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55화 (155/309)

< verse 23. 파이널 배틀 (完) >

상현이 관객들의 목소리와 L&S의 연주를 이기려는 듯이 힘차게 소리쳤다.

랩 한단 얘들이 뭐 그리 말만 많아

나와, 부딪히려면 길거리로 나와

자본 없이 랩 하려니 내 입만 닳아

처음 세종 악기사에서 불렀던 런 디스 타운은 상현이 회귀 전에 썼던 가사가 입에 붙었던 것이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래퍼라는 꿈을 키울 때 써놨던 가사였다.

당연히 지금과 비교하면 원숙함에서 한참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18살의 상현이 한 글자 한 글자 어렵게 적어나간 가사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때문에 부틀렉 0.5에 수록하기 위해 노래를 업그레이드 시키면서도 Verse 1의 가사는 크게 손보지 않았었다.

스폰서가 필요해, 어디?

한국 힙합 In My Flax Zone

문제들의 답은 Five Six 무조건

이 노래를 부를 때면 항상 세종악기사의 장면이 저절로 떠오르곤 했다.

친절한 환호를 보내주던 여중생 무리들과 평일에 세종악기사를 찾았던 애정 깊은 리스너들. 운산고 동문이란 친근함을 표했던 용준과 L&S의 멤버들. 골든 핑거가 시비를 걸자 안절부절 못했던 미주.

‘그러고 보면 이 무대가 만들어진 게 이경민의 시비 덕분인가?’

상현은 랩을 뱉으며 슬며시 웃었따.

골든 핑거의 베이시스트 이경민이나, 쇼 비즈니스의 황주철 편집장 같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신발 끈 꽉 동여매고 달려 나가는 888 크루에겐 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쉴 틈 없이 Run It (Run it!)

질투와 게으름은 버림 (버림!)

완성된 라임 테크놀로지는

내 자신감의 원인 (원인!)

-내 자신감의 원인!!

-내 자신감의 원인!!

관객들의 합창이 메아리처럼 이어지며 12마디를 꽉 채운 상현의 랩이 끝을 맺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현의 랩을 따라 부르던 관객들이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나 숨을 쉴 틈은 없었다.

WALK THIS WAY-!

L&S의 보컬인 미주와, 백업 보컬을 맡는 방민식의 샤우팅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

차인현은 복잡한 시선으로 무대 위의 런 디스 타운, 아니 런 디스 씬을 지켜보았다.

그는 런 디스 타운의 공연을 두 번이나 경험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부드러운 직선의 L&S8 공연이었고, 두 번째는 이상현이 가사를 실수했던 전주 월드와이드 인디뮤직 페스티벌 공연이었다.

본 공연뿐만 아니라 연습과 리허설까지 따지자면 거의 스무 번 이상을 지켜본 공연이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때는 지금만큼의 퍼포먼스 파워가 없었었다.

이상현의 랩은 완벽했고, L&S의 연주는 광주의 인디밴드 수준이 아니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탑 밴드 플레이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고작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이상현과 L&S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있었다.

발전을 넘어선 진화.

익숙하고 친근한 L&S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때문에 차인현은 스테이지 리프트가 오르며 L&S가 등장했을 때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여야만했다. L&S 멤버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더 높아지기 위해 L&S를 버리고 떠났던 자신은 관객석 아래에서 고개 숙이며 숨어 있었고, 자신을 떠나보낸 L&S는 저 높은 무대 위에서 밝게 빛나며 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계속 L&S에 있었다면, 나도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L&S 멤버들과 눈을 맞추며 무대를 즐기는 이상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등 뒤의 황인수, 왼쪽의 방민식, 오른쪽의 용준.

삼각편대의 사이에 있던, 내 자리.

차인현의 가슴 속에 열등감과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

***

Walk This Way!

Talk this way

스티븐 타일러의 고음 못지않게 자극적인 미주의 고음이 무대 위에서 터져 나왔다. 날카로운 고음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방민식의 백업 보컬이 부드럽게 미주의 목소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키보드를 칠 때부터 여성팬들에게 인기가 많던 미주였는데, 보컬을 겸하면서 그 인기가 두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Walk This Way!

Talk this way

상현은 방민식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소리 질렀다.

"Errbody Say!"

Walk This Way!

Talk this way

"한 번 더! Errbody Say!"

Walk This Way!

Talk this way

이번엔 상현까지 후렴구에 가세했다. 높은 음역 대를 형성한 상현과 미주의 목소리가 만났다.

그 순간 상현이 어깨동무하고 있던 민식을 앞으로 밀어버리며 소리쳤다.

“기타 솔로!”

스테이지 전면으로 나선 방민식이 두 손가락을 미친 듯이 움직이며 화려한 연주를 뽐내기 시작했다. 조 페리의 기타 브릿지를 더욱 화려하게 바꾼 민식의 연주는 환호성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여기 모인 관객들 대부분은 L&S를 잘 몰랐다. 그들이 L&S의 이름을 들어본 것은 888 크루의 노래에 간간히 들어있던 피쳐링 명에서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L&S를 기억할 것이었고,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었다.

세종악기사와 전주 월디페를 통해 상현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주었던 L&S가 이제는 상현의 힘을 빌려 메인스트림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후배나 동생에게 추월당했다는 마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기에는 888 크루와 L&S의 사이가 너무 각별했다.

불을 뿜는 듯한 15초간의 기타 솔로가 끝을 향해 달려갔다.

관객들은 이어질 상현의 벌스 2를 기대했다. 그러나 런 디스 씬의 벌스 2는 상현의 몫이 아니었다.

상현에게는 또 한 명의 끌어줄 사람이 있었다.

아니, L&S는 끌어주고 싶은 사람이지만 이 뮤지션은 끌어줘야만 할 사람이었다.

궤도수정.

상현은 그가 받아야할 정당한 영광과 환호를 돌려줄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Shout-out my man! 칼립-!”

스테이지 뒤에서 대기하던 칼립이 무대 위로 등장하며 곧장 랩을 시작했다.

***

배가는 무대 위에서 들리는 칼립이라는 이름에 깜짝 놀랐다.

소울메이커즈의 래퍼 겸 프로듀서, 칼립.

재능 있는 친구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배가가 놀란 것은 칼립의 실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힙합 더 바이브의 파이널 배틀, 그것도 엔딩 무대에 칼립을 올린 상현의 결단에 놀란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피쳐링 허용권을 얻었다면 누굴 불렀을까?’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신인을 불렀을 것 같지 않았다. 이 큰 무대에, 그것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자리에.

그러나 이상현 이 건방진 자식은, 자기도 신인인 주제에 또 다른 신인에게 길을 열어주려 하고 있었다. 대견한 마음이 들면서도 선배로서 반성하게 되는 마음도 생겼다.

그래서 배가는 무대 위로 등장하는 칼립에게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

Shout-out my man! 칼립!

칼립은 기다리고 있던 상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가슴이 아플 만큼 심장이 뛰었다.

어두침침한 무대 뒤편에서 대기하다가 무대 위로 올라오니 사방이 밝았다. 강렬한 조명 탓에 관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긴장한 탓인지 리허설 때 충분히 익혀두었던 주변 사람들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씩 웃고 있는 이상현이었다.

처음 이상현을 통해 피쳐링 제의를 받았을 때는 기쁜 마음보다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한국을 들썩이는 힙합 더 바이브 2의 파이널 무대에 자신같이 인지도가 부족한 래퍼를 부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상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딱 한 마디만 건넸을 뿐이었다.

‘제가 칼립 형의 음악을 되게 좋아해요.’

그보다 3살이나 어린 이상현이었지만, 한국 힙합 씬에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는 뛰어난 뮤지션의 말에 칼립은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이크를 꽉 잡은 칼립이 랩을 시작했다.

Run This Scene. 한국 힙합 위를 Walk

twenty-four seven(항상), 가사 쓰는 게 내 업

집중하기 힘들어 가만히 앉아있질 못해

큐, 에이, 엘, 아이 피(QALIP) 내 이름 적어 옆에

얼핏 들으면 칼립의 목소리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그의 목소리에는 남들이 갖지 못한 스펙트럼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칼립의 목소리는 낮게 깔리는 중저음이지만 목소리 뒤에 따라오는 잔향이 하이톤의 느낌을 풍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컬 톤은 울림 있는 중저음.

보컬의 끝 처리는 하이톤의 느낌.

이것이 칼립만이 가지고 있는 무기였고, 여러 번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칼립의 보이스 칼라였다.

영웅들의 이름 위에 내 이름을 덧칠해

난 섬세하지 못해 무시하며 사는 겉치레

누군가 나를 보며 말해 무식하고 거친 애

내 음악을 들어봐, 수많은 난관을 거친 애

칼립이란 뮤지션을 전혀 모르는 관객들이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중요한 무대를 장식하는, 이상현의 보증이 붙은 래퍼라는 평가 덕분이기도 했다.

상현은 최선을 다해서 칼립의 하이프맨을 자처했다.

능숙하게 더블링을 치고, 필요한 부분마다 백 사운드를 쌓는 상현과 랩을 하는 칼립의 눈이 마주쳤다.

상현에게 있어서 칼립은 그의 랩스타였다. 힘든 시절, 자신의 마음을 달래주던 칼립의 랩을 듣고 힘을 냈었다.

칼립에게 있어서 상현 역시 랩스타였다. 한국 힙합 씬에 혜성처럼 등장해, 새로운 방법론을 내세우며 몇 개월 만에 스타즈 레코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재 뮤지션이었다.

서로에 대한 리스펙트가 담긴 눈빛이 무대에서 오갔다.

FiveSix가 내준 내 역할 열두 마-디

꽉 채우고 나와 무대 위 열중하-지

난 코비 브라이언트 내 팀은 레이커스!

I do it for ma Team, 소울 메이커즈!

마침내 칼립의 12마디짜리 랩이 끝났다.

상현의 기억 속에 있던 최고의 랩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그래도 칼립의 재능은 여전했다.

화려한 밴드 사운드 사이를 노니는 특별한 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는 순간,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을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칼립의 랩이 끝나자마자 L&S의 후렴이 시작되었다.

Walk This Way!

Talk this way

관객들은 지금의 후렴이 힙합 더 바이브 에피소드 1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888 크루, 스타즈 레코드, 바운스 라임, 코드 네임.

4팀의 뮤지션이 보여준 4번의 공연은 많은 시청자들과 리스너들의 마음을 홀렸고, 힙합이라는 문화의 위치를 높일 수 있었다.

마치 1986년에 런디엠씨가 Walk This Way를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Walk This Way!

Talk this way

관객들 역시 지금의 훅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최선을 다해 소리를 높였다.

이상현, L&S, 칼립의 목소리와 관객들의 후렴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부족했다.

상현은 밑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888 크루 멤버들을 무대 위로 불러들였다. 예정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888 크루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무대 위로 올라온 인혁과 준형이 이상한 춤을 추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고, 하연과 상미가 웃으며 마구 손을 흔들었다.

이제 상현은 스타즈 레코드를 무대 위로 불렀다.

엄밀히 말하면 경쟁 팀인 888 크루의 무대였다. 지금 올라가서 흥을 보태주는 것은 스타즈 레코드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현이 그런 것을 계산하며 스타즈 레코드를 부른 것이 아니듯, 스타즈 레코드 역시 사소한 것을 따지는 이들은 아니었다.

Walk This Way!

Talk this way

어느새 무대에는 수많은 뮤지션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888 크루, 스타즈 레코드, L&S, 소울메이커즈의 칼립.

상현은 마지막으로 흐뭇한 표정으로 공연을 지켜보고 있던 허태진 피디를 무대 위로 올렸다.

이미 4번의 후렴 반복은 끝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L&S의 연주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관객들의 함성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뮤지션들의 외침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료들이기 때문이었다.

Walk This Way!

Talk this way

***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힙합 더 바이브 2, 에피소드 1의 촬영이 끝이 났다.

배틀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시작한 촬영이었지만, 그 촬영의 끝에는 배틀이 아닌 화합이 존재하고 있었다.

321표를 획득한 888 크루가 279표를 획득한 스타즈 레코드를 꺾고 에피소드 1의 우승팀이 되었지만, 오늘 공연을 즐긴 관객들 중에는 그 누구도 승패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뮤지션들이 배틀하고 있던 상대는 서로가 아니라, 힙합이란 문화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일지도 몰랐다.

< verse 23. 파이널 배틀 (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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