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0. Battle Rhyme >
크로우칭 라이터(Crouching Writer).
한국 최초 100마디의 랩.
끝없이 이어지는 이상현 특유의 워드 플레이.
가사 전달을 극적으로 살리는 재기발랄한 플로우.
888 크루 음악적 바탕인 888 월드를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곡.
배가는 이러한 대단한 호평이 자신에게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크로우칭 라이터가 별로라면 말이다.
그동안 배가는 상현과 직접적인 비교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랩의 방식이나, 음악적 세계관이 너무 달랐다.
그러나 오늘 이 곡 이후부터 비교를 당하게 될 것이었다.
6년 차이가 나는 후배의 곡 위로 그가 뛰어올랐기 때문에. 성공해도 본적이고, 패배하면 타격을 입을 경기장 위로 올라왔으니까.
‘내가 왜 패배해? 나 배가야.’
배상욱은 자신만만하게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드럼과 피아노만 있는 무성의한 비트.
새삼 ‘워드플레이와 무성의한 비트’를 함께 배치한 상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배가의 랩은 시작되었다.
에스 티 에이 알 지(STARZ)
캐스팅 : They are busy
말 안 해도 거의 알지
우리 CD를 고이 간직
상현이 배가의 랩을 듣자마자 감탄했다.
잘해서는 둘째 치고 대단한 용기가 느껴졌다. 비트뿐만 아니라 구성까지 크로우칭 라이터를 레퍼런스하고 있었다.
‘역시…….’
배가는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10년이 넘게 한국 힙합 씬에서 중심을 지키는 것이다.
평생을 말 위에서 보내, 징기스 칸
작업실 책 상 한편 안에, 꽤 깊숙한
곳에 숨겨진 꿈으로 비트를 매일 기습함
전부다 싸게 해드릴게, Discount
딱딱 맞는 라임과 곳곳에 숨겨진 펀치라인.
‘말’에는 horse와 language의 중의적 의미가 있었고, ‘싸게 해드릴게’에는 할인과 Piss(오줌 싸다)의 중의적 의미가 숨어 있었다.
관객들은 평소와 다른 배가의 랩에 ‘오오’하는 소리를 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평소 배가의 랩이 마상창시합이었다면, 지금 보여주는 랩은 펜싱이었다. 날카롭게 제련된 플로우가 관객들의 이곳저곳을 찌르고 있었다.
다채롭고 날카로운 플로우는 상현의 크로우칭 라이터와 비교해도 쉽게 우위를 판단할 수 없는 솜씨였다.
내가 타고난 재능은 랩에 대한 게 아니지
노력할 수 있다는 게 내 재능의 반이지
배가란 이름 앞에 슈퍼스타가 칭호가
붙는 건, 모두가 깊게 잠든 밤이지
배가의 랩은 쉼 없이 이어졌고, 관객들은 게걸스럽게 그의 가사를 탐닉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날카롭게 이어지던 배가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6년 째- 굴러먹고 있지 배가
매일 밤, 배가, 시켜 내 Swagger
은하수에서 가장 밝게 빛나지 베가(Vega : 직녀성)
그 순간, 비트가 사일런스 되면서 침묵의 공간이 생겼다. 그러나 무대 위의 뮤지션이 침묵의 공간을 놔둘 리가 없었다.
흡 하고 숨을 들이쉰 배가가 벌컥 소리 질렀다.
스타즈 만든 건 평생 가장 잘한 일!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스피커를 가득채운 거대한 목소리의 잔향이 비트가 꺼진 공연장 위를 메아리처럼 돌아다녔다.
극적인 한순간의 카타르시스보다는 지속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배가의 원래 공연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의 퍼포먼스는, 그가 리스펙트하는 888 크루의 그것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스타즈 레코드-!”
“스타즈 레코드-!”
배가의 뒤편에 서있던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이 손을 번쩍 들며 소리 질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배가의 퍼포먼스에 얼이 빠져있던 관객들이 한 템포 늦게 소리쳤다.
-우와아아!
-배가아아!
“와, 씨! 미쳤다……!”
준형은 배가의 랩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거친 감탄사를 내뱉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만 그런 것은 아닌듯했다.
‘이상현 이 자식이랑 배가 형은 도대체 언제쯤 따라잡을 수 있는 거야?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말이야!’
준형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눈은 배가와 상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등이 있기에 자신들이 미친 듯이 성장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참동안 환호를 즐기던 배가가 문득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댔다.
쉬잇-
배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상현의 앞이었다.
배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리스펙트 크로우칭 라이터.”
관객들의 짧은 함성이 들렸다.
쉬잇-
“샤라웃(Shout-Out) 팔팔팔 크루, But…….”
그러나,
“Still I'm King.”
마침내 오늘의 곡명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스틸 아임 킹(Still I'm King)
크로우칭 라이터를 존중하고, 888 크루를 샤라웃하지만, 여전히 왕은 이 자리에 있다.
혁명은 아직 이르다.
“스틸! 아임! 킹-!"
배가의 힘찬 외침을 신호로, 콰쾅하는 드럼 소리가 벼락처럼 무대 위로 떨어졌다.
크로우칭 라이터의 비트 위에 입혀진 하드코어 드럼 사운드. 그 뒤로 강렬한 댐핑감을 가진 베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크로우칭 라이터는 끝났다.
난 너의 방식으로도 신명나게 놀았지만, 내 스타일로 널 죽일 수 있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배가의 랩이 쏘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에는 직접적인 대상이 있었다.
이상현.
배가가 상현을 가리키며 랩을 뱉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 라임은 자동차 매니아처럼 차고 넘쳐
머리는 왕복 888차선, 사고 넘쳐
넌 마리오, 난 쿠퍼
수십 번 죽고 나서 한 번 이기고 클리어 했다고 떠들어대겠지? 그냥 웃겨
마리오는 끝판왕인 쿠퍼를 이기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을 죽어야 한다. 그러나 딱 한 번만 이기면 게임을 클리어 했다고 말한다.
쿠퍼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시 게임을 시작한다면, 마리오는 또다시 자신한테 죽을 것인데 말이다. 그것도 수도 없이.
배가는 상현을 마리오에, 자신을 쿠퍼에 비유하고 있었다.
네가 날 이기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라는 의미.
내가 지금까지 힙합 씬에 기여한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만 진정한 승리가 올 것이라는 선언.
앞서 사용한 펀치라인, ‘차고’ 넘쳐와 ‘사고’ 넘쳐도 재미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마리오와 쿠퍼란 비유가 전해주는 충격만큼은 아니었다.
상현의 깜짝 놀란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다. 상현은 진심으로 깜짝 놀란, 약간의 경외가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가는 그 표정을 보고서 웃었다.
과연 이상현이었다. 상현은 짧은 가사만 듣고서 자신이 전달하려는 모든 메시지를 완벽히 캐치하고 있었다.
마침내 랩은 끝을 향해 치달았다.
이게 내 칙서(勅書), FiveSix 칙쇼
2005년 한국 힙합의 최고 빅 쇼
이제 내가 올바르게 돌려놓을게
Triple Eight이 야기한 무질서
888 크루의 음악은 매력적이다. 현직 뮤지션들까지 홀려버릴 만큼.
하지만 배가가 생각하기에 한국 힙합의 모든 비기너들이 888 키드가 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888 크루의 힙합엘이 인터뷰처럼, 한국 힙합의 기본을 알고서 변화를 꾀해야한다. 다짜고짜 변화부터 꾀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았고, 제대로 된 방향도 아니었다.
때문에 배가는 888 키드들에게 99년부터 이어진 한국 힙합의 참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크로우칭 라이터의 비트로 28마디.
거기에 하드코어 드럼을 얹으며 8마디.
총 36마디의 꽉꽉 들어찬 배가의 랩이 끝났다.
상현은 무대 위의 배가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888 크루 멤버들과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도 환호를 보냈고, 바운스 라임의 돌핀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관객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헐떡거리며 환호를 만끽하던 배가가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헐떡거리던 숨이 조금은 진정됐다.
“상현아, 어른의 시범은 잘 봤어?”
와- 하는 웃음이 터졌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신경전에 흥미진진한 관객들의 시선이 쏠렸다.
맞서 마이크를 잡은 상현이 입을 열었다.
“형, 죄송해서 어떡하죠.”
“뭐가 죄송해?”
“데이지(쿠퍼가 납치하는 마리오의 공주)는 제가 좋다고 하네요.”
상현의 말에 배가가 슬쩍 웃으며 장단에 맞춰줬다.
“에이, 아니야. 튕기는 거지.”
“형은 데이지한테 이상한 화장 시켜서 안돼요. 데이지는 수수하단 말이에요.”
배가는 상현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꼭 데이지를 뭔가에 실제로 비교하고 있는 듯했다.
“데이지가 뭔데?”
“형이랑 저랑 동시에 탐내는 친구죠.”
상현의 말에 허태진 피디와 888 크루를 제외한 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 같은 대답이었다.
그때 상현이 배가를 정중히 스타즈 레코드 쪽으로 안내했다.
“저는 데이지랑 놀아야 해서. 이만.”
어어, 하는 사이 배가는 한쪽으로 밀려났고, 무대 중앙에는 상현 밖에 남지 않았다.
상현은 늘 그렇듯 주변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웰컴, 데이지. 재미있게 놀아볼까?”
그 순간, 비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트를 듣는 순간, 관객들은 불과 2분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해버렸다. 지금 재생되는 비트가 DJ의 실수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트는 멈추지 않았다.
관객들은 뒤늦게 이상현이 했던 말들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상현과 배상욱이 동시에 탐내는 존재.
‘웰컴, 데이지’란 말과 함께 흘러나온 비트.
이상현은 지금, 3라운드 1위를 가리는 히든 트랙으로 크로우칭 라이터를 부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우와아아아아!
-크로우칭!
사태를 파악한 관객들이 그동안의 함성 소리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소리를 질렀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같은 비트로 대결하는 두 명의 래퍼.
아직 랩 배틀은 끝난 게 아닌듯했다.
게다가 오피셜 부틀렉의 4번 트랙 크로우칭 라이터는, 힙합 더 바이브의 방청을 신청할 정도의 열정 있는 팬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노래였다.
마지막 곡으로 적절했다.
‘근데 그러면 이상현한테 너무 유리한 게 아닌가? 게다가 크로우칭 라이터는 1화에서 라이브를 한 번 했는데?’
몇몇 공정한 기준을 가진 팬들이 그런 생각을 했지만, 분위기는 이미 이상현에게 넘어온 듯했다.
상현은 다른 멤버들에 비해서 힙합엘이에 잘 들어가지 않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물론 아예 안 간다는 건 아니었고, 888 크루 음악에 대한 반응을 찾아서 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 이유는 음악적 방향성이 훼손될까 두려워서였다.
사람은 당연히 인정받기를 원하는 생물이다. 때문에 힙합엘이의 반응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반응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음악을 낼 것 같았다.
그러나 가끔씩 자신의 본래 메시지나 취지가 오해받는 것을 볼 때면 아쉽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근데 크로우칭 라이터가 좋긴 한데, 평소의 이상현이랑 다르게 가사가 작위적인 부분이 좀 있지 않나요? 구어체랑 문어랑 혼용되는 부분도 좀 있고. 원래 극단적인 구어체를 사용하는 게 이상현이잖아요.
-그냥 100마디 워드플레이를 하는데 가사쓰기가 힘드니까 이런저런 방법을 다 동원한 거겠죠. 좀 억지로 쓴 가사들도 보이던데. 100마디 말고 50마디가 더 적절했을 것 같아요.
상현은 절대로 100마디를 쓰면서 버겁지 않았다.
아니, 버겁기는 했다. 150마디짜리를 100마디로 압축하는 게 버거웠다. 원래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더 힘든 법이니까.
오늘 그가 부를 크로우칭 라이터는 말 그대로 히든 트랙(Hidden Track)이었다.
아쉽게도 선택받지 못했던 가사들을 선보이는 자리이며, 그가 100마디 이상을 썼음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배가 형한테 이런 쪽에서는 누가 최고인지도 알려주고.’
< Verse 20. Battle Rhyme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