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37화 (137/309)

< Verse 20. Battle Rhyme >

***

경연시작 직전.

무대에 오른 허태진 피디는 꽤나 오랫동안 오늘의 진행 방식에 대해서 설명했다. 곡 단위의 대결이 아니라 곡 안에서의 대결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혼동할 것을 염려하는 듯했다.

‘어차피 스크린으로 트랙 정보가 뜰 텐데, 너무 길게 설명 하시는 거 아니야?’

상현의 생각처럼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드디어 허태진 피디의 설명이 끝났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허태진 피디의 물음에, 다가올 공연의 시작을 눈치 챈 관객들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웅성웅성하는 대화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순간, 예고 없는 외침이 공연장을 울렸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그 최전방의 베테랑-!”

허태진 피디의 힘찬 목소리 사이로 스타즈 레코드의 단체곡인 ‘은하수’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화려한 불꽃들이 무대 위에서 뿜어졌다.

“스타즈 레코드-!”

-꺄아아아악!

-스타즈 레코드!

허태진 피디의 왼편에서 걸어 올라오는 스타즈 레코드의 모습에, 관객들의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오늘 경연이 곡 내에서 벌어지는 배틀인 만큼,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소속을 확연히 들어낼 수 있는 드레스 코드를 갖춘 상태였다.

스타즈 레코드는 짙은 붉은색의 야구잠바를 입고 있었는데, 등 뒤에는 STARZ라는 문구가 새겨져있었다.

배상욱, 염현필, 우연우, 오명진, 김유화.

99년부터 한국 힙합의 최전방을 지키던 스타즈 레코드가, 마침내 무대 위로 등장했다.

붉은 색으로 치장한 5명의 베테랑들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으며 큰 기대감을 주었다.

-꺄아아아악!

-와아아아악!

도저히 환호성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난감하게 웃던 허태진 피디가 불꽃을 한 번 더 터트렸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불꽃이 피어오르자, 관객들의 환호성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이어서-!”

허태진 피디의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익숙한 808 드럼소리가 흘러나왔다.

888 크루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인트로.

비명과도 같은 환호성.

“혜성처럼 등장한 충격의 신인! 888 크루-!”

Eight, Eight, Eight Remix가 공연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환호성과 노래를 배경삼아 8명의 888 크루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의 준형. 후미의 인혁.

준형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어깨를 들썩이며 비트를 타는 인혁의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뤘다.

-꺄아아아아악!

-팔팔팔 크루!

-이상현!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 같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방청권을 신청한 이들만 모였다고 하지만, 정말 굉장한 인기였다.

그 순간, 무대에 도착한 888 크루가 오른손에 감고 있던 수건을 양손으로 펼쳤다.

하얀색 수건이 펼쳐지며 드러난 검은색의 로고.

관객들의 눈에 들어오는 심플한 문구.

888 X 888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것 같던 함성 소리가 더욱 커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거 반칙이잖아!”

무대 반대편에서 들리는 배가의 목소리에 상현이 씩 웃었다. 아직 더 큰 반칙이 남아있었다.

그 순간 관객들은 역동적인 자세로 수건을 던지는 상현을 볼 수 있었다. 선두의 관객들이 수건을 받기 위해 손을 쭉 뻗었다. 그와 동시에 남은 7개의 수건이 허공을 수놓았다.

예고하지 않은 행동에 스태프들이 기겁하며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안전사고는 발생하지 않았고, 수건을 받은 관객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오늘 888 크루는 검은색의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후드티에는 당연히 그들을 상징하는 심볼이 새겨져있었다.

062 X 888

888 크루가 광주를 대표한다

처음 만들 때는 바램과 포부 들어있는 문구였는데, 이제는 거의 사실이 되어버렸다.

스타즈 레코드, 888 크루에 이어서 바운스 라임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환호를 받으며 등장한 바운스 라임은 하얀색 저지를 입고 있었다.

그 순간 상현과 돌핀의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오갔지만, 둘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흑(黑), 백(白), 적(赤)으로 스스로를 표현한 16인의 뮤지션들이 등장을 완료했다.

상현은 귀를 때리는 환호성을 즐기며 무대 위의 뮤지션들을 살폈다.

적색의 스타즈 레코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부심으로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형들은 그럴 자격이 있지.’

888 크루는 아직까지 한 번도 스타즈 레코드를 이기지 못했다. 1 라운드 경연 때도, 게릴라 콘서트 때도 아쉬운 패배를 맛봐야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888 크루가 승리하는 날이 될 것이었고,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백색의 바운스 라임은 약간은 경직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돌핀의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평소에는 별다른 호승심이나 의욕을 보이지 않는 뮤지션이었는데, 오늘은 예외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적나라한 배틀 랩’ 형식에는 회사의 마케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구체적인 상대를 공격하는 배틀 랩은, 그 상대가 없는 자리에서는 가치가 확연히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음 앨범 수록곡을 부르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조만간 싱글 발매할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소속사가 바운스 라임에게 요구하는 것은 딱 하나였을 것이다.

‘무조건 이겨! 4라운드에 진출해!’

그리고 이 같은 요구는 돌핀이 그동안 간절히 원하던 것일 거였다. 신각이나 에디션도 같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프닝을 멘트를 담당한 허태진 피디는 아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분위기를 띄울 필요도 없었고,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도 없었다.

단지 한 마디만 하면 됐다.

“힙합 더 바이브 3라운드 배틀! 지금 시작합니다!”

허태진 피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늘 경연의 Host DJ를 맡은 DJ. Killdrik(디제이 킬드릭)이 힙합 더 바이브의 주제가를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2분으로 예정된 킬드릭의 플레이가 끝나면 ‘일대일 배틀’ 곡 중 하나가 무작위로 플레이된다.

사전 공지는 없었다. 뮤지션들은 인트로를 듣는 순간, 자신의 출격할 곡이라면 곧장 튀어나가 마이크를 잡아야했다.

“Make some noise-!”

때문에 흥이 오른 킬드릭이나 관중들과는 달리, 16인의 뮤지션들은 긴장감을 유지한 채 무대 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풍경은 기존의 경연처럼 질서 정연한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비보이들이 배틀을 벌이는 모습과도 같았다.

관객들의 왼쪽에는 붉은색의 스타즈 레코드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검은색의 888 크루가 있었다. 그리고 마주보는 정면에는 하얀색의 바운스 라임이 있었다.

3개의 무리로 갈린 뮤지션들은 아군의 랩에 환호하고, 적군의 랩에 야유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Hip, Hip, Hip, Hip Hop The Vibe!

신나는 사운드와 함께 디제이 샷이 끝이 났다.

그 순간 디제이 킬드릭의 손이 스크린에 나타났고, 151명의 이목이 집중된 손은 턴테이블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재생순서를 임의로 맞추는 것이었다.

이어서 킬드릭은 재생버튼을 누를 듯, 말듯 관객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우우- 하는 관객들이 장난 섞인 야유가 들리자, 킬드릭이 마이크를 잡았다.

“원해요?”

“네!”

“준비됐어요?”

네-! 하는 관객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우렁찬 킬드릭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찢을 듯이 토해졌다.

“Let`s go get`em-!"

레스 고 게럼!

자, 나가서 저놈들을 이겨버리자!

첫 번째 전장이 될 이스트 사이드 묵직한 비트가 공연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두 명의 뮤지션이 무대 중앙으로 튀어 올라갔다.

* One and One Battle

Stars Record VS Bounce Rhyme

김유화 VS 신각

일대일 배틀의 그 첫 번째는 ‘스타즈 레코드’와 ‘바운스 라임’의 배틀이었다.

스타즈 레코드의 김유화.

바운스 라임의 신각.

보컬 대 래퍼라는 보기 드문 구성의 배틀.

사실 가사로 전달할 수 있는 자극성 측면에서는 보컬인 김유화가 래퍼인 신각을 이길 수 없었다. 멜로디를 살려야하는 노래는 랩보다 직설적인 측면이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현은 신각이 이러한 이점을 믿고 방심하는 순간, 김유화에게 잡아먹힐 것을 예측했다. 상현이 그동안 경험한 김유화의 보컬은 한국의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라는 호칭과 꼭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힙합 비트를 보컬로써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천재적인 뮤지션이었다.

나스(Nas)의 Made you look을 듣고 나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In my bed를 듣는다면, 두 노래가 같은 비트라는 것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You know I`m no good을 접하고 이센스의 I`m no good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현의 생각처럼 배틀은 일방적인 분위기로 전개되었다. 신각은 연습 때와 확연히 달라진 김유화의 보컬에 기세부터 밀린 것 같았다.

김유화의 8마디, 신각의 8마디.

다시 김유화의 8마디, 신각의 8마디.

총 4번의 오고가는 공격 사이로 팀원들의 날선 반응이 이어졌다. 스타즈 레코드는 신각이 미묘한 실수를 할 때마다 일부러 아유를 질렀다.

신각의 실수는 원래대로라면 일반 관객들이 알아차리기 힘든 실수였다. 하지만 뮤지션들의 야유가 이어지고 신각이 당황하자, 관객들도 실수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신각이 마지막 8마디의 도입박자를 놓치는 순간, 승부의 추는 완전히 기운 것 같았다.

‘역시 유화 누나는 조커 같은 존재야.’

상현은 888 크루 역시 김유화를 조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신각의 랩이 끝나며 첫 번째 배틀이 끝이 났다.

배틀은 끝이 났지만 비트는 10초정도 더 이어졌다. 아직 투표를 하지 못한 이들에게 주어진 투표 시간이었다.

그 10초 동안, 스믈스믈 비트가 바뀌기 시작했다.

둔탁한 드럼의 질감이 가볍게 바뀌었고, 멜로디가 사라지며 아주 기본적인 루핑 박자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스트링 사운드가 자취를 감췄다.

동시에 스크린에 배틀의 정보가 떠올랐다.

* One and One Battle

Bounce Rhyme VS 888 Crew

에디션 VS 오민지

민지는 비트를 듣자마자 무대 중앙으로 뛰어갔다.

888 크루 멤버들은 민지를 보내며 고함을 질렀다.

“발라버려!”

“떨지 마!”

민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잡았다. 뒤이어 도착한 에디션도 마이크를 잡았다.

동시에 여성 관객들의 함성이 커졌다. 이번 배틀이 여성 래퍼라는 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치열한 배틀이 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에디션과 오민지는 연습 중에 한 번도 랩을 맞춰보지 않았다. 민지가 두어 번 정도 맞춰보자고 제안했지만 에디션이 거절했었다.

서로의 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에디션의 선제공격이 시작되었다.

Eight, Eight, Eight에서 실력 수준 8위

너보다 차라리 우민호 랩이 훨씬 Shining

무대 위는 파리(Paris), 내 랩은 패션위크

날 보고 느끼는 절망, Passion Break

에디션의 랩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오민지의 표정이 애매하게 바뀌었다. 평소에 들었던 에디션의 랩보다 한참 못했기 때문이었다.

< Verse 20. Battle Rhym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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