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36화 (136/309)

< Verse 20. Battle Rhyme >

“내가 널 보자고 한 이유는 얼마 전에 좀 이상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야.”

“이상한 소리요?”

돌핀은 19살에 데뷔해서 27살인 지금까지 쇼 비즈니스 판에서 굴렀다. 연습생 시절까지 따지면 횟수로 10년이 넘는 긴 세월이었다.

데뷔할 때 친하게 지내던 매니저들은 대부분이 팀장이거나 실장이었고, 데뷔할 때 팀장이던 이들 중에는 사장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가 있었고, 주워듣는 것도 많았다.

그러나 돌핀은 듣는 게 많을수록, 아는 게 많아질수록 더욱 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형 소속사와 메이저 방송국이 좌지우지하는 한국의 기형적 쇼 비즈니스계의 생태계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돌핀이 큰마음을 먹은 것은, 그가 888 크루의 음악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10년이 넘게 가슴 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던 이상향의 음악. 이상향의 팀. 이상향의 모습. 그것이 888 크루에는 있었다.

마침내 돌핀이 입을 열었다.

“오경 엔터가 널 노리고 있어.”

“어…… 캐스팅 제안이라면 1라운드 경연이 끝나고 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상현은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았는데, 오경 엔터의 이야기가 나오기에 맥이 빠졌다.

그러나 돌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건 알고 있어. 홍경수 팀장이 캐스팅했지?”

“네.”

“나도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야……. 난 오경 엔터 소속이 아니니까. 다만 내가 듣게 된 정보는, 예산 편성이 픽스된 2007년의 A&R 사업계획에 니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거야.”

상현은 그제야 돌핀의 말을 이해하고 표정이 바뀌었다.

대기업의 사업계획은 픽스 되기가 어렵다. 그것이 2년 뒤의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스가 되는 경우는, 군경 계열이나 철강 계열처럼 과거부터 이어진 보수적이고 관성적인 사업이거나, 어떠한 방해가 있더라도 반드시 진행시키려는 사업이었다.

“제 이름 만요? 아니면 888 크루 전체가요?”

“니 이름만.”

상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홍경수 팀장이 했던 캐스팅 제안에는 준형과 하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왜 나만?’

상현의 상념을 깨는 돌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건 나도 확실히는 모르는 이야긴데, 오경 엔터의 사내정치와 연관이 있나봐. 곧 오경 엔터의 미디어 콘텐츠 부서가 오경 미디어로 독립할 거야. 현재 오경 미디어의 요직을 두고 첨예하게 갈등을 벌이는 두 계파가

있는데, 한 쪽은 홍경수 팀장의 라인이고 다른 한 쪽은 오연주 차장이라는 본사 금수저 라인이야.”

상현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듣게 된 오연주란 이름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 형이 하시는 말씀은 사내정치와 저를 캐스팅하려는 움직임 사이에 접점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음…… 확실하진 않아. 내가 두 정보를 접한 시기와 장소가 달랐거든. 다만 느낌이란 게 있잖아. 이 사람들은 이 이야기와 저 이야기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구나, 라는 느낌.”

상현은 문득 인디 키드 형들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앞으로는 스트리밍의 시대가 열릴 것이고, 뮤지션들의 입지가 줄어들 거라는 이야기.

왠지 이 3가지 이야기에 묘한 접점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오연주 차장과 내 접점이라면 사고 보상금 밖에 없지 않나?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오연주 차장이 일을 허술하게 처리했을 것 같진 않아. 게다가 단 몇 달 만에 차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는 이야기는 현 상황이 나쁘

지 않다는 이야긴데…….’

물론 사내 정치란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터지는 것이긴 하다. 상현이 사회초년생으로 대기업에 다닐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상현의 사수 중 한 명이 A4 용지 비품 공급 업체한테 빽 마진도 아닌, 진짜 그냥 술 한 잔 얻어먹은 게 정치 싸움으로 번진 적도 있었다.

근데 그건 썩은 동아줄을 골라내는 작업이었지, 오연주 차장처럼 샤넬 다이아몬드 포에버 급의 ‘빽’을 가진 사람한테 하는 일이 아니다.

상현은 한참동안 고민했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일단 오늘 촬영이 끝나고 오연주 차장에게 전화를 해서 정보를 얻는 게 최우선일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불쑥 불편한 마음이 생겨났다.

오경 엔터고 나발이고 888 크루는 오롯이 그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켜야 했고, 상현은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형이 미리 말씀해주신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돌핀은 자신감 넘치는 상현의 표정을 보고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너희는 대형 기획사가 가지고 있는 파워를 잘 몰라. 너 혹시 아역 배우 중에 한호란 사람 기억 나?”

“한호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역 배우 이후에 가수로 데뷔한 형인데, 12년짜리 노예 계약도 지긋지긋하고 자기 음악도 하고 싶어서 소송을 걸고 소속사에 나왔어. 그리고는 9년 동안 방송을 비롯한 그 어떠한 쇼 비즈니스 커넥션에서도 환영받지 못했

어. 이러한 배척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고.”

돌핀은 대형 기획사의 파워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현의 솔직한 심정은 ‘고작 그게 다라면’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888 크루는 방송 출연이나 연예계 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제 아무리 유명세를 얻어도, 그들은 비 더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지키는 언더그라운드다. 그들의 앞길을 막으려면 음악성을 훼손해야 하고,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의 마음을 훼손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충고 정말 감사합니다.”

상현은 돌핀에게 정중히 인사하고는 방송국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8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지잉 울며 문자를 보여줬다.

준형이었다.

-너 어디냐.

-니네 칫솔이랑 치약 사려고 편의점 가는 중.

-그거 내가 어제 새벽에 사왔어. 빨리 정문으로 와. 밥이나 먹으러 가자.

-다들 일어났어?

-내가 깨웠어.

문자를 받고 방송국으로 돌아가니 찢어져라 하품 하며 자신을 기다리는 7명의 멤버들이 보였다.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났다.

“뭘 쪼개.”

“뭐 먹을 거냐?”

“어으, 춥다. 추우니까 국물 있는 거 먹자.”

“어제 허 피디님이 국밥 먹으려면 방송국 뒤편으로 가라더라.”

“그래요?”

김환의 소중한 정보에 888 크루 멤버들은 방송국 뒷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두터운 겨울 구름에 가려있던 태양이 얼굴을 드러내며 밝은 아침햇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양쪽에 위치한 방송국의 높은 건물 사이로 햇빛이 만들어낸 곧은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길은 구름이 밀려나는 속도에 맞춰 점차 길어지기 시작했다.

888 크루가 나아가려던 방향으로 말이다.

“오오.”

꽤나 멋진 장면에 크루원들이 감탄했다.

“뭐야, 좋은 징조 같은데?”

“저 끝에 있는 것은…… 엑스칼리버!”

장난기가 발동한 인혁이 햇빛의 길 끝에 있는 주차금지 표지판을 뽑으려 애썼다. 그러나 표지판은 시멘트가 가득 채워진 통에 꽂혀 있었기에 쉽게 뽑히지 않았다.

“칫, 결계인가.”

아침 댓바람부터 뻘짓거리를 하는 인혁을 향해 한 소리 하려던 민지는 문득 볼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2005년의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첫눈은 천천히 바람에 휘날리며 햇빛이 만든 길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상현을 비롯한 888 크루 멤버들이 서있었다.

‘하얗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눈은, 새하얗게 보였다.

상현이 손을 내밀어 눈을 받았다. 별빛과도 같은 반짝거림이 그의 손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막상 두 손에 들어온 눈은 회색빛이었다.

검은색도 아니고, 하얀색도 아닌 회색.

분명 하늘에 있을 때는 하얬는데 말이다.

“뭐해?”

그때 하연이 상현을 재촉했다. 어느새 멤버들은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한 상현은 빛이 만드는 길 위로,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

힙합 더 바이브 2의 3라운드 공연 시간이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출연진들은 혹시나 가사를 까먹지 않을까, 박자를 절지 않을까, 중요한 포인트들을 살리지 못할까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팀들 간의 호흡을 맞추는 연습은 사라져있었다.

지금 호흡을 맞추는 상대가, 잠시 뒤에는 거친 설전을 벌일 적수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묘한 긴장감이 맴도는 힙합 더 바이브의 세트장에서 진행되는 연습은 개인연습 뿐이었다.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가 4마디가 추가된 벌스를 점검하려 포어캐스트(Forecast)를 맞춰본 것을 제외하면 말이었다.

분위기를 눈치 챈 카메라맨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동안 몇 번 나오지 않았던 뮤지션들 간의 날선 그림들이 카메라에 잡혔다.

허태진 피디는 오히려 임시로 바꾼 방송 포맷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릴라 콘서트도 대성공이었고……. 이런 게 전화위복인가?’

인터넷에서는 게릴라 콘서트 미션 때문에 난리가 났다. 어제부터 슬슬 검색어 순위에 이름을 올리더니,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는 마침내 1위를 찍기도 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888 크루, 스타즈 레코드, 바운스 라임의 홍보를 접한 탓도 있었지만, 게릴라 콘서트를 관람한 이들의 후기가 뒤늦게 우후죽순처럼 올라오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또한 힙합 더 바이브의 열혈 시청자들은, 게릴라 콘서트는 예고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며 뭔가 상황이 바뀐 것 같다는 예언 아닌 예언을 하기도 했었다.

“선 작가. 방청객들이랑 연락은 다 해봤지?”

“네. 부족한 인원은 예비 명단에서 끌어서 151명 딱 맞췄습니다.”

본래 방청객들이 관람할 3라운드 무대는 토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상식 결방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공연 시간이 일요일로 미뤄졌고, 참여를 하지 못하게 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피디님, 혹시 방청권 남는 게 있냐고 문의가 많이 오는데요. 아니면 굳이 투표는 안 해도 되니까, 구경할 수 있냐고.”

“누가? 기획사 관계자들이?”

“관계자들은 얼마 안 되고요, 연예인들이 매니저를 통해서 연락을 많이 하네요.”

“에이급도 있어?”

“에스급 배우들도 있습니다.”

선민아 작가한테 연예인들의 이름을 들은 허태진은 적잖이 놀랐다. 방송에 나오는 걸 극히 꺼려하는 충무로 배우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에 노출돼도 상관없고, 제일 앞자리에 서줄 수 있는지 물어봐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한테는 짤막한 인터뷰도 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괜히 막 물어보지 말고 눈치 잘 봐. 말 안 해도 알지?”

“네네. 당연히 출연료는 없죠?”

“예산 거덜 낼 일 있냐?”

허태진 피디는 흐뭇한 표정으로 전화통을 부여잡기 시작하는 선민아 작가를 바라보았다.

힙합 더 바이브 2는 그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 최고의 작품이 될 것 같았다.

죽은 자식 불알 좀 그만 만지라는 선배 피디들의 말을 무시하고, 끝까지 힙합 컨텐츠에 매달린 게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근데 에피소드 2가 걱정이긴 하네. 섭외된 팀들이 888 크루만한 화제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허태진 피디는 한참동안 에피소드 2에 출연할 4팀을 생각하며 행복과 불안이 교차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 17시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오늘 리허설에는 평소와 달리 완곡을 부르는 뮤지션이 없었다. 대부분 마이크 세팅과 모니터링만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면서 자신에 대한 방어기재였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신나게 싸울 텐데, 리허설 때부터 공격하고 싶지 않다는 배려. 리허설 때부터 공격당하고 싶지 않다는 방어.

리허설이 끝나는 순간부터 방청객들의 입장이 시작되었고, 입장이 완료된 시간은 18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몇몇 유명 연예인들이 촬영장에 나타나면서 방청객들 사이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지만, 뮤지션들은 힐끔 쳐다만 봤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18시 30분.

힙합 더 바이브 2의 3라운드 경연이 그 시작을 알렸다.

***

< Verse 20. Battle Rhym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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