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34화 (134/309)

< Verse 19. 유명세 (完) >

888 크루는 6시부터 30분간 리허설을 시작했다. 급하게 설치한 음향 장비지만 과연 방송국답게 출력도, 사운드 딜리버리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사방이 흡자재로 이루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소리의 잔향이 적다는 것이었다.

잔향이 적으니 사운드를 올려도 공간을 꽉 채우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신 잔향이 적은만큼 레이턴시나 마이크 하울링 현상은 없었다. 일장일단이 있는 장소였다.

“다른 팀은 리허설이 끝났나?”

“그런 거 같은데?”

2층, 4층, 6층으로 한 층씩 거리를 뒀기 때문인지, 공연장은 생각보다 방음이 잘됐다. 다른 팀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888 크루분들 리허설 끝나셨으면 5층으로 이동하시죠. 참, 어차피 저희 작가들이 감시할 테지만 창문 블라인드 걷으시면 안 됩니다. 그럼 게릴라 콘서트라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 아시죠?”

빌딩 앞에 얼마나 많은 인파가 있는지 확인하려던 박인혁과 우민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구 쪽으로 돌아왔다.

5층으로 올라가니 도시락을 먹고 있는 스타즈 레코드와 바운스 라임이 그들을 반겼다.

“왔어? 리허설 다 했어?”

“네. 형들은 이제 식사하세요?”

“너희도 먹어야지.”

“저희는 길에서 뭘 너무 많이 주서 먹어서…….”

“와, 이것들 팔자 좋네? 어디어디 돌았는데?”

“명동에서 출발해서 인사동까진 걸어가고, 차타고 동대문 가서 좀 놀았어요.”

“뭐야? 그냥 근처만 돌았네? 근데 거기서 네 시간이나 홍보를 했어? 단일 타겟 집중 전략이야?”

그때 스타즈 레코드 담당 작가이면서, 이제는 제법 친해진 안 작가가 888 크루의 행태(?)를 폭로했다. 홍보는 뒷전이고, 마냥 신나게 놀았다는 것이었다.

배가가 의아한 듯 물었다.

“뭐야, 자신감의 표현이야?”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좀 어렵고 부담스럽더라고요. 음악적인 경쟁을 위해서 음악 외적인 것에 사활을 걸어야한다는 게. 어쨌든 저희가 잘할 수 있는 건 음악이니까요. 아니, 근데 저희 홍보도 열심히 하긴 했는데?”

상현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배가는 그런 상현의 말을 듣고 내심 놀랐다.

물론 상현의 행동이 옳아서 놀란 건 아니었다.

사실 열심히 홍보한 스타즈 레코드의 행동이 훨씬 당연한 것이었다. 배가는 음악을 위한 음악 외의 열정까지 음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그가 놀란 것은 888 크루의 자유로움이었다.

배가를 비롯한 스타즈 레코드는 힙합 더 바이브 촬영 중에는 방송이란 포맷 내에서 최선의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888 크루는 힙합 더 바이브 촬영 중에도 자신들의 음악, 자신들의 가치관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었다. 방송 포맷보다 ‘888 월드’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것들을 자유롭다고 해야 돼, 아님 방만하다고 해야 돼?’

배가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888스럽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둘 다 틀린 건 아니니까. 그냥 다른 거니까.

그렇게 888 크루와 스타즈 레코드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진 피디가 들어와서 공연 시간이 30분 정도 미뤄졌다고 이야기를 했다.

“생각보다 관객 카운팅이 오래 걸려서 시간이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대기해주세요.”

“그래요? 사람 많이 왔나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죠.”

“근데 관객 카운팅은 공연 끝나고 나가시는 분들을 세는 게 더 편하지 않나요?”

“교차 선택을 확인하는 중이라서 그럴 수가 없네요. 교차 선택 비율을 보면 팬들의 충성도를 파악할 수가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바운스 라임의 홍보를 보고 찾아온 관객이 1000명인데, 실제 공연장에 들어온 관객은 600명일 수가 있었다. 이러면 충성도가 60%로 기록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어떤 팀의 홍보를 보고 왔는지, 어떤 팀의 공연을 고를 것인지를 둘 다 파악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관객이 많이 왔으니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허태진 피디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기실에서 빠져나갔다. 출연진들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궁금함에 몸부림치며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리고, 마침내 7시 30분이 되었다.

“자, 가시죠. 안대 써주시고, 리더 분들이 젤 앞으로 와서 작가들 손 잡아주세요. 팀원 분들은 서로 손 잡아주시고요.”

“안대 꼭 써야하나요?”

“쓰셔야죠. 그냥 가서 보면 방송 그림이 나오겠어요?”

“아, 왠지 뭔가 부끄러운데.”

“으으, 안대를 벗으면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하지?”

“그냥 느낀 그대로 지으시면 되죠. 괜히 설정 잡거나 꾸미실 필요 없습니다. 자, 시간 없습니다! 빨리 진행할게요!”

준형을 필두로 888 크루 멤버들이 안대를 썼다. 엘리베이터가 하나기 때문에 2층의 스타즈 레코드가 먼저 출발하고, 뒤이어 888 크루가 출발했다.

잠시 뒤 888 크루 멤버들은 4층 공연장에 도착했다.

사방이 고요했다.

당연히 관객들을 조용히 시켰겠지만, 너무 조용하니 당최 몇 명이 왔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때 작가가 인혁에게 물었다.

“박인혁 씨, 관객들이 몇 분이나 오셨을 것 같아요?”

“에이, 그런 뻔 한 거 물어보지 마시고 빨리 안대 좀 벗게 해주세요.”

“그래서 몇 분이나 오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멘트까지 너무 따라하시면 MBC한테 소송 걸려요. 프로그램 포맷에도 저작권이 있다니까요? 이게 다 작가님을 위해 해드리는 말입니다.”

인혁의 말에 몇몇 관객들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몇 마디의 인터뷰가 더 오간 뒤, 마침내 888 크루원들이 안대를 벗었다.

와- 하는 소리와 함께 꽤 많은 관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단숨에 몇 명이 왔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888 크루 멤버들은 문 바로 옆에 만들어진 무대 위로 올라갔다. 급하게 만들어진 무대는 넓지는 않았지만, 제법 높았다.

높은 곳에 오르고 나니, 뒤까지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관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젠 몇 명이나 온 것 같으세요?”

888 크루를 전담하는 선민아 작가의 질문에 준형이 답했다.

“삼백, 아니 사백 분이 넘는 것 같은데…….”

“정확히 435명입니다.”

435명.

4시간의 홍보만으로 888 크루의 공연을 찾아준 이들의 숫자였다. 홍보 지역이 광범위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대단한 기록이었다.

게다가 888 크루는 3팀 중 ‘관객 충성도’와 ‘관객 유입도’가 가장 높은 팀이었다.

888 크루의 홍보를 보고 공연장을 찾은 이들은 총 268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268명 중에 888 크루의 공연을 선택한 이들은 265명이었다. 고작 3명을 빼앗겼을 뿐이었다.

총 관객 수가 435명이니, 888 크루는 3명을 뺏기고 170명을 다른 팀에서 뺏어왔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때 선민아 작가가 888 크루 멤버들에게 하나의 기록지를 보여줬다.

관객 카운팅 결과표였다.

기록 방식은 ‘최종 관객 수 = (홍보를 본 관객 수 / 그 중 공연을 선택한 관객 수) + 뺏어온 관객 수’였다.

1위. 스타즈 레코드

476명 = (490 / 423) + 53

2위. 888 크루

435명 = (268 / 265) + 170

3위. 바운스 라임

369명 = (522 / 365) + 4

3위의 바운스 라임은 홍보를 통해 522명이라는, 888 크루의 두 배에 가까운 관객들을 불러왔지만 막상 그들이 지킨 인원은 365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운스 라임을 배신(?)한 157명의 관객 중 대다수는 888 크루에게 흡수되었다.

기록지의 가장 아래에는 선민아 작가가 급하게 자필로 쓴 문구가 있었다.

-관객들에게 총 관객 수 이외의 수치는 절대로 말하지 말 것.

선민아 작가가 자신이 쓴 부분을 강조하듯 한 번 더 가리켰다.

그 이유는 최종 결과를 접한 바운스 라임의 소속사에서 방송 상 내보낼 결과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순위를 바꿔달라는 건 아니었고, 수치만 적당히 올려달라는 요구. 이대로 방송에 나가면 바운스 라임의 이미지에 타격이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방송계의 생태계와 888 크루는 관련이 없었다. 그들은 기록지 확인을 끝내고 모든 신경을 관객들에게 돌렸다.

“결과 기록을 봤는데요, 이번에도 스타즈 형들이 저희 발목을 잡네요.”

“정말 징글징글한 형들이네요. 복수하고 싶어요.”

준형의 말에 또 한 번 와- 하는 관객들의 호응이 터졌다.

888 크루 멤버들은 좁은 무대에서 그들의 공연장을 내려다보았다. 사무실용 빌딩에 들어선 관객들의 모습은  꽤나 낯설었다. 그러나 어딘지 가슴을 뿌듯하게 만드는 모습이기도 했다.

“복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현의 질문에 누군가 ‘뒤통수를 까버려요!’라고 대답했다.

웃음이 터졌다.

관객들은 서로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할 수 있을 만큼 모여 있었기 때문에, 왠지 서로가 아는 사람인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거 매력적인 제안이긴 한데, 그러면 저희 다음 방송이 9시 뉴스가 될 것 같습니다.”

888 크루가 좋아서, 888 크루의 음악이 좋아서, 아니면 888 크루에게 호기심을 느껴서 모인 관객 435명.

“저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스타즈 레코드 공연에 간 관객 분들이 저희 공연을 못 봤다는 아쉬움에 잠을 못 드시게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 한 마디도 상의하지 않았지만, 척척 맞아 들어가는 멘트 분배.

마지막으로 상현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공연을 시작할 때, 항상 외치는 문구가 있어요. 일종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마법의 주문 같은 건데, 우리는 888 크루고, 지금 공연을 할 건데 아주 더럽게 잘하고 싶다. 이런 의미죠.”

관객들의 이목이 확 집중된 상태로 상현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 문구를 여러분들께 맡길 거예요.”

상현의 손짓에 DJ석으로 이동한 우민호가 스크래치를 시작했다.

We- Eight. E, E, E, Eight that!

We- Eight. E, E, E, Eight that!

꽤나 익숙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디제이 샷(DJ Shot)에 벼락과도 같은 함성이 터졌다.

그 순간, 비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노래를 아는 관객들은 다 함께 소리쳤다.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준형이 귀에 손을 가져다대며 외쳤다.

“뭐라고?”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안 들리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888 크루의 능청에, 훨씬 큰 함성이 터졌다.

We. 우리.

관객들은 그들이 888 크루와 긴밀한 관계가 된 것 같다는 친밀감을 느꼈고, 그것은 곧 열광적인 반응으로 재생산되었다.

Eight, Eight, Eight의 오리지널 비트가 본격적인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We Eight! 매일 칠(Chill: 놀다) 해도 더 위에 있다고

우리와 견주려면 네 나인(Nine) 어림없다고

신나게 후렴구를 부르던 인혁은, 춤을 추기에는 스테이지가 너무 좁다고 느끼고는 무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 만지지마! 위 에잇! 엉덩이! 에잇!”

말을 하면서 훅을 하는 신기를 보여주는 인혁의 모습에 888 크루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함께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DJ석의 민호를 제외한 7명이 관객들 사이로 파고들어 뛰기 시작하자, 435명의 관객들 역시 물결과도 같은 몸짓으로 그들을 환영했다.

공연시작 1분 만에 공연장이 미칠 듯한 하이 텐션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제 정신이 박힌 무대 연출가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공연을 만들지 않았다. 1시간 30분짜리 공연의 시작이 이렇다면 도대체 다음 곡은 무엇으로 채워야할까?

그러나 888 크루는 제정신이 박힌 이들이 아니었다.

무대 위 그들이 사는 세계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888 월드라는 그들만의 세계였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엘리스처럼, 평소엔 얌전한 하연까지 미치게 만드는 세상.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1시간 30분짜리 급행열차의 시작을 알리는 준형의 랩이 공연장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공간을 울리는 듯한 랩이었다.

흡자재가 소리를 흡수한다는 상현의 생각은 틀렸다.

추운 날씨 탓에 관객들이 입은 패딩이 소리의 잔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공연의 텐션에 더욱 불이 붙었다.

-꺄아아아악!

-팔팔팔! 팔팔팔!

888 크루 멤버들은 관객들의 말도 안 되는 호응을 보면서 그들에게 찾아온 변화를 확신할 수 있었다.

힙합 더 바이브가 끝나는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888 크루는 유명해지고 있었고, 유명해진 상태였다.

888 Crew라는 브랜드 가치.

그 가치를 계속 높이는 것.

이것이 그들이 해야 될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었다.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that Crew!

888 크루는 오직 음악으로 그들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었다.

< Verse 19. 유명세 (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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