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45화 (145/309)

< Verse 21. 변화 >

오연주 차장과의 통화 내용은 꽤 긍정적이었다.

큰 그림의 가닥이 잡혔고, 나름의 행동 노선을 정할 수가 있었다.

상현은 오연주 차장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오연주 차장님. 통화 가능하신가요?”

-아, 상현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그냥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상현의 말에 오연주가 웃음소리를 냈다.

-어찌나 열심히 사는지, 요즘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888 크루와 이상현 씨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네요. 러브콜 장난 아니죠?

“폰 번호를 바꾸고 싶을 정도로 오네요.”

-그럴 수밖에 없죠. 지금까지는 10대와 20대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없었으니까요. 섭외나 계약은 제 포지션이 아니긴 하지만 혹시 오경 엔터로 오실 거면 그 실적 저한테 주셔야 해요.

목소리를 통해 오연주 차장의 의중을 가늠하던 상현은 그녀가 돌핀의 정보를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좀 더 확인해볼 필요는 있었다.

재벌들의 음험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네? 정말 오경 엔터로 오시게요? 와서 나쁠 건 없지만 굳이 올 필요가 있나요? 차라리 메이저 음반사와 배급, 프로모션 계약만 맺으세요. 소속 계약은 아무래도 888 크루처럼 자급자족으로 음악 하는 팀한테는 불리하니까요.

“한국에서도 배급, 프로모션만 계약해주는 회사가 있나요?”

-음, 메이저 중에는 없죠. 하지만 888 크루가 나서서 몇몇 음반사와 접촉한다면 흥정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관심 있으시면 임 변호사님께 알아보라고 부탁해볼까요? 아니면 오경 엔터에서 먼저 연기를 피울 수도 있겠네요. 저희가 접촉했다는 소문이 돌면 다른 회사들도 마냥 엉덩이가 무거울 수는 없으니까요.

“오차장님이 그 정도로 파워가 있으신가요?”

-계약을 성사시켜 드린다고 확언하긴 무리지만, 계약하는 척이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을 정도는 되죠. 실제로 검토해볼 수도 있고.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오연주 차장이 이번 일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상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돌핀에게서 얻은 정보를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실은…….”

상현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오연주 차장의 대꾸가 점점 줄어들었다. 핸드폰 너머의 침묵이 오연주 차장의 당혹스러움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저희 회사의 일에 대해 이렇게 묻는 건 좀 이상하지만, 그 정보 확실한 가요?

“아마도요. 돌핀 형까지 섭외된 연기자가 아니라면 그럴 겁니다. 그리고 느낌상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전혀 모르고 계셨던 이야긴가요?”

-전혀요. 저를 배제하고 진행된 이야기인 것 같네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무슨 의도인지 잘 모르겠네요.

“돌핀 형의 말로는 저를 섭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고작 래퍼 하나를 섭외하려고 이런 복잡한…… 아, 죄송합니다.

“아니요. 오경 엔터의 주가나 매출액을 생각해보면 고작 래퍼라는 평가가 맞습니다. 그러니 더욱 이상하지 않나요? 고작 래퍼 한 명을 섭외하려고 뭔가를 꾸민다는 게?

-아무래도 사내 정치와 관련된 일인 것 같네요. 그리고 그 목적이라면 내년 초에 독립할 오경 미디어의 부사장 자리 밖에 없고요. 사실은 제가 부사장 자리로 들어갈 예정이거든요. 제가 의아한 점은 대체 왜 사내 정치문제에 상현 씨가 함께 거론되는…… 아, 설마?

말을 잇던 오연주가 뭔가를 캐치한 듯 생각에 잠겼다.

상현은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한참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오연주가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한 질문이지만 혹시 양친의 사고 보상금을 얼마나 받았는지 기억하시나요?

“일실이익은 합당한 법적 절차로 처리했습니다.”

일실이익이란 사고로 생명을 잃었을 때, 사고가 없었다면 사망자가 어느 정도의 수입을 올렸을 것인가를 상정하는 손해액이었다.

상현의 아버지는 47살이었고, 어머니는 45살이었다. 60세까지를 일할 수 있는 나이로 보는 일실이익 계산법에 따라, 상현은 큰 금액의 사고보상금을 받았다.

상현은 기억나는 대로 보상금액을 말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액수는 오경 그룹에서 지불한 위자료였다.

-위자료는요?

“언론에 알리지 않고, 고소하지 않는 조건의 구두계약으로 꽤 많은 금액을 받았습니다. 오차장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본래는 위자료 금액을 더 올려줄 테니 구두계약이 아닌 서면계약으로 이중문서 처리하자고 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죠. 공증을 받는 위자료에 ‘언론에 알리지 않고, 고소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넣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거절하시길 정말 잘하셨어요.

상현은 이중문서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에 거절한 것뿐이었다.

오연주의 말투를 통해 짐작해보면 뭔가를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리고 상현도 오연주의 말투를 통해서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사고 보상금의 지급과정을 빌미로 오연주 차장님을 압박하려는 건가요? 부사장 자리를 내놓으라고?”

-이해…… 하셨어요?

오연주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이상현은 정말 나이를 생각하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시류를 살피는 눈이 빠르다.

오연주는 홍경수가 속한 라인의 의도를 눈치 챘다.

홍경수 팀장 라인에는 지금은 퇴사당한 고 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 부장은 이상현의 양친을 죽음으로 내몬 사고의 장본인이었다.

오연주가 나서서 고 부장의 사고는 들춰내는 바람에 홍경수 라인은 한동안 곤혹을 치러야했다. 그리고 오연주가 고 부장의 라인을 공격한 ‘명분’은 그녀가 이상현과 친분이 있다는 ‘거짓’때문이었다.

홍경수 라인은 그 거짓을 파고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뒤늦은 감이 있는 계획이었다. 고 부장 라인도 자신과 이상현의 인연이 단지 ‘명분’일 뿐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명분에 이의를 제기하려면 진작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거짓 명분을 입증할만한 증거나, 파고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상현은 2004년도 하반기에 이루어진 오경 엔터의 오디션 합격자 중 일인으로 자신과 인연을 맺었다. 아니, 맺은 것으로 되어있었다.

당시의 오디션 테스트 영상은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서 진작 다 폐기시켰다. 회사의 CCTV 진입영상 같은, 당시 오디션에 관련된 시각자료는 대부분 없앴다. 아무리 뒤져도 이상현과 자신의 관계가 거짓이라는 직접증거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상현은 단지, 최종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엔터로 들어오지 않은 연습생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상현의 음악 실력이 거짓이 아니니까.’

처음 이상현을 만날 당시만 해도 그가 음악을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자신에게 호감이 있던 홍경수를 따라서 클럽 호미의 공연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홍경수가 이상현을 영입하고 싶어 했었지.’

홍경수가 이상현을 엄청나게 고평가 했던 것이 떠올랐다.

오연주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상현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미 확인했지만, 작은 것들까지 제가 다시 확인해볼게요. 이정도로 구멍이 숭숭 뚫린 계획을 밀어붙이는 것도 이상하군요.

오연주는 의도적으로 ‘2004년 오디션의 조작 증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었지만 혹시 이 통화의 내용을 기지국을 통해서 따올까 싶어서였다.

물론 사내정치 싸움 중에 영장이 발부되는 것도 아니니 그런 일은 불가능했겠지만.

그것을 눈치 챈 이상현 역시 의도적으로 몇몇 단어를 피했고, 오연주는 또 한 번 감탄했다.

-일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돼도 이상현 씨에게는 피해가 없을 거예요. 최악의 피해라고 해봤자 제가 부사장 자리에 오르는 게 몇 년 미뤄질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저에 대한 섭외 건은 오 차장님을 흔들어보겠다는 의도 중의 하나일까요?”

-아마도요. 아니, 확실하군요. 저를 타겟으로 삼고 이상현 씨를 흔들어보려는 술수로 보이네요. 조만간 홍경수 팀장이 상현 씨에게 찾아가 위협을 가하겠군요. 거짓으로 많은 위자료를 챙겼으니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등의 말로요.

상현은 오연주 차장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전후 상황을 고려해보면 오연주의 의견이 합당한 것 같았다.

“제가 겁에 질리면 겸사겸사 갑의 위치를 잡고 저를 강제로 영입하려 하겠군요. 아주 불공정하게.”

-그렇죠. 이상현 씨가 겁에 질려서 ‘나는 오연주 차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라는 대답을 하길 원하겠죠.

결론은 홍경수 팀장이 아무리 자신을 흔들어도 오 차장을 믿고 겁만 먹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현의 눈에 홍경수 팀장은 애송이었다.

오연주와 이상현은 그 뒤로 몇 마디 덕담을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오연주는 이제 며칠 동안 자신이 놓친 증거가 있나 찾아다닐 것이었다.

***

시상식 때문에 힙합 더 바이브가 결방되면서, 888 크루는 3라운드 촬영과 4라운드 촬영 사이에 2주라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우선 3라운드 촬영이 끝난 다음 날부터 크리스마스이브로 예정된 Hommie Vol.3의 연말파티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 공연 준비에는 상미의 역할이 아주 컸다.

“흠, 셋 리스트를 짜기가 너무 어렵네.”

한참 셋 리스트를 고민하던 준형이 투덜거렸다. 상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일단 오피셜 부틀렉의 트랙 위주로 짜는 게 낫지 않을까? 가장 최근에 나온 앨범이니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부르지 않았어? 차라리 조금씩 만들어놓은 미완성 트랙들을 완성시키는 건 어때? 브랜뉴 트랙이 있긴 해야 되지 않을까?”

준형과 상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지가 물었다.

“새로 트랙을 만든다고? 시간이 돼? 당장 이주 뒤에 있을 힙합 더 바이브 파이널 배틀도 준비해야 되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럼 우선 시간이 촉박한 힙합 더 바이브부터 준비할까요?”

“근데 힙합 더 바이브 마지막 촬영일이 10일이잖아. 그럼 호미 공연 날인 24일까지 고작 2주인데 미리미리 해놓아야 하지 않을까?”

“으으.”

준형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공연섭외담당인 김환이 준형의 고민을 더욱 부추기기 시작했다.

“공중파에서는 아직 연락 없는데, 케이엠넷 연말 스페셜 가요프로에서 우리를 부르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 그거 날짜가 12월 23일이야. 호미 공연 하루 전이니까 하고 싶으면 그것까지 염두에 둬야해.”

“으으.”

“아, 그리고 12월 1일부터 12월 31일 사이에 섭외 요청된 행사만 서른 건이 넘어. 그 중 몇 개를 골라서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아둬.”

“으으.”

따로 섭외를 받은 것이 있던 상현도 한 마디 보탰다.

“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12월 31일에 새해 카운트다운 행사 있다더라. 그거 섭외 왔어. 페이 엄청 쎄.”

상현의 말까지 들은 준형이 모든 걸 달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뇌 과부하 신호. 뇌 과부하 신호. 긴급 복구 시스템 발동. 발동. 고민을 이상현에게 넘깁니다.”

상현에게 고민을 토스한 준형은 작업실 침대에 엎드려있는 상미의 옆으로 발라당 드러누웠다.

준형을 힐끔 본 상미가 상현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고민해? 다 해. 할 수 있는 거 다하고, 벌 수 있는 거 다 벌어. 오빠가 맨날 그랬잖아? 노 들어올 때 물 저어야, 아니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한다고.”

“다 준비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당장 힙합 더 바이브랑 호미 공연만 해도 준비하기가 벅찬데.”

상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호미 공연 시간이 30분이지? 힙합 더 바이브 공연시간은 20분이고. 그럼 힙합 더 바이브 공연 시간 20분에다가, 기존에 유명한 곡으로 10분을 채워서 30분을 만들면 되잖아. 그럼 연습할 시간도 줄어들고…… 뭐가 문제야?”

“그럼 곡이 중복되잖아. 이미 TV로 충분히 접한 것들을 또 보는 셈인데?”

“언니, 오빠들은 지금 너무 뮤지션의 관점에서 공연을 짜고 있어. 관객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라고. 이번 호미 공연 때는 저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관객들이 오겠지? TV에 나왔던 888 크루의 공연을 직접 보고 싶어서.

물론 스타즈 레코드도 있고.”

준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겠지?”

“그럼 그 관객들이 생전 처음 듣는 노래를 듣고 싶을까 아니면 TV에서 봤던 노래를 듣고 싶을까? 당연히 TV에서 봤던 노래지. 나도 아는 걸 어떻게 언니, 오빠들이 몰라?”

상미의 말에 공연진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 Verse 21. 변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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