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0. Battle Rhyme >
돌핀은 랩을 시작하며 힐끔 상현을 쳐다보았다.
아침에 상현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대충하시니까요. 나는 원래 이런 수준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회사의 저급한 수준에 맞춰줬다. 이게 너무 쉽게 눈에 들어와요.’
처음에 돌핀은 상현의 말을 부정하려했다.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손쓸 틈도 없이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슴에 미묘하게 걸리는 의문이 있었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을까?’
데뷔할 당시에는 최선을 다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최선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어렵게 만든 트랙은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고, 언제나 10대와 20대 여성을 타겟으로 랩을 해야 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랩 디렉터가 ‘여기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니까, 너가 대충 채워봐.’라고 말하는 자투리 트랙들이었다.
앨범 가격을 올리기 위해, 트랙 수를 늘리기 위해 채워 넣는 잉여 트랙.
대중들은 결코 들을 일이 없고, 앨범을 산 이들도 한 번 듣고 말아버리는 트랙들.
그것만이 자신의 몫이었다.
‘그거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돌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바닥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는 상현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경연곡들을 살펴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오늘 경연을 위해 준비한 4곡 중에는 ‘연예인 돌핀’이 아니라 ‘래퍼 돌핀’을 보여주는 곡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래퍼 돌핀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돌핀은 언제나 자신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정말 죽이는 곡을 써낼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매일 그를 압박하는 스케쥴이 없어진다면?
TV에 나가서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에 웃어 줘야하는 시간들이 없어진다면?
그리고 이번이 그런 기회였다.
랩 배틀에는 자본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고, 소속사에서도 단지 최선을 다해서 이기라고만 했었다. 그러나 돌핀은 평소처럼 적당한 라임과 적당한 가사로 적당한 랩을 만들었다.
‘대충하시니까요.’
돌핀은 언제부터인가 ‘변명’과 ‘상황’이란 놈이 자신을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식의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명확한 대상이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 대상은 그 자신, 소속사, 연예계, 동료, 현실, 스타즈 레코드, 888 크루, 이상현 등등 마구잡이로 떠오르고 사라졌다.
결국 돌핀은 상현을 만났던 아침부터 리허설 직전까지, 모든 시간을 투자해 888 크루와의 배틀 가사를 고쳤다.
어차피 오늘 배틀은 승리할 수가 없었다. 바운스 라임의 입장에서 스타즈 레코드나 888 크루는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렇다면 단 한 곡뿐이더라도 증명을 하고 싶었다.
이상현 앞에서, 관객들 앞에서, 카메라 앞에서, 아직 래퍼 돌핀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그와 동시에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다.
멍청한 자신과 더러운 쇼 비즈니스의 현실에 대한 분노를.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긴장감과 불안함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침내 돌핀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가사 뿐이었다.
손이 하얘질 만큼 마이크를 꽉 쥔 돌핀의 랩이 시작되었다
추락과 비상의 사이, 난 여전히 나
꿈대로 살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얼마
무슨 말인지 알아? 반짝거린다고 해서
그저 보이는 게 다가 아냐
상현은 돌핀의 랩을 듣는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돌핀의 랩은 배틀 랩에 어울리는 가사가 아니었고, 어젯밤 연습 때 들었던 가사도 아니었다.
‘꿈대로 살기 위해 치르는 대가?’
앞뒤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가사임에도 불구하고, 돌핀이 랩을 시작하는 순간 상현은 그 랩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돌핀은 영혼을 불태워 랩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상현은 돌핀이 자신과의 이야기 뒤에 어떤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습게도 가난이 날 자유롭게 할 듯
인기란 자정 1분 뒤에 붙은 택시 할증
내 음악성에 도취해, 성공을 먹고 취해
랩 디렉터 자식들이 내 가사를 또 고치네
힙합은 게토(Ghetto) 흑인들의 유일한 자아표출 수단이었다.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찬 그들의 랩에는 날선 단어들이 가득했고,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당당히 드러냈다. 이것은 곧 힙합이 흑인들을 대변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DJ의 브레이크 타임에서 시작된 랩이란 문화가 지금의 장르적 성향을 획득하게 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돌핀이 뱉는 랩은 그야말로 제대로 된 힙합이었고, 진정한 Battle Rhyme이었다.
상현은 돌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오히려 크게 당황한 것은 신각과 에디션이었다.
‘뭐하는 거야?’
신각과 에디션은 888 크루를 깔 자리에서 갑자기 회사는 까는 돌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모든 가사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랩 디렉터’에 대한 불만을 토해낸 것은 틀림이 없었다.
사람들이 뭘 위해 싸우냐고 물어,
Fuck it, I’m about to blow up
(엿 먹어, 난 곧 크게 뜰 거야)
쇼 비즈니스, 혓바닥 존나 놀려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면 주사위를 굴려
상현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돌핀의 랩을 들어보았다.
그동안 들었던 돌핀의 목소리는 대중들에게 가사를 잘 전달하기 위한 깨끗하고 높은 톤이었는데, 실제 그의 목소리에는 그르렁거리는 매력적인 탁성이 숨어있었다.
돌핀의 12마디 랩은 뮤지션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긴 경력에 비해 가벼운 느낌을 주던 돌핀이란 래퍼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기대하고 있던 랩 배틀의 그림이 아니었고, 돌핀의 가사가 알아듣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관객들은 돌핀의 랩을 이해하기 힘든, 비유가 많이 들어간 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랩을 끝낸 돌핀이 씩 웃으며 상현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감정의 찌꺼기를 토해내니 가슴이 후련해졌고, 기회를 제공한 상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상현은 물끄러미 돌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돌핀은 모르겠지만, 상현은 돌핀의 가사를 완전히 이해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지금 돌핀의 모습이 과거의 자신과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음악을 하기위해 연예인이 되었지만, 어느새 음악을 놓치고 연예인이란 위치에 매몰된 돌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상미를 책임지기 위해 돈을 벌었지만, 어느새 상미는 떠나가고 돈에 매몰되었던 자신.
상현이 손을 들어 돌핀의 손바닥에 내리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의 손이 맞닿았다.
상현은 과거를 떠나보낸 자신처럼, 돌핀도 새로운 출발을 맞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핀과의 묘한 교감을 뒤로 4마디의 인터벌이 이어졌다. 인터벌 뒤에는 이대이 배틀의 마지막 차례가 상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상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돌핀이 어떤 심정으로 랩을 토해냈는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원래 준비했던 ‘바운스 라임의 상업성’을 조롱하는 랩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지?’
상현은 그 순간 떠오르는 가사가 있었다.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쓴 가사였는데, 쓰자마자 꽤나 마음에 들었던 가사였다.
어울리는 비트를 찾지 못해 묵혀두는 중이었는데, 지금 비트에 제법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굳힌 상현이 왼손으로 돌핀을 가리키며 귀를 톡톡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주의 깊게 들어달라는 의미였다.
돌핀은 짐작도 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지금 상현이 하려는 랩은 ‘인생의 선배’로써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이러한 제스쳐를 도발의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관객들이 와-하는 소리를 질렀다.
상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랩은 새롭게 출발하려는 돌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지만, 어떻게 들으면 공격하는 것처럼 들을 수도 있었다.
‘원래 충고가 다 그렇지.’
그러나 상현은 돌핀이 자신의 의도를 파악할 것이라 믿었다.
상현은 망설임 없이 비트 위로 랩을 올렸다.
난 하지 않는 남 탓, 내 두발과 다리로-
힙합이라는 산 타, Marry Christmas 산타.
내가 원하는 선물은 인내와 성실, 간단
남의 차 뒤에는 안타, 아직 난 ‘비주류’ 환타
시스템이란 세계에서 사는 직장인들은 남 탓을 참 많이 하게 된다. 그것은 사장이란 직위를 가지고 있는 상현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쇼 비즈니스란 시스템에 묶여있는 돌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하지만 상현의 생각은 좀 달랐다.
‘난 하지 않는 남 탓, 내 두발과 다리로 힙합이라는 산 타.’
그는 음악의 많은 면을 좋아했지만, 모든 것이 ‘내 탓’으로 결정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노력이 부족한 것이었다.
랩을 못했다면? 단지 연습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이제 알콜을 섞었지, 그래서 난 더 독해
힙합을 들리는 한글로 번역하지 : 독해
어딘가에 속해, 따라가는 짓 잘 안 해
내가 속해야한다면, 신들의 영역 안에
돌핀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상현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속해, 따라가는 짓 잘 안 해. 내가 속해야한다면, 신들의 영역 안에.’
자신의 상황에 딱 어울리는 가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상현이 원래 준비했던 랩은 아니었다.
‘뭐야? 프리스타일이야?’
그러나 프리스타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완벽에 가까웠다. 아마도 기존에 있던 랩 중에서 어울리는 랩을 즉흥적으로 끌어다 쓴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가사를 쓰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으면 즉흥적으로 필요한 가사를 가져오고, 처음 맞춰보는 비트에 저렇게 완벽하게 랩을 때려 박을 수 있을까?
물론 이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
근데 절대 Dream아냐, 현실의 일이지
내 친구들은 말해, 제발 꿈 좀 깨길 바래
그래 올해 가기 전에, 끝판왕인 꿈을 깰게
상현의 랩이 끝나는 순간, 돌핀은 상현의 랩이 자신에게 해주는 충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린놈이 참으로 건방지다.
그러나 돌핀은 웃었고, 상현도 웃었다.
배틀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배틀과 관계없이 화기애애한 둘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뮤지션들은 당사자들만 느낄 수 있는 어떠한 감정적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게 이대이 배틀의 마지막을 장식한 ‘바운스 라임과 888 크루’의 대결이 끝이 났다.
또 한 번의 투표가 이어졌고, 151명의 관객들은 6번째 투표를 완료했다.
이제 남은 배틀은 3번의 단체 배틀 뿐이었다.
888 크루 대 스타즈 레코드 - Forecast
888 크루 대 바운스 라임 - Do the Rap
바운스 라임 대 스타즈 레코드 - Control Tower
단체 배틀의 첫 번째는 스타즈 레코드 대 바운스 라임이었다.
단체 배틀은 서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오가는 컨셉은 아니었다. 대신 같은 비트 안에서 어느 쪽의 랩이 더 화려하고 멋진가를 뽐내는 싸움이었다.
스타즈 레코드와 바운스 라임의 대결에서는 돌핀의 분투와 에디션의 예상외의 맹활약이 돋보였다.
에디션은 Control Tower에서 처음으로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회사에서 만들어준 벌스 그대로였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이 특유의 발성을 마음껏 뽐낼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힙합 더 바이브 여성래퍼의 무게 추는 신하연이나 오민지에게 기울어 있었다.
두 번째는 888 크루 대 바운스 라임의 배틀이었다.
Do the Rap이라는 제목을 가진 두 팀의 단체곡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뽐내던 상현과 돌핀이 제대로 맞붙었다.
마지막은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의 싸움이었다.
오피셜 부틀렉에 수록된 Forecast 벌스에 4마디씩을 더한 랩. 훅은 빠졌지만 12마디짜리 벌스가 6개나 나오는, 장장 72마디짜리의 길디긴 곡이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Forecast를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오피셜 부틀렉을 듣거나, 힙합엘이에서 뮤직비디오를 봤던 이들이라면 이 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오늘 공연한 9개의 노래 중에서 유일하게 관객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그렇게 포어캐스트를 끝으로 9개의 공연이 끝이 났다.
일대일 배틀 3곡, 이대이 배틀 3곡, 단체 배틀 3곡.
테니스처럼 공수가 빠르게 전환되는 곡들을 심사해야했던 관객들도 마침내 긴장을 풀고는 허태진 피디의 결과 발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일대일 배틀의 결과부터 발표하겠습니다. 일대일 배틀의 첫 번째, 스타즈 레코드 대 바운스 라임은…….”
< Verse 20. Battle Rhym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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