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0. Battle Rhyme >
본래 배틀 랩의 가사는 공격적일수록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 상대를 화나게 하는 말은 어려운 비유보다는 직설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력 수준 8위’라는 에디션의 라인은 민지를 충분히 도발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혀 공격적이지 않았다.
‘가사가 문제가 아닌데?’
에디션의 랩은 맛이 없었다.
공격적이지도 못했고, 쏴붙이는 느낌도 없었다. ‘공격’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랩’을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러한 민지의 반응에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에디션의 랩 실력은 민지보다 조금 쳐지는 수준이었다. 발성은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에디션이 나았고, 플로우나 그루브는 민지가 월등했다. 딜리버리는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딕션 스타일의 매력은 민지가 조금 더 나았다.
그러나 문제는 에디션이 ‘랩 메이킹’에 재능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사를 쓰고, 가사에 리듬을 붙이고, 비트를 분석하여 랩의 맛을 살리는 작업.
지금까지는 이러한 작업들을 소속사의 랩 디렉터들이 대신 해주었다. 덕분에 에디션의 단점은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3라운드에서는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주고받는 배틀을 위해서는 회사에서 준비해준 랩의 일부분을 수정해야 했고, 비트까지 새롭게 주어졌다.
변경 사항들 속에서 회사와 함께 만든 랩의 매력이 무너졌지만, 에디션을 그것을 바로잡을만한 메이킹 능력이 없었다.
물론 돌핀이 어느 정도 도와주긴 했지만, 돌핀에게도 주어진 과제들이 있었기에 전부를 케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적으로 에디션의 8마디 선제공격은 싱겁게 끝이 났다.
에디션의 랩이 끝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민지가 치고 들어갔다.
상현은 첫 마디를 듣는 순간, 민지의 승리를 확신했다.
어딘가 흐리멍덩해서 라임 포인트와 메시지가 죽어버렸던 에디션에 비해서, 민지의 랩은 곧바로 관객들에게 의미가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Fake Rapper 에디션, Hey, Pay attention
몇 년째 멈춘 성장. 사라진 퍼텐셜
Girl- in the mirror 거울 속의 난 내 적인데
널- 찾아보면 항상 거울 앞에 서있네
민지가 ‘거울 앞에 서있네’를 뱉으며 얼굴에 파우더를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와아아- 하는 관객들의 함성이 터짐과 동시에 에디션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러나 민지는 기죽지 않고 더욱 뚜렷한 랩을 뿌려댔다.
Female rapper? No, I'm just a rapper
웬만한 남자들과 비교해도 더 큰 배포
비트가 들리면 자동으로 반응하는 세포
힙합을 도둑질하는 널 막아서는 세콤
“세코오옴-!”
“세코오옴-!”
888 크루 멤버들은 민지의 랩이 끝나는 순간 ‘세콤’이란 단어를 다 같이 외쳤다. 마이크는 없었지만 우렁찬 목소리는 관객들에게도 전달이 되었다.
바운스 라임의 돌핀과 신각이 지지 않으려는 듯이 야유를 퍼부었지만 분위기는 이미 888 크루에게 확연히 기운 상태였다.
민지의 8마디 뒤로, 다시 에디션의 차례가 돌아왔다. 에디션은 주먹을 꽉 쥐고는 한 방 먹여주겠다는 듯이 랩을 시작했다.
그러나 3마디 째에서 같은 가사를 두 번 말하는 실수를 하더니, 6마디 째에서는 결국 가사를 잊어버렸다.
준비 기간이 짧아서 실수한 건지, 민지의 랩을 듣고 기가 죽어서 실수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에디션의 랩이 기대 이하였다는 것이었다.
에디션의 랩이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은 탓에, 루핑되는 4마디 간격이 흐려져 버렸다. 민지는 잠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박자를 세다가 마무리에 들어갔다.
이어지는 깔끔한 8마디의 랩.
앞의 4마디는 에디션에 대한 은근한 공격을 담고 있었고, 뒤의 4마디는 Why Commin`의 가사를 재치 있게 가져온 것이었다.
난 마누엘, 난 가능해, 원래 인생은 다 그래,
라는 반응에, 남 다른 해, 답을 또 탐구해
날 가늠해, 보려는 작은 에, 디션의 랩은 좀 따분해
아니 암울해, 맘대로 해, 대신 그 입 좀 다물래
쏟아지는 라임 폭탄에 관객들이 호응했다.
얼핏 봐도 ‘오민지와 888’을 외치는 관객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888 크루 멤버들은 승리를 직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틀이 끝나자, 마이크를 내려놓은 에디션이 휙 돌아서서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다시 투표를 위한 10초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 사이에 비트가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예 BPM이 달라졌다.
전통적인 이스트 사이드 기본 비트에서, 지저분한 악기 소리가 나는 웨스트 사이트 비트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의 해변에 어울릴 듯한 펑키한 리듬으로 가득찬 비트. 인혁이 선택한 비트였다.
박인혁과 염현필은 비트가 바뀌기도 전부터 무대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남은 일대일 배틀이 스타즈 레코드와 888 크루의 배틀 뿐이기 때문이었다.
인혁은 돌아오는 민지와 짝- 소리 나게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비트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그 순간 스크린에 배틀의 정보가 떠올랐다.
* One and One Battle (Final)
Stars Record VS 888 Crew
염현필 VS 박인혁
-스타즈! 스타즈!
-팔팔팔! 팔팔팔!
편이 나뉜 관객들이 힘찬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타즈를 연호하는 팬들 역시 888 크루를 좋아했고, 888을 연호하는 이들도 스타즈 레코드를 좋아했다.
결국은 랩, 그 자체로 판가름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배틀은 8마디짜리의 4 벌스가 아니라, 16마디짜리의 2 벌스로 구성되어 있는 배틀이었다.
인혁과 염현필은 8마디보다 16마디가 더 매력적인 래퍼들이었다. 둘 모두 변화무쌍한 플로우를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짧은 랩보다는 긴 랩에서 더 다양한 변화를 줄 수가 있었다.
‘첫 번째는 유화 누나가 이긴 것 같고, 방금은 민지 누나가 이겼을 테니까…….’
상현의 생각으로 현재 점수는 스타즈 레코드가 1점, 888 크루가 1점이었다. 양 팀 모두 바운스 라임에게서 무난히 점수를 따낸 것 같았다.
그러니 이번 배틀이 아주 중요했다. 이기는 쪽은 2점이 되고, 지는 쪽은 1점이 된다. 총해서 여섯 번뿐인 배틀에서 1승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인혁이 형!”
“이겨버려!"
888 크루 멤버들의 힘찬 응원과 함께, 인혁이 비트 위로 뛰어들었다.
랩이 시작되었다.
난 심각한 길치, 매번 길을 잃어-
정상이 목적진데 훨씬 더 위로-
MSG 첨가된 내 랩은 조미료-
이거나 먹고 살쪄 돼지야, 비료-
인혁은 마치 트로트의 꺾기 창법을 구사하듯이 라임을 길게 체크했다. ‘잃어’를 ‘잃어허’처럼 간드러지게 발음하는 것이었다.
염현필은 박인혁의 라임에 구성진 가락이 들어가자 흠칫 당황했다.
‘와, 씨. 이걸 숨기고 있었구나.’
사실 연습 때 들었던 인혁의 랩은 박인혁답지 않게 너무 얌전했었다. 뭔가 한 방이 숨겨져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런 장치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염현필은 뒤이어 나온 라인에서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거나 먹고 살쪄 돼지야’라니. 자신은 단지 덩치가 좀 좋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덩치는 살이 아니라 전부 근육이었다.
염현필은 실실 쪼개는 인혁의 얼굴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 자식이 감히 형한테…….’
그러나 아무리 투덜거려도 배틀은 배틀이었다. 나이로 누르는 게 아니라, 랩으로 눌러야 했다.
하지만 인혁의 랩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형 랩은 요리왕 비룡, 매번 미미(美味)해.
적당한 라임이 생각 안나, 그냥 시시해
우리 팀 감독 준형이가 내게 지시해
‘현필이 형을 잡아먹어’ 이건 시식회
인혁이 가지고 있는 랩에서의 장점은 꽤나 많았다.
한국에서 드문 병렬 구조의 가사. 레이백을 즐겨 사용하는 희귀한 그루브. 비트를 해석하는 방식의 자유로움.
그러나 상현은 배틀 랩에 적용되는 인혁의 가장 큰 장점은 ‘능청스러움’이라고 생각했다.
‘현필이 형을 잡아먹어’에서는 준형을 따라하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가, ‘이건 시식회’를 뱉을 때는 금방이라도 뭔가를 먹을 듯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능청스러울 정도로 자유로운 감정 표현.
이러한 인혁의 장점이 배틀 라임(Battle Rhyme)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게다가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센스 있는 표현들은,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워드 플레이어(Word Player)라 평가받는 상현도 감탄할만한 것들이었다.
난 적어도 평타는 치는 놈
적이어도 평가는 뛰는 놈
바닥에서 기어도 기어코 뒤엎고
앞으로 나와 내 기어는 Four
인혁의 랩이 실수 없이 마침표를 찍었다.
꽤나 만족스러운 랩이었고, 인혁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랩이었다.
이제 관객들의 시선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가볍게 박자를 타는 염현필에게 향했다.
쉴 틈 없는 랩과 워드 플레이의 향연이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소리를 지르는 관객들보다 조용히 무대에 집중하는 관객들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인혁과 염현필은 변화무쌍한 플로우를 즐겨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랩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속도였다.
인혁은 중간 속도의 랩을 기준으로, 느린 랩으로 변화를 주는 래퍼였다.
RPM(랩의 속도)을 떨어트리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는 랩 속도를 유지하더라도, 박자를 비우고 라임 음을 늘리는 방법으로 마치 랩이 ‘느려진 것처럼’ 들리게 만드는 방법을 선호했다.
야구로 따지면 두둥실 휘어지는 슬로 커브와 같았다.
그에 반해 염현필은 중간 속도의 랩을 기준으로, 빠른 랩으로 변화를 주는 래퍼였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미는 박자인 인혁과 다르게 박자를 당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똑같은 속도의 랩을 해도 박인혁의 랩은 느긋하게, 염현필의 랩은 타이트하게 들리는 효과가 있었다.
인혁의 랩이 슬로 커브라면 염현필의 랩은 파워 커브였다.
깊이 파고들면 둘은 꽤 닮은 점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힙합 팬들은 인혁과 현필을 비교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얼핏 듣기에 너무 다른 랩을 구사하기 때문인 듯 했다.
‘다르긴 다르지. 내가 좀 더 낫지.’
그렇게 생각한 염현필 특유의 중속-고속을 오가는 변화무쌍한 랩이 시작되었다.
내 성격은 언제나 급해
날 건드는 너, 기억해
내 이름 Feelnight
99년부터 랩에다가 걸었지 여태
난 멋지진 않아 절대
대신 멋을 뱉을게 랩에
니가 날 인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스스로 인정하기 위해서 랩해
염현필의 랩에는 구체적으로 인혁을 언급하는 가사가 없었다. 박인혁, 혹은 In-Hulk라는 단어가 연음이 약해서 속도감을 형성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염현필은 ‘너’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절묘한 제스쳐로 인혁을 가리키며, 이 랩이 지칭하는 대상을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상기시켰다.
굉장한 노련함이었고, 어지간한 무대 경험으로는 흉내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해’라는 발음이 ‘패’로 들릴 정도로 짧게 끊어치는 염현필의 랩이 점차 속도감을 더하기 시작했다.
내 상대를 누르고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내 Agenda
이곳은 Rhyme이란 칼과 Flow란 방패로 싸우는 비좁은 Arena
넌 전혀 몰랐지, 그림자 바로 밑 숨어서 기회를 노렸지, 아래 나
암행어사, 네 죄목을 살피고 궁궐로 돌아가 왕에게 고하려 알현함
여전히 건재한 왕들의 왕좌를 함부로 차지 하려한
수많은 래퍼들 사이에서 내 이름 걸고 이의를 제기함
미들톤의 속도감 있는 랩이 스피커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랩에 집중하려 환호를 생략한 관객들의 입이 그들도 모르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슬렁거리는 인혁의 랩과 한 곳을 일점하는 현필의 랩은 전혀 다른 매력을 풍기며 상반된 바이브를 전달했다.
그렇게 염현필의 랩이 끝나고 10초간의 투표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관객들은 우왕좌왕 할뿐 쉽게 투표를 진행하지 못했다. 실력적으로 누가 나았다고 분간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디제이 킬드릭은 턴테이블을 조작하며, 발아래의 모니터를 통해 투표현황을 확인했다.
10초가 거의 다돼감에도 총 투표수는 70표가 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의 관객들이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 Verse 20. Battle Rhym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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