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3. 파이널 배틀 >
사실 힙합 더 바이브에 참여하기 전까지만 해도, 888 크루의 음악에는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이 깊숙이 들어있었다.
음악의 질이나, 뮤지션들의 태도가 아마추어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 888 크루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생계유지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자아실현의 수단에 가까웠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888 크루는 영감과 영감이 충돌할 때가 아니면 곡을 만들지 않는 편에 속했다. 물론 8인의 개성 넘치는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면 영감의 충돌을 자제한다는 게 더 힘든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 같은 888 크루의 아마추어리즘은 재미있게도 상현으로부터 출발해 크루원들 사이로 조금씩 퍼진 것이었다.
상현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깊은 무의식 속에 빅 머니(Big Money)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자본에 함몰되어 돈 이외의 가치를 추구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힙합 더 바이브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매주, 매주 정해진 기간에 맞춰 촬영을 준비하면서 영감에 의한 음악이 아닌, 노력에 의한 음악을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 것이었다.
물론 888 크루가 온 힘을 다해 음악을 즐기고, 비 더 언더그라운드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888 월드를 지탱하는 불변의 가치였다.
하지만 그러한 가치 속에 음악을 직업으로 대하는 태도가 깃들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888 크루가 힙합 더 바이브를 통해 얻은 진정한 선물은, 유명세나 팬들의 지지가 아니었다. 돈도 아니었고, 조만간 작업실을 채울 고급 레코딩 장비도 아니었다.
롱런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일순간 영감이란 놈과 재능이란 놈이 888 크루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지라도, 평생 음악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경험과 태도였다.
이것이 6주간 진행된 힙합 더 바이브가 888 크루에게 주는 진짜 선물이었다.
‘오래 달리기 위해서는 신발 끈을 꽉 매야지.’
그러니 상현이 준비해온 마지막 곡은, 신발 끈을 꽉 매는 곡이었다.
Back to the Base.
처음으로 돌아가서.
오래 달릴 수 있도록 신발 끈을 꽉 매고서.
무대 위의 스크린에 힙합 더 바이브 투, 에피소드 원의 엔딩 곡 제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런 디스 타운이었다.
-888 Crew Bootleg 0.5-
9. Run This Town - 이상현 Feat. L&S
미주, L&S, 세종악기사 사장님을 만나게 해주었고, 전주월드와이드 인디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할 수 있게 해준 곡.
이상현이란 뮤지션의 시작을 알린 곡.
‘부틀렉 0.5’의 9번 트랙.
런 디스 타운.
그 순간, 스크린에 떠오른 ‘Run This Town’이라는 글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새롭게 떠오른 글자는 불과 몇 달 만에 훌쩍 커버린 888 크루의 위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Run This Scene.
이제 888 크루와 상현은 ‘광주’를 달리는 뮤지션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이 광주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이제 그들의 음악은 광주를 넘어서 한국 힙합 씬을 달구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런 디스 타운!
-런 디스 씬!
패기 넘치는 마지막 곡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관객들이 거친 함성을 질렀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부틀렉 0.5를 통해서 런 디스 타운을 접한 이들이었다. 설령 런 디스 타운을 모르는 이들이라도, 제목만으로도 후끈 달아오른 관객들의 열기에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Respect Run DMC!!”
밝은 조명아래 우두커니 서있던 상현이 별안간 크게 고함을 질렀다.
런디엠씨에 대한 리스펙트.
-지이이잉!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일렉 기타의 강력한 스트로크가 관객들의 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일렉 기타 사운드 뒤로 둔탁한 드럼과 묵직한 베이스가 깔렸고, 워크 디스 웨이(Walk this way)와 런 디스 타운(Run This Town)을 구분 짓는 미주의 날카로운 키보드가 나타났다.
-우와아아아아!
-꺄아아아악!
인트로만 들렸을 뿐인데, 벌써부터 관객들이 머리를 흔들며 날뛰기 시작했다. 공연장 안이 흥분으로 가득 찼다.
과연 천재들은 다르다.
‘뭔가 펑키(Funky)한 걸 한 번 만들어보자.’
30년 전인 1975년에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기타리스트 조 페리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Walk This Way를 만들어냈다.
1975년에 만들어진 음악이 30년이 흐른 2005년에도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과연 천재들은 다르다.
19년 전인 1986년에 런디엠씨는 하나의 의문을 가졌다.
‘왜 랩 메탈(랩 록)은 없지?’
그리고 그들은 에어로스미스의 조 페리와 스티븐 타일러를 불러서 의 4번 트랙 Walk This Way를 녹음했다. 런디엠씨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랩과 록의 만남은 단숨에 문화 트렌드를 바꾸어버렸다.
단 한 곡으로 백인들에게 랩의 마력을 주입시키고, 천대받던 랩을 문화의 위치로 끌어올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상현은 자신이 에어로스미스처럼 수십 년이 흘러도 사람들을 열광시킬 사운드를 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다. 런디엠씨처럼 문화 트렌드 자체를 바꿔버리는 트랙을 만들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자신 역시 그들처럼 음악에 모든 것을 걸 것이었고, 평생 동안 음악을 즐기며 살아갈 것이라는 거였다.
랩스타(Rapstar).
그러다보면 언젠간 그에게 찾아올 수식어.
-지이잉!
펑키한 일렉 기타 사운드가 피치를 높이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드럼이 무차별적인 폭격을 이어갔다. 그 뒤에는 날이 잔뜩 선 키보드와 몸을 숨긴 베이스가 도사리고 있었다.
천재들의 발자취가 기록된 워크 디스 웨이가 ‘런 디스 타운, 혹은 런 디스 씬’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공연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상현이 마이크를 잡았다.
모든 관객들의 시선의 상현에게 꽂혔다. 그들은 어서 빨리 상현의 랩을 듣고 싶었다. 귀를 가득 채우는 라임과 플로우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상현이 토해내는 것은 펑키한 리듬을 채우는 랩이 아니었다.
“잠깐만요. 연주 좀 중단해주세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출발했던 사운드가 상현의 훼방으로 중단됐다. 연주에 맞춰 미쳐 날뛰고 있던 관객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상현을 쳐다보았다.
상현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지금의 상황은 그가 첫 공연을 했던 세종악기사에서 벌어졌던 장면과 똑같았다.
저 아래서 미소 짓고 있을 L&S 멤버들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관객여러분들이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어버리신 것 같네요.”
뜬금없는 상현의 말에 대다수의 관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개중 눈치가 빠른 몇 명만이 상현이 말하려는 바를 알아차린 것 같기도 했다.
“런 디스 씬은 888 크루가 힙합 더 바이브 무대에서 부르는 마지막 곡입니다. 그런데…… 제가 3라운드에서 우승하면서 뭘 따냈는지 아시잖아요?”
관객들 사이에서 ‘아!’하는 탄성이 나왔고, 누군가 ‘피쳐링 사용권!’이라고 우렁차게 말했다.
씩 웃은 상현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레슬러를 소개하는 장내 아나운서처럼 있는 힘껏 소리쳤다.
“Ladies & Gentlemen-!”
신사숙녀 여러분.
“Let me introduce MY BROTHER-!”
제 형제를 소개합니다.
그 순간, 중단되었던 런 디스 씬의 연주가 다시 시작되면서 무대를 비추는 조명의 범위가 확 넓어졌다.
비로소 관객들은 무대 뒤편에서 올라오는 스테이지 리프트(Stage Lift)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리프트 위에는 4명의 뮤지션들이 열정적인 연주를 선보고 있었다.
리더 겸 리드 기타, 방민식.
광주 최고의 베이시스트, 용준.
탁월한 박자감각을 가진 드러머, 황인수.
보컬 겸 키보디스트, 신미주.
“BAND L&S------!"
상현의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L&S의 악기들이 순식간에 볼륨을 키웠다.
볼륨을 컨트롤하던 엔지니어가 깜짝 놀랄 만큼의 커다란 소리가 무대 위로 폭탄처럼 떨어졌다. 지치지도 않는지, 관객들이 또 한 번 새된 비명을 지르며 격렬한 바운스를 타기 시작했다.
일렉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4가지의 악기가 스피커를 찢어버릴 듯한 사운드를 토해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기다리던 상현의 랩이 시작되었다.
런 디스 타운을 아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떼창을 시작했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관객들의 목소리는 뮤지션들을 소름 돋게 만들기 충분했다.
-Run This Town! 광주 City 전부 내꺼!
그러나 상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런 디스 타운? 고작 그거 밖에 안 돼요?”
떼창을 중지시킨 상현은 온몸을 들썩이며 박자를 타더니 4마디 루프로 뛰어 들었다.
첫 마디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Run This Scene. 한국 힙합 전부 내꺼.
하이 볼륨 연주에 길들여진 관객들은 귀가 왕왕거려 상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Run This Scene. 한국 힙합 전부 내꺼.
Run This Scene! 한국 힙합 전부 내꺼!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현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그제야 상현의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Run This Town이 아닌, Run This Scene.
마침내 상현이 고함쳤다.
Run This Scene! 한국 힙합! 전부 내-꺼-!
‘꺄아아아악’하는 관객들의 함성이 터지고, L&S의 연주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상현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가자아-!”
콰쾅하는 드럼이 관객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기꺼이 총구를 맞이한 채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렇게 힙합 더 바이브를 마무리 짓는 Run This Scene이 시작되었다.
Run This Scene! 한국 힙합 전부 내꺼!
Rhyme 하나만 가져다놔, Swagger! Maker!
56 커져! 베껴 나만의 Origin
무대와- 조명이- 어울리지
‘Run This Scene, 한국 힙합 전부 내꺼’란 라인으로 랩의 포문을 연 상현은 이어지는 3마디를 침묵했다. 관객들이 대신 불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사를 외워 자신의 랩을 부르는 장면은 언제 봐도 가슴 설레는 장면이었다.
바빠진 것은 카메라맨들이었다. 인이어를 통해 들리는 ‘무조건 다 찍어!’라는 허태진 피디의 요청에 카메라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600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찍기 시작했다.
1라운드 공연은 내부 투표라서 관객이 없었고, 2, 3라운드 때는 주제 배틀과 배틀 랩이라는 포맷 때문에 관객들이 다 같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상현이 부르는 ‘런 디스 씬’이 힙합 더 바이브에서 나오는 첫 떼창이었다. 게릴라 콘서트를 제외하면 말이었다.
‘888 크루는 완벽하게 다 챙겨가는군.’
사실 허태진 피디는 스타즈 레코드와 888 크루가 곡 선정의 제약이 없는 4라운드를 프로모션적으로 이용하길 원했다. 지금까지 너무나 잘해준 두 팀에게 주는 선물이 되길 바랐다.
힙합 더 바이브 4라운드는 최고의 멍석이었다. 오늘 모인 600명의 관객들은 두 팀의 노래를 대부분 알고 있었다. 여기서 기존 곡을 부르면 곧장 ‘유명 곡’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설령 TV를 보는 시청자가 모르는 곡일지라도, 600명의 방청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따라하니 ‘아, 내가 모르는 유명한 노래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즈 레코드의 공연곡이 신곡과 버전 업(Version Up)곡들인 것과 달리, 888 크루는 와이커밍을 비롯한 기존의 유명 곡들을 가져왔다.
정말 흐름과 시류를 잘 꿰뚫어보는 팀이었다.
‘그 중심에는 저 친구가 있겠지?’
허태진 피디는 무대에서 미쳐 날뛰는 상현을 보면서 그렇게 짐작했다. 그러나 사실 오늘 공연의 선곡이 상미 덕분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 verse 23. 파이널 배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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