

Verse 24. 2006년

마침내 6주간 이어지던 힙합 더 바이브 2, 에피소드 1의 촬영이 끝을 맺었다.

허태진 피디를 비롯한 방송국 스태프들에게는 에피소드 1의 엄청난 성공이 에피소드 2에 대한 부담감으로 돌아왔지만, 임무를 완수한 뮤지션들은 아무 걱정 없이 마냥 신났다.

“피디님 오늘 회식하신다고 하셨죠!”

마지막 인터뷰를 끝낸 박인혁의 외침에 허태진 피디가 슬그머니 웃으며 법인카드를 흔들었다.

그렇게 예정된 모든 촬영이 끝나고 출연진들과 스태프들은 회식장소로 이동했다. 오늘의 메뉴는 허태진 피디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소고기였다. 다만 한우는 아니었다.

“아, 피디님! 호주산!”

“원래 호주산이 더 좋습니다. 소들의 활동량이 다르다니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겠다고 다짐한 준형과 인혁이 무서운 속도로 고기를 먹어대기 시작했다.

“이모님! 5인분 더 주세요!”

뒤이어 스타즈 레코드의 염현필과 L&S의 용준이 득점행진에 가세하자, 기적의 판타스틱 4가 완성되었다. 네 명의 스코어러들은 골키퍼 허태진 피디를 농락하며 엄청난 기록을 쌓아나갔다.

“와, 인혁이는 말랐으면서 뭘 그렇게 많이 먹냐? 대체 고기가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크큭, 제 몸 속에는 거친 용 한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은 아직도 만족을 못했군요.”

“형 더 먹게요? 어우, 난 더 못 먹겠는데.”

“나에겐 아직 여의주가 필요해!”

잠시 뒤 나온 냉면의 계란 노른자는 박인혁의 차지가 되었다.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회식 자리에는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 칼립과 L&S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2라운드에서 탈락했던 코드네임과 3라운드에서 탈락했던 바운스 라임이 중간에 합류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코드네임의 드레드와 바운스 라임의 돌핀만 참여했다. 팀의 다른 멤버들은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했고, 각 팀의 리더들만 피디에게 인사차 시간을 낸 것이었다.

“뭐야, 저거 무등 경기장에서 봤던 그 싸가지 아니야?”

하연과 상미에게 소고기를 구워주던 미주가 뒤늦게 드레드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미주의 목소리가 꽤 컸던 탓에 드레드의 시선이 미주를 향했다. 미주는 고기를 자르던 가위를 들고는 ‘뭐! 뭐!’하는 시선으로 드레드를 째려봤지만, 드레드는 다만 작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누가 봐도 사과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도 꽤나 정중한.

“뭐야? 저 사람 저런 이미지 아니지 않아?”

미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상미가 코드네임은 재수 없는데 드레드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 같다고 미주에게 귀띔했다.

“으이구, 우리 상미. 드레드 잘 생겼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좀 기생오라비처럼 생기긴 했지만!”

미주가 상미의 옆구리를 마구 간질였다. 상미가 그런 거 아니라고 소리치며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상현이 슬며시 웃음 지었다. 미주가 있는 곳은 항상 웃음이 넘치는 것 같았다.

“상현아, 오경 엔터 일은 좀 알아봤어?”

소주를 한 잔 마신 돌핀이 상현에게 물었다.

“아, 형 덕분에 좀 알아봤는데 진짜 사냥감을 따로 있고, 저는 그냥 사냥감을 불러내기 위한 미끼더라고요.”

“그래? 사냥감은 누군…… 아니다. 내가 굳이 알 필요는 없겠구나.”

“형이 알려주신 덕분에 손쉽게 대처한 것 같아요.”

“그러면 다행이네.”

상현이 돌핀의 빈 잔을 채워주었고, 돌핀이 허태진 피디의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소주잔을 내밀었다. 상현은 웃으며 돌핀의 술을 한 잔 받았다.

‘힙합 더 바이브도 끝났으니, 조만간 홍경수 팀장한테서 협박성 연락이 오겠지?’

상현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불쑥 등장한 우연우와 배상욱이 허태진 피디에게 상현의 악행(?)을 고자질했다.

“피디님! 상현이 술 마셨어요! 이 자식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데 아무래도 888 크루의 우승자격은 박탈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상현 씨!”

“이거 사이답니다! 제가 소주잔으로 사이다 마시는 버릇이 있습니다!”

작은 웃음이 터졌다. 상현은 복잡한 생각을 던져버리고는 신나게 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회식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는 말할 것도 없었고, L&S와 돌핀까지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처음 보는 사람들뿐이라 낯을 가리던 칼립도 어느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888 크루나 L&S와 어색한 관계에 있던 드레드도 순배가 좀 돌고나니 한두 마디씩 이야기가 오갔다.

“이봐요, 아까 우리한테 사과한 거죠?”

언제나처럼 솔직한 미주가 드레드한테 직접적으로 물었고, 드레드는 약간 민망한 듯 고개만 끄덕였다.

미주는 근데 왜 남자 멤버들한테는 사과를 안 하냐고 물었고, 드레드는 난 한 대도 못 때리고 맞기만 했다라고 답했다.

직접 보진 못하고, 소문으로만 888 크루와 코드네임의 싸움을 접했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드레드 약골설’이 돌기 시작했다. ‘어머, 약골인가 봐.’하는 작가들의 목소리가 드레드의 귀로도 들어갔다.

“아니, 약골이 아니라! 쟤들이 선빵을!”

상현은 방방 뛰는 드레드를 무시하고는 코드네임과의 싸움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루키가 깝치다가 3명한테 동시에 맞은 뒤에, 드레드는 욕 몇 마디 뱉다가 얻어맞은 것밖에 없었다.

“뭐야, 생각해보니까 약골이었네?”

상현의 한 마디에 결국 드레드 약골설은 오피셜이 되었다.

즐거운 시간이 흐르고 흘러 회식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태진 피디를 비롯해 지옥의 편집일정을 소화해야하는 스태프들이 먼저 떠났고, 곧이어 내일 스케쥴이 있는 돌핀, 드레드가 자리를 떴다.

남은 이들 중에서도 과하게 술을 마셨거나, 긴 촬영에 지쳐있던 이들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니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배가와 상현뿐이었다.

“상현아, 늦었지만 우승 축하한다.”

“죽자고 싸웠던 상대 팀한테 축하를 받으니까 기분이 묘한데요?”

상현은 괜히 어색한 듯 배가에게 웃음을 보였고, 배가도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이제 한국 힙합 전체를 관객으로 삼고 한 판 붙어야지. 홍대는 언제 올라올 거야?”

“일단 저랑 준형이가 졸업은 해야죠. 고등학교 졸업장은 받아야 하니까.”

“그때가 되면 또 상미 때문에 못 올라오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상미가 서울예고로 진학을 해서,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아요.”

“그래? 잘됐네. 만화 쪽 말하는 거지?”

“네.”

상현이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는 상미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배가가 입을 열었다.

“상현아, 난 정말 많은 팀들을 봐왔거든. 굳이 힙합이 아니더라도 밴드나, 댄스 등등. 근데 오래가는 팀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글쎄요?”

“우선은 성공을 맛 봐. 그 성공의 크기는 다 다르겠지만 아무튼 성공을 경험해. 그 다음에는 위기가 와. 위기도 종류가 많지. 팀워크가 흔들린다거나 경제적인 문제로 팀의 유지가 힘들어진다거나…… 그리고 마지막은 그 위기를 극복하는 거야. 그래야 팀이 오래가.”

상현은 배가가 해주려는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사실 그도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시스템 개발자들이 개발 초기 단계에서 가장 불안해하는 상황이 있다. 그것은 시스템이 작동을 안 한다거나, 오류, 버그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오류가 뜨지 않는 상황을 가장 불안해했다.

완전히 언더그라운드에 묻혀있을 때의 쇼 비즈니스 사태를 제외하면, 888 크루에는 단 한 번의 위기도 없었다. 배가는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작은 위기가 반복되고, 그것을 어렵사리 해결해나가는 게 보통 팀들의 숙명이지. 위기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파이의 크기도 점점 커지고. 그런데 888 크루는 작은 위기조차 없이 너무 커졌어. 갑자기 감당하기 힘든 큰 위기가 찾아오면 그걸 버틸 힘이 있을지 걱정된다.”

이제 888 크루는 ‘한국 힙합’을 떠올리면 곧장 연상되는 팀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팀들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었다.

배가는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가 영원하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원했다.

“그래도 뭐, 888 크루가 음악적으로 흔들린다거나 팀워크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상상이 안 간다.”

“그런가요?”

배가의 말에 상현이 웃음 지었다.

“참, 오늘 피쳐링으로 칼립을 쓴 건 정말 멋있었다. 경력으로 따지면 칼립이 너보다 선배지만, 그래도 너가 실력 있는 친구를 수면으로 띄워 올린 거야.”

“칼립 형은 어차피 저절로 떴을 거예요.”

“그런가? 아무튼 조만간 있을 호미 공연에서 보자.”

상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배가의 따뜻한 손길과 함께 즐거웠던 회식 자리가 끝이 났다.

***

2005년의 12월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준형이 힙합 더 바이브에 삽입될 각 팀 리더들과의 콜라보레이션 곡을 만들고 뮤직비디오를 찍는 사이, 나머지 888 크루 멤버들은 재미있어 보이는 공연만 골라서 행사를 진행했다.

얼마 뒤 하연의 수능 성적표가 나오고, 상미의 중학교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났다. 둘은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상미야 예고에서 먼저 제의가 와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하연 같은 경우는 ‘힙합’으로 ‘음대’에 도전하는 것이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상현이 보기에 청음 테스트만 통과하면 어지간한 음대에서 하연이를 거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인혁은 꽤 긴 고민 끝에 힙합 더 바이브의 진행자 자리를 포기했다. 허태진 피디는 거절의사를 밝힌 인혁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해서 재차 설득했지만, 결국 성사는 되지 않았다. 인혁은 888 크루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도 버거워보였다.

작업실로 출근하는 인혁의 옷차림이 점점 ‘독서실로 가는 척’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자투리 시간에는 꽤나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인혁이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과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상현은 인혁이 지금의 과도기를 넘기면 결국 음악을 선택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888 크루는 오랜만에 L&S와 함께 매주 수요일마다 세종악기사에서 벌어지는 잼(Jam)에 참여했다. 상현은 자신이 처음으로 런 디스 타운을 공연했던 것도 수요일의 잼이었던 게 생각이 났다.

L&S와 888 크루가 나타나자 평일 오후에 잼을 구경하고 있던 리스너들은 난리가 났다. 화기애애하게 시작했던 잼은, 어떻게 알았는지 너무 많은 팬들이 몰려서 중단이 되었다. 세종악기사의 공연장은 70명이 한계 수용인원이었는데, 150명이 넘는 관객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이대로 가긴 좀 아쉬운데…….”

미주의 말에 L&S와 888 크루는 세종악기사에서 앰프를 빌려서 즉석 버스킹을 했다. 장소는 세종악기사 뒤편의 주차장이었다.

“이쪽이 상가 건물이 많아서요. 조용한 곡들만 할 건데 소리 크게 안 지르실 수 있죠?”

“네!”

“지금 대답도 너무 큰데…….”

홍 사장님의 차고 안쪽에다가 사운드 장비를 넣고 주차장 쪽에서 관객들이 지켜보는 형식의 공연이었는데, 생각보다 사운드 딜리버리도 잘되고 운치가 있었다.

L&S와 888 크루는 오랜만에 조용한 곡들로 가득채운 무대를 선보였다. 생각나는 대로 커버곡들도 부르고, 밴드의 잼과 랩의 프리스타일이 섞이기도 했다.

다음날 주차장 공연 사진과 함께, ‘한국 개러지(Garage : 차고) 뮤직의 선두주자’라는 기사가 뜬 것을 가장 좋아한 것은 세종악기사의 홍 사장님이셨다. 왜냐하면 기사가 뜬 사진에 ‘세종악기사’라는 표지판이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힙합 더 바이브의 에피소드 1 마지막 편이 방송되었고, 동시에 단체곡이 발매가 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단체곡의 반응이 너무 뜨겁자, 방송국에서는 소속사, 유통사와 계약을 맺고 프로모션 푸시의 주체가 되었다.

888 크루는 고민 끝에 ‘데이드림, 움직여야지, 와이커밍’을 위임해보았다. 실제 한국 음악 시장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허태진 피디의 간곡한 부탁에 마음이 움직인 것도 있었다.

< Verse 24. 2006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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