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2. 궤도수정 >
순서 결정권을 얻은 888 크루는 당연하다는 듯이 후공을 선택했다. 두 팀의 공연이 끝난 뒤에 진행되는 투표이니 만큼, 후공이 유리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비밀 피쳐링이 있으니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프리스타일 배틀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무대 위에서 허태진 피디가 열심히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다같이! 힙합!”
더 바이브!
관객들이 다 같이 소리쳤다. 평소보다 많은 관객수 탓인지, 공연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허태진 피디는 아직 함성소리가 부족하다는 듯이, 더 크게 소리쳤다.
“힙-합!”
더-바이브!
“힙합-!”
더-! 바이브-!
관객들의 열띤 호응이 여과 없이 카메라에 잡혔고, 임무를 완료한 허태진 피디가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수고하셨어요.”
“어우, 역시 이런 건 내 체질이 아니야. 김 작가, 촬영 끝나면 꼭 박인혁 씨한테 다시 물어봐. 알았지?”
작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허태진 피디가 내려온 무대 위로 스타즈 레코드의 멤버들이 등장했다.
배상욱, 우연우, 오명진, 염현필, 김유화.
묵묵히 무대 중앙을 차지한 다섯의 베테랑들에게 관객들의 열정적인 응원이 전달되었다. 이윽고 평소의 특설 무대가 아닌, 케이엠 뮤직박스의 넓은 본 무대 위로 은하수 같은 조명이 쏟아졌다.
동시에 흘러나오는 묵직한 드럼과 헤비 베이스.
둥둥과 두두, 그 중간정도의 땜핑감을 가진 헤비 스네어(Heavy Snare)가 나오자, 미동도 없이 서있던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이 헤드뱅잉을 하듯이 격렬한 바운스를 타기 시작했다.
Stars Record VS 888 Crew.
힙합 더 바이브 2의 에피소드 1 라인업이 공개됐을 때부터 예견됐던 결승전.
지금까지 스타즈 레코드와 888 크루는 총 4번의 간접적인 싸움을 했었다.
우선 Hommie Vol.1에서는 퍽 더 쇼 비즈 이슈와 신인의 신선함을 무기로 내세운 888 크루가 스타즈 레코드에게 판정승을 거뒀었다.
이어진 힙합 더 바이브 2의 ‘1라운드’와 ‘3라운드의 게릴라 콘서트’에서는 스타즈 레코드가 더 많은 투표수를 획득하며 판정승을 거뒀었다.
3라운드 본 공연에서는 무승부의 결과가 나왔지만 상현이 배가를 누르며 승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역시 크루 대 크루의 싸움으로 생각하면 판정승에 가까웠다.
‘번외 경기인 앨범 판매량도 비슷하고 말이야.’
배가는 지금이 888 크루와 직접적으로 맞붙는 첫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길 생각이었다.
상현이에게 한 번 졌지만, 그것이 결코 스타즈 레코드의 패배는 아니었다.
묵직한 드럼 사이로 묘한 바이올린 소스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사람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는 현악기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효과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헤비 드럼과 맞물리며 관객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었다.
공연의 포문을 힘차게 여는 뮤지션은, 유니크한 여성 보컬 김유화였다.
래퍼들의 격렬한 바운스를 배경삼아 김유화가 등장했고, 마이크를 잡았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김유화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이 ‘뭐하는 거야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소울풀 가득한 목소리로 노래를 토해낼 것 같던 김유화가 ‘학교종이 땡땡땡’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학교종이 땡땡땡은 메인 디쉬가 아니었다.
4라운드 파이널 배틀의 포문을 여는 스타즈 레코드의 첫 곡은, 배상욱, 오명진, 김유화가 부르는 ‘조퇴’였다. 조퇴는 만들어진지 얼마 안됐음에도 팀원들의 만장일치로 3집 앨범에 수록될 곡이었다.
흔히 래퍼들은 수준 높은 랩을 표현할 때 CLASS라는 단어를 쓰곤 했다. 그리고 클래스라는 단어에 수업이라는 이중적인 의미 역시 부여하곤 했다.
스타즈 레코드는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조퇴라는 발음과 ‘비슷한 발음을 가진 욕설의 의미’를 추가하였다.
이 곡은, 기립박수를 받았던 상현의 ‘Get that money, Welcome to school’을 듣고 만든 곡이었다.
결국 난 돈벌어, 그리고 써
아주 래퍼답게 Wa$$up
돈으로 클래스를 살 수는 없어도
학교는 들어갈 수 있어
사실 ‘겟 댓 머니, 웰컴 투 스쿨’은 관객들에게도 화제가 됐지만, 그보다는 래퍼들이나 가사에 큰 가치를 두는 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던 곡이었다.
한국에 지니어스 플레이어(Genius Player)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지니어스 플레이어는 미국의 지니어스 닷컴을 롤 모델 삼아 만든 사이트였는데, 추리 문제나 어려운 스토쿠 등을 푸는 지적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사이트였다.
이런 지니어스 닷컴과 지니어스 플레이어에는 색다른 지적 유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가사해석이었다.
정치적,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밥 딜런의 곡이나, 신과 소통한 채로 썼다는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스테이웨이 투 헤븐(Stairway to heaven) 같은 가사들을 해석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대중가요도 해석을 하긴 했지만, 한국에서는 80년대 저항가요나 몇몇 언더그라운드 아트록 밴드 이외에는 마땅히 해석할만한 곡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지니어스 플레이어에서 최근 가장 큰 이슈를 끄는 곡이 겟 댓 머니 웰컴 투 스쿨이었다.
논점은 이상현이 돈과 음악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였다.
난 랩에 소홀한 게 아냐
(항상 랩을 열심히 하고 있다)
단지 다른 일이 당장은 상당히 급할 뿐
(하지만 랩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일들이 있다)
작업실, 장비들 할부, 위해 랩 하기 싫어서 일할뿐
(음악 생산성을 위해서는 물질적 가치가 우선된다)
빚지고 음악해서 만든 음악들은 내가 보기엔 상업적
(돈이 목적이 되면 음악이 상업성을 가진다)
난 돈 벌어 순수성을 지킬게, 이게 내 이상과의 상호협정
(음악적 순수성을 위해서는 물질적 풍요가 전제된다. 이상현의 꿈은 래퍼지만 이상과의 상호협정을 통해서 음악보다 돈의 가치를 우선한다)
이 같은 의견은 상현의 세계관을 ‘돈 > 음악’이라는 명제로 설명하는 해석이었다.
물론 반대되는 해석도 있었다. 상현이 본래 의도했던 것처럼, 이상현에게 있어 돈은 단지 음악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해석이었다.
해석이 잘됐고 잘못됐고를 떠나서 지니어스 플레이어에서 나온 겟 댓 머니의 이슈는 래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해 문장을 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쉬운 단어로도 충분히 다양한 의미를 형성할 수 있다는 충격.
‘조퇴’는 이러한 충격을 그대로 수용해 만든 곡이었다.
음악의 모든 것은 음악 안에서 완성되어야한다는 스타즈 레코드의 6년 고집이 888 월드에게 꺾인 곡이기도 했다.
김유화는 인트로의 학교종이 땡땡땡을 느릿하고 담백하게 두 번 불렀다.
그러나 단지 반복만 된 것은 아니었다. 귀가 좋은 사람이라면 드럼과 바이올린 뒤로 깔리는 학교종이 땡땡땡의 익숙한 멜로디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샘플링 기법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멜로디가 완성된 멜로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연우가 만든 비트는 신디사이저 피아노로 연주한 ‘솔솔라라솔솔미’를 메인 샘플로 삼는 비트였다.
마침내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면 모를 수가 없는, 솔솔라라솔솔미(학교종이 땡땡땡)가 제대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위로 얹어진 것은 난데없는 강력한 훅이었다.
그냥 전부 조퇴해-!
그냥 전부 조퇴해-!
Rap Class 더럽히지 말고
그냥 전부 조퇴해-!
물을 마시던 상현이 컥 소리를 내며 물을 뿜을 뻔했다. 순간적으로 ‘조퇴해’가 욕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허태진 피디도 그러한 점을 염두에 뒀는지, 스크린에는 ‘그냥 전부 조퇴해’라는 후렴가사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냥 전부 조퇴해-!
그냥 전부 조퇴해-!
Rap Class 더럽히지 말고
그냥 전부 조퇴해-!
스타즈 레코드에서 유일하게 묵직한 로우톤을 구사하는 오명진이 악을 쓰듯이 후렴구를 외쳤다. 그 뒤로 김유화가 Ye-He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백 사운드를 쌓았다.
헤비 드럼, 신디사이저 샘플링.
악을 쓰는 로우톤, 그루브한 보컬.
개성강한 4가지 소스들이 우연우라는 마에스트로를 만나 하모니를 이루기 시작했다.
완벽에 가까운 훅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스타즈 레코드의 음악에서 888 크루의 향기가 난다는 점이었다. 힙합 더 바이브를 거치면서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가 많은 부분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벌스의 시작을 여는 래퍼는 스타즈 레코드의 영원한 리더, 배상욱이었다.
그 여자는 내가 좋대,
그녀와 단 둘이 놀 때
우린 뜬 눈으로 밤 새
이야기를 나눴지 올빼미
배상욱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 담담하게 랩을 시작했다. 마치 과거의 연인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배상욱의 가사를 캐치한 몇몇 관객들은 후렴과 벌스의 내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랑 노래인가? 후렴구의 느낌은 감성곡이 아니었는데?’
상현의 생각 역시 관객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랩이 진행될수록 곡에서 언급하는 ‘그녀’가 ‘힙합’을 지칭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오늘의 주제가 힙합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배가의 랩이 전달하는 바이브가 그랬다.
아무것도 없었던 1999년부터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맛보며 지켜온 힙합에 대한 애정.
배가의 랩에서는 그러한 맛이 났다.
우리 주제는 All that
Jazz 대신 Rap, Rap
80년대로 Go back
올드 스쿨의 졸업생
언제나 배가를 매료시켰던 80년대 올드 스쿨 힙합.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주제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근데 시간이 흐르며 그녀와
내 사이에 끼어드는 거짓들
사장들은 비싼 월급을
미끼로 그녀를 사려해, 현기증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올드 스쿨 힙합의 본질은 흐려졌다. 음악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가진, 무작정 뜨고 싶은 래퍼들의 기믹(세일즈 프로모션을 위한 트릭)이 이어졌고, 힙합을 존중하지 않는 자본들이 끼어들었다.
배가는 그래서 랩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와 헤어져 뉴 스쿨(Nu School)
들어왔지만 여전히 Choose You
교실에 앉아서 날 보는 그녀의
미소에 말했지, I'll save you
그리고 시작된 뉴 스쿨 힙합.
‘새로운 들어온 학교’에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의 그녀가 있었다.
올드 스쿨의 변질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지만, 이제 그는 한국 힙합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래퍼였다.
I'll save you.
비 더 언더그라운드(Be the underground)
언더그라운드의 가치를 계승.
그래서 배가는 외치는 것이었다. 진짜 힙합을 망친 것들은 여기 학교에서,
그냥 전부 조퇴해-!
그냥 전부 조퇴해-!
Rap Class 더럽히지 말고
그냥 전부 조퇴해-!
상현은 오명진의 후렴구가 나오는 순간 화들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배가의 랩에 너무 깊게 몰입해있던 탓이다.
소설처럼, 서사시처럼 흘러가던 배가의 랩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배가 형의 랩이…….’
< Verse 22. 궤도수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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