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2. 궤도수정 >
Verse 22. 궤도 수정
에피소드 1의 마지막이 될 힙합 더 바이브 파이널 라운드 촬영은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출연진들은 촬영장에 모여 3라운드 방송 영상을 지켜보았다. 영상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중간 중간 필요한 인터뷰를 하고, 오늘 촬영에 임하는 각오를 언급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남은 뮤지션이 888 크루의 8명과 스타즈 레코드의 5명뿐이어서 휑한 느낌이 든다는 것과, 항상 가깝게 붙어 앉아있던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야, 니들 케이블 채널 시상식 봤냐?”
물론 쉬는 시간이면 가깝게 붙어서 잡담을 나눴지만.
“본 건 아닌데, 기사로 접했어요.”
“허태진 피디님 싱글벙글 이시겠네요.”
‘대한민국 통합 케이블 채널 시상식’에서 힙합 더 바이브는 트랜드 메이커 프로그램 상을 받았다. 이제 고작 3회분을 방송했을 뿐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이었다.
수상소감을 말하던 허태진 피디가 888 크루를 비롯한 출연진들에게 고마움을 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스튜디오 촬영은 오후 3시가 넘자 얼추 마무리 되었다.
그때, 촬영시작부터 보이지 않던 허태진 피디가 촬영장 안으로 들어왔다. 박인혁의 박수와 휘파람 소리를 필두로 출연자들이 수상을 축하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덕분이죠.”
“한 턱 안 쏘세요?”
“한 턱만 쏘겠습니까? 오늘 촬영 끝나고 소고기 먹으러 가시죠. 물론 미성년자 분들 술은 안 됩니다.”
출연진들과 이런저런 농담을 나누는 허태진 피디의 표정은 밝았지만, 이상하게도 썩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김환의 물음에 허태진 피디가 입을 열었다.
“아, 티가 나나요? 별건 아닌데…… 사실은 갑작스레 방송 시간이 늘어나서요. 인기가 있으니 생기는 일이지만, 팀은 이제 두 팀뿐인데 100분을 채우려니 좀 걱정이 되는 군요.”
“100분면 20분이나 늘어났네요?”
“그래도 오늘 촬영 포맷은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저번 주처럼 갑작스레 포맷이 바뀔 수는 없죠. 방송시간은 편집부에서 책임질 부분이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본래 힙합 더 바이브의 방송시간은 80분이었다. 4팀의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줘야 했던 1라운드 때만 100분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국장의 지시로 방송 시간은 100분이 되었고, 그것을 알차게 꾸미는 것은 허태진 피디와 편집부의 몫이 되었다.
흔히 방송가에서 ‘오분오시’라는 말이 있다.
5분의 재미없는 분량이 5%의 시청률을 깎아먹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20분은 정말 긴 시간이었다.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까 여쭈는 건데, 혹시 생각나시는 아이디어 있으신가요? 아, 부담은 갖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허태진 피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미가 말했다.
“에피소드 2에 나올 출연진들의 실루엣? 뒷모습? 랩 하는 목소리? 막 그런 것만 살짝살짝 나오는 건 안 되나요? 재밌을 것 같은데.”
현재 힙합 더 바이브 에피소드 2에 출연할 출연진들에 대한 정보는 그야말로 극비였다. 섭외는 진작 끝났고, 공연 전 영상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도대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언더그라운드 팀 중 플레이라인이 가장 유력했다.
상미의 말에 허태진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1, 2, 3라운드 하이라이트 영상 같은 것도 괜찮지 않나요?”
“그 시간은 이미 편성이 되어 있습니다. 더 넣으면 긴장감이 깨질 것 같네요.”
출연진들과 허태진 피디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다만 아이디어를 내는 이들은 거의 888 크루 멤버들이었다.
서로에 대한 끈끈한 믿음을 바탕으로 강도 높은 토론을 즐기는 888 크루는 아이디어를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엉뚱한 소리를 해도 누구하나 타박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살이 붙어서 그럴싸한 이야기로 탈바꿈 되었다.
배가는 이번 기회에 항상 궁금해 했던 888 크루의 작업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상처 받지 않고, 어떤 말을 해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아, 박인혁은 예외.
“크, 저한테 십 분을 주시죠. 제가 박인혁 쇼로 10분을 채워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진심으로 원하시면 카메라 붙여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허태진 피디의 적극적인 수비가담에 박인혁이 꼬리를 내렸다.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던 허태진 피디가 인혁에게 말했다.
“이건 원래 오늘 촬영 끝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박인혁 씨 혹시 MC하실 생각 없나요?”
“네? 엠씨요? 저는 지금도 엠씨인데요.”
“아뇨. 랩 하는 엠씨 말고요. 진행하는 엠씨요. 힙합 더 바이브를.”
그동안은 허태진 피디가 방청객들에게 공연 진행방식을 설명하고, 분위기를 독려하고, 결과를 발표해왔다. 방송에는 끽해야 5-10분이나 나가는 그림이었지만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이었고, 허태진 피디는 이런 일이 영 어색했다.
피디는 카메라 뒤에 있어야지, 카메라 앞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예산 절감차원에서 자신이 했던 일인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유명 진행자를 부르기에는 그 역할이 너무 작았고, 자신이 계속하자니 부담스러웠다. 그때 생각난 것이 박인혁이었다.
이상현이 선망의 대상이나 실력파 뮤지션으로써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다면, 박인혁은 친근하면서도 웃긴 옆집 형 같은 이미지로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박인혁이 평소에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 준비 없이 MC를 시켜도 자신보다 백배는 잘할 것 같았다.
허태진 피디의 말에 인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글쎄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누가 뭐래도 힙합 더 바이브가 지금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 건, 힙합 더 바이브레이션 덕분 아닙니까?”
“크, 역시 피디님은 배우신 분이셔. 제대로 배우셨어.”
인혁의 너스레에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다.
그때 허태진 피디의 눈에 웃지 않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이상현이 보였다.
“이상현 씨는 약간 삐지신 것 같은데요? 인혁 씨에게만 제의를 해서 그런가요?”
“네? 아니에요. 다른 생각하고 있었어요. 20분을 뭐로 채울지.”
“뭐 좋은 생각 있으세요?”
“음, 싱글 트랙을 하나 만들어서 메이킹 필름이랑 뮤직비디오를 간단히 섞는 건 어떠세요? 싱글 트랙은 각 팀의 리더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하고. 그렇게 되면 코드네임이나 바운스 라임도 출연하게 되니까, 그 분들 때문에 방송을 봤던 팬들도 다시 TV앞에 앉지 않을까요? 싱글 트랙을 음원 발매해서 수익도 내고.”
“오,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은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태프들 중에도 괜찮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꽤 됐다.
“근데 888 크루는 음원 등록하시는 거 싫어하시지 않으세요?”
“아뇨,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인디 키드 형들의 오늘이 지나면도 음원등록 됐잖아요?”
곧 888 크루의 리더인 준형과 스타즈 레코드의 리더인 배가까지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잠시 생각하던 허태진 피디는 작가를 불러 드레드와 돌핀의 소속사에 연락할 것을 지시했다.
“자, 그럼 이제 쉬실 만큼 쉬셨으니까 얼마 안남은 스튜디오 촬영을 끝내버리죠. 리허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아, 참. 피디님. 광고를 넣는 것도 생각해보세요.”
상현의 말에 허태진이 씩 웃었다.
“광고는 당연히 완판입니다. 광고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더 넣고 싶어도 넣을 수가 없네요.”
“저는 방송 중에 들어가는 광고를 말씀 드린 건데, 그것도 안 되려나?”
“방송 중에 광고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나요? PPL(간접광고) 말씀하시나요?”
“아니요. 힙합 더 바이브는 보통 방송초반에 뮤지션들의 이런저런 행동이 나오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경연으로 들어가잖아요? 제 말은,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러 경연을 하기 직전에 60초 광고를 넣고, 공연이 끝나고 결과발표를 하기 직전에 60초 광고를 넣자는 거죠.”
“아, 중간광고요? 그거야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나, 스포츠 경기에서나 나오는…….”
부정적인 어감으로 시작한 허태진 피디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자, 잠시 만요.”
허태진 피디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거 잘하면 방송시간도 채우고 대박도 낼 수 있겠는데……?’
2005년에 중간광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은 1부, 2부 격으로 내용이 딱딱 끊어지는 프로그램들에 사용되는 광고 방법이었다.
힙합 더 바이브처럼 기승전결이 명확한 프로그램에서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유일한 예외라면 어린이들의 만화영화였다.
상현은 그 유명한 멘트인 ‘60초 후에 공개됩니다’가 생각나서 말한 것뿐이었는데, 허태진 피디의 얼굴이 점점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보고 뜨끔했다.
자신 때문에 타들어갈 전국 시청자들의 애간장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
두 팀밖에 없는 파이널 배틀인 만큼, 오늘의 리허설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주제는 힙합, 소재는 자유, 곡은 4곡, 공연시간은 20분.
규칙은 이것뿐이었다. 어떤 곡을 불러도 상관이 없었고, 어떤 방식으로 불러도 상관이 없었다. 단지 4곡으로 20분을 채우면 그만이었다.
“자, 스타즈 레코드 분들 다들 모여주세요.”
스타즈 레코드를 담당하는 작가의 말에 오늘 공연곡의 가사를 되뇌고 있던 멤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앞에 한 장의 종이가 주어졌다.
“888 크루가 3라운드 우승 덕분에 피쳐링 사용권을 획득한 것을 알고 계시죠?”
“알다마다요. 제가 집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데요.”
히든 트랙에서 아쉽게 패배한 배가가 유쾌하게 말했다.
“이게 피쳐링 섭외까지 완료된 888 크루의 라인업입니다.”
작가가 내민 종이에는 888 크루가 공연할 4곡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곡명은 없었고, 단지 어떤 멤버 조합으로 곡을 이루었는지만 알 수 있었다.
888 크루도 이와 동일한 정보를 받고 있었다.
1. 이상현 Feat. 피쳐링
2. 이상현, 신하연
3. 박인혁, 김환, 신준형
4. 오민지, 박인혁, 김환
“상대팀의 곡 순서를 완벽히 맞추시면 먼저 공연을 할지, 나중에 공연을 할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공연은 3라운드처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한 팀이 정해진 4곡을 연달아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투표와 가까운 후공이 좋았다.
“두 팀 다 맞추거나, 두 팀 다 틀리면요?”
“말씀드릴 수 없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럼 피쳐링진은 몇 명이에요?”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흠…….”
배가는 머리를 굴렸지만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888 크루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 이상현이다. 상현이 피쳐링을 이용해서 어떤 그림을 그렸을지, 기대가 되면서도 긴장이 됐다.
상현이 만약 SG 워너비나 박효신 같은 당대 최고의 보컬을 요청했고, 케이엠넷이 그것을 성사시켰다면?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으으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우아, 넌 누구 생각했냐? 난 SG 워너비나 박효신.”
“나는 김건모.”
“에이, 설마…… 유화 너는?”
“정인이나 거미……?”
여성보컬의 이름이 나오자 순식간에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 Verse 22. 궤도수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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