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20. Battle Rhyme >
Verse 20. Battle Rhyme
게릴라 콘서트가 끝이 났다.
끝도 없이 반복된 앵콜 요청에도 888 크루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공연을 했고, 관객들은 그러한 그들의 열정에 마땅한 환호를 보냈다. 결국 888 크루의 공연은 30분이나 딜레이 되어 9시 30분에 끝이 났다.
“진짜 완전 재밌어!”
“다른 팀도 이만큼 재밌었을까?”
“스타즈 레코드 쪽으로 간 내 친구가 그쪽도 재밌었다고 하긴 하는데, 그래도 888 크루가 제일 재밌지 않았을까?”
빌딩을 나오며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삼삼오오 떠드는 관객들의 표정에는 흥분이 가득차 있었다.
사실 홍대 문화를 사랑하는 언더그라운드 팬들이 아니면 2005년은 힙합 공연을 볼 기회가 극히 부족한 시기이기도 했다.
상현은 스타즈 레코드도, 바운스 라임도 모두 공연을 잘했길 바랐다. 오늘 공연을 관람했던 1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국 힙합에 든든한 지지자가 될 수 있도록.
“아이고 죽겠다.”
“이제 밥 먹으러 가나? 아까 다른 팀들은 다 먹었잖아.”
“으어, 집 가고 싶다.”
빌딩을 나와 방송국으로 향하는 승합차에 올라탄 888 크루 멤버들은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그들은 꿈속에서도 공연을 하고 있었다.
얼핏 잠에서 깬 상현은 희한한 소리를 내는 멤버들을 보며 슬쩍 웃음 지었다.
‘이러한 시간이 영원하기를.’
샤라웃(Shout-Out) 888 Crew.
게릴라 콘서트 미션의 결과에 따라 이어질 3라운드 배틀에서 스타즈 레코드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물론 1위를 차지했다고 모든 비트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우선권 행사의 기회가 더 많은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곡들에서 현명하게 우선권을 행사한다면, 꽤나 유리한 것도 사실이었다.
“888 크루 공연은 어땠어?”
허태진 피디가 밥을 먹고 촬영장에 널브러진 888 크루를 힐끔 보며 선민아 작가에게 물었다.
선민아는 아무 말 없이 양손의 엄지를 들어올렸다.
“좋았어? 확실해?”
“ENG 카메라 잡은 유민이가 리듬 타다가 카메라 흔들린다고 혼났어요.”
“그 망부석이? 그럼 확실하네. 미션 홍보 중에는 재미있는 그림 좀 나왔고?”
“홍보 자체가 아니라 888 크루의 긍정적인 모습에 포인트를 둔다면 엄청 나왔죠. 반복적으로 홍보만 하는 그림은 아니었으니까요. 아, 완전 재미있는 장면도 하나 있어요.”
선민아가 김혁구와 상현의 브로맨스(?)를 설명했다.
허태진은 설명만 듣고는 별다른 감이 안 왔지만 선민아의 반응이 좋아서 일단 기대를 가졌다.
“피디님 식사는 하셨어요?”
“내가 했겠냐.”
한숨을 푹 내쉰 허태진 피디는 또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공연을 끝내고 기운이 쭉 빠진 888 크루에게 주어진 것은 달콤한 휴식이 아니었다. 더욱 치열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비트 셀렉팅과 연습이었다.
게다가 비트 셀렉팅과 연습은 다른 팀들과 함께해야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미묘한 신경전과 눈치싸움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의 단체 배틀은 포어캐스트(Forecast)로 하신다는 말씀이죠?”
“네. 대신 후렴구를 빼버리고 배틀 랩의 취지에 맞게 4마디씩 추가하려고요.”
“그럼 12마디씩 여섯 분이 하시는 거네요?”
“그렇죠. 아마 플레이 타임이 3분 40초가 조금 넘을 거예요.”
“스타즈 레코드랑 바운스 라임은요?”
“아직 제목이랑 비트는 못 정했는데, 멤버는 정해졌어요.”
888 크루, 스타즈 레코드, 바운스 라임은 최대한 의견을 조율하며 곡에 대한 세부사항들을 맞춰나갔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된 이야기였지만, 종종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뮤지션의 고집이 충돌하는 경우들이었다.
결국 의견을 조율하고, 한 번씩 맞춰보는 것에만 3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최종적인 대진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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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8 크루 VS 스타즈 레코드
1 - 일대일 배틀 : 박인혁 VS 염현필
2 - 이대이 배틀 : 김환, 신하연 VS 김유화, 오명진
3 - 단체 배틀 : Forecast
(신준형, 박인혁, 이상현 VS 배상욱, 염현필, 우연우)
* 888 크루 VS 바운스 라임
1 - 일대일 배틀 : 오민지 VS 에디션
2 - 이대이 배틀 : 이상현, 신준형 VS 신각, 돌핀
3 - 단체 배틀 : Do the Rap
(신준형, 김환, 신하연 VS 돌핀, 신각, 에디션)
* 스타즈 레코드 VS 바운스 라임
1 - 일대일 배틀 : 김유화 VS 신각
2 - 이대이 배틀 : 오명진, 염현필 VS 돌핀, 에디션
3 - 단체 배틀 : Control Tower
(배상욱, 우연우, 염현필 VS 돌핀, 신각,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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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순서와 경연 평가는 간단했다.
우선 배틀 순서는 일대일 배틀 3곡을 먼저 끝내고, 이대이 배틀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연히 이대이 배틀 3곡을 끝낸 뒤에는 단체 배틀을 진행될 예정이었다.
종류별 배틀을 구성하는 3곡의 순서는 재생 프로그램의 랜덤플레이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경연 평가는 더욱 간단했다.
2라운드처럼 몇 표를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단지 이겼는지 졌는지가 중요한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888 크루와 바운스 라임의 일대일 배틀에서 오민지가 승리를 한다면 888 크루에 +1점이 추가되었다. 한 팀당 6번의 랩 배틀이 있으니까, 한 팀이 독식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점수가 6점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동일한 점수로 공동 1위 팀이 발생한다면 추가적으로 2분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공동 1위 팀들은 2분 내에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는 공연을 하고, 그 곡으로 최종 결과를 산출하는 재투표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각 팀의 히든 트랙(Hidden Track)은 비밀로 부쳐졌다.
“공연 시간은 내일,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이군요. 오늘 18시 30분입니다. 리허설 예정시간은 17시이고요.”
말을 하는 허태진 피디는 출연진들보다 더욱 피곤해보였다. 다크 서클이 짙어진 것이 확연히 보였다.
“공연장은 2라운드와 동일하게 케이엠 뮤직박스 세트장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내일 16시까지 자유롭게 연습을 하시면 됩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연습을 하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잠을 자는 지를 포함해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나가서 야식 같은 거 사먹어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전부 자유니까요. 다만 팀들 간의 의견을 교환할 때는 아까 말씀드렸던 카메라 거치 포인트에서 해주시길 당부 드리겠습니다. 숙소는 아시죠? 여성분들은 2층, 남성분들은 3, 4층 숙직실입니다. 이제 스태프들은 모두 퇴근할 예정이고요, 저는 편집실이나 피디룸에 남아있을 예정입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 전화주시면 됩니다.”
“와, 피디님도 고생이 정말 많으시네요. 집에 안가세요?”
“피디들이 괜히 죽으면 방송국 귀신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도 시청률도 잘 나오고 화제성도 높으니까 힘이 나네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피곤에 찌든 허태진 피디를 선두로 스태프들이 우르르 퇴장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힙합 더 바이브 세트장에는 16명의 뮤지션들만 남게 되었다. 하루 종일 시끄러웠던 세트장이 적막해지니 주변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림 좀 맞춰볼까요?”
준형의 물음에 배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형들 배고파서 죽겠다. 요 앞에 24시간하는 부리또 전문점 있던데 우리 거기 좀 다녀오려고. 니들 것도 사다줄게.”
“형들 계세요. 저희가 다녀올게요.”
“아냐,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래. 돌핀아. 니네 애들도 먹을 거지?”
먹고 자면 얼굴이 팅팅 붓는다는 에디션을 제외하면 모두들 오케이를 했다.
그렇게 새벽 1시의 부리또 파티를 시작으로 16명의 뮤지션들의 끝없는 연습이 이어졌다.
***
상현은 잠을 자다가 복도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핸드폰을 보니 7시 반이 막 넘어가고 있었다. 부리또를 먹고 잤더니 입안이 깔깔했다.
‘멤버들 칫솔이랑 치약도 없지?’
이왕 잠에서 깬 김에 편의점에 다녀오는 게 좋을 듯했다. 기지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상현은 의외로 몸이 가뿐하다는 걸 느꼈다.
2시 반쯤 잠들어서 다섯 시간이나 잔 것 같은데 컨디션이 괜찮았다.
-끼익.
크루원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히 문을 열고 나온 상현은 복도를 지나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오는 듯한 돌핀이었다.
‘연예인들은 밤샘이 생활이라더니, 엄청 멀쩡하네?’
자신이 자러갈 때도 안자고 있던 돌핀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활동하는 것을 보니 절로 존경심이 생겼다.
상현이 돌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밤 새신 거예요?”
“아니에요. 세 시간 정도 잤어요.”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한참 형님이신데.”
상현의 말에 돌핀이 웃으며 말을 놓았다.
“너 형 이름 알아?”
“어…… 아뇨.”
돌핀하면 떠오르는 것은 노예계약 때문에 붙여진 ‘불쌍한 돌고래’라는 미래의 호칭밖에 없었다.
뒤늦게 알게 된 돌핀의 본명은 음한유였다. 음 씨는 처음 들어보는 성이였다.
“어디가고 있었어?”
“치약이랑 칫솔이 없어서 편의점 좀 다녀오려고요.”
“커피 한 잔 마시고 갈래?”
상현은 돌핀과 함께 자판기 커피로 아침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돌핀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 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세요?”
상현의 질문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돌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내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음악이요? 랩 퍼포먼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사실 상현은 돌핀이 가진 본연의 랩에 대해 잘 몰랐다.
이제까지 그가 보여준 것들은, 회사의 기획에 맞춰 적당히 한 랩들뿐이었다. 미래에 언더그라운드 레이블을 차린 뒤에 보여주는 결과물들은 기억이 좀 났지만.
“아니,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안 되겠구나. 지금 나는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네가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회사에서 강요하는 음악을 하고 있어.”
“알고 있어요. 그런 느낌도 많이 받았고요.”
“그래, 너희들은 금방 느낄 수 있겠지.”
“근데요, 형.”
상현은 돌핀이 자신에게 해주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역시 돌핀에게 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언젠간 언더그라운드 힙합으로 돌아올 동료에게 말이다.
“1라운드 때도, 2라운드 때도 느꼈어요. 형이 원하지 않는 방향성의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런데 제가 그걸 어떻게 캐치했는지 아세요?”
“어떻게?”
“대충하시니까요. 나는 원래 이런 수준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회사의 저급한 수준에 맞춰줬다. 이게 너무 쉽게 눈에 들어와요.”
상현은 돌핀을 비난할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언급하는 돌핀의 행동은 언더그라운드로 돌아온 이후에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었다.
-돌핀은 랩을 대충한다.
그가 결국 래퍼의 길을 포기하고 프로듀서의 길로 들어선 이유기도 했다.
한국 힙합 씬에는 이러한 돌핀과 정반대의 경우를 보여주는 한 명의 래퍼가 있었다.
바로 랩 지니어스, 래퍼 산이었다.
산이(San-E)는 언더 힙합 팬들의 응원도, 비난도 참 많이 받은 래퍼였다.
데뷔초반에는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팬들의 광신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지만, 2013년 이후부터는 대중적인 사랑 노래를 한다며 강도 높은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이는 몇 년 뒤에 다시 언더 힙합 팬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데뷔 때처럼 전폭적인 지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산이가 랩은 잘하지’, ‘거지같은 사랑 노래를 하지만 랩은 열심히 하잖아’ 등등의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근본적인 원인은 산이가 어떤 트랙에서도 최선을 다해 본인의 랩을 했다는 것에 있었다.
돌핀과는 다르게 말이다.
상현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상현은 직접적으로 열심히 하라는 등의 말은 삼켰다.
그런 것은 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괜히 기분만 상할 수가 있었다.
돌핀이 스스로 납득해야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었다.
“제가 주제넘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이만 편의점으로 가봐야겠습니다.”
상현이 정중히 인사를 하자,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돌핀이 상념에서 깨어나 상현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널 보자고 한 이유는 얼마 전에 좀 이상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야.”
< Verse 20. Battle Rhym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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