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33화 (133/309)

< Verse 19. 유명세 >

즉, 이번 3라운드는 랩 대 랩이 아닌 벌스 대 벌스의 싸움이었다.

예를 들면, 현재 888 크루에서 바운스 라임을 공격하는 곡을 준비 중인 이들은 3명이었다.

이상현, 신준형, 오민지.

이 중 준형과 민지는 벌스를 완성했고, 상현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반대로 바운스 라임에서 888 크루를 공격하는 래퍼는 에디션과 돌핀이었다. 에디션과 돌핀은 진작 벌스를 완성시켰지만 아직 후렴구가 없었다.

현재까지의 진척 상황에서 수정된 배틀 방식을 적용하면, 자연스럽게 ‘신준형, 오민지 VS 돌핀, 에디션’의 구도로 하나의 곡을 만들 수가 있었다. 에디션과 오민지의 여성 랩 배틀 그림도 만들 수 있었고.

“각 팀에서 스웨거 벌스를 맡고 있는 분들이 있죠? 특별히 누군가를 공격하진 않지만 본인의 팀을 치켜세우는 벌스요. 이분들은 또 따로 모아볼 생각입니다.”

스타즈 레코드에서는 우연우가, 888 크루에서는 이상현이, 바운스 라임에서는 신각이 이러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게다가 스웨거 벌스 같은 경우는 이미 가지고 있는 기존 곡들에서도 뽑아 쓸 수가 있었다.

그때 상현이 허태진 피디에게 물었다.

“허 피디님. 말씀하시는 제안이 현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향이라는 건 다들 동의할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떤 문제 말씀이시죠?”

“비트 셀렉팅(Beat Selecting)이요. 저 같은 경우는 스웨거 벌스를 웨스트 사이트 비트에다가 썼는데, 연우 형 같은 경우는 붐뱁에다가 썼다고 하네요. BPM도 크게 다르고요. 이러면 원래 준비한 비트와 비슷한 비트를 고르는 쪽에 너무 많이 기울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저희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촬영은 야외에서 진행됩니다.”

“야외요?”

“비트 우선권을 가지고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쪽이 비트 선택 우선권을 갖습니다.”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쪽이라면 게릴라 콘서트…… 그런 의미인가요?”

“네. 예전에 프로그램도 있었죠? 안대를 벗어주세요! 하면 관객들이 으아아아 소리 지르는 그거요.”

888 크루, 스타즈 레코드, 바운스 라임 멤버들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바뀌었다.

***

명동성당과 을지로 3가역 사이에는 층당 면적이 140평이 넘는 6층짜리 빌딩이 있다. IMF 이전에는 임차인들이 줄을 서던 빌딩이었는데, 지금은 비싼 가격 때문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어서 텅텅 비어있는 곳이었다.

유독 도드라지게 큰 빌딩이 점점 낡고 허름해지자, 상권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주변 상인들의 원성을 사는 곳이기도 했다.

이 빌딩에 오랜만에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들락거리더니 2층, 4층, 6층에 음향 장비가 세팅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엄청 크다…….”

상미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광주에도 높은 건물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면적이 넓은 건물은 보기 힘들었다.

이곳이 오늘 힙합 더 바이브의 출연진들이 공연 할 장소였다. 허태진 피디의 말에 의하면 촬영 장비나 음향 장비를 설치할 공간을 빼면, 한 층에 450명 정도가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허 피디님, 방송 그림 만들려고 엄청 고민하셨네.’

상현의 생각처럼 이번 공연에는 재미있다면 재밌고, 비정하다면 비정한 규칙이 숨어있었다.

바로 선택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자성어로하면 낙장불입.

888 크루, 스타즈 레코드, 바운스 라임의 홍보를 보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한 층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2층으로 간다면 스타즈 레코드의 공연만, 4층으로 간다면 888 크루의 공연만, 6층으로 간다면 바운스 라임의 공연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스타즈 레코드의 홍보를 보고 찾아온 관객이, 막상 888 크루나 바운스 라임의 공연을 선택하는 그림도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빌렸을까? 허름하긴 해도 장난 아니게 큰데? 방송국이 돈이 그렇게 많나?”

“방송타면 임차인들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하고 빌려준 게 아닐까? 어차피 단 몇 시간뿐이잖아.”

“그런가? 근데 건물이 너무 허름해서 여기서 뭐 할 수 있나? 위치는 좋은 것 같은데…….”

“그걸 우리가 왜 걱정 하냐?”

상현은 준형을 타박하면서 속으로 몰래 웃었다.

이 건물은 나중에 사우나와 찜질방이 되는 곳이다.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찜질방을 짓는다고 말이 많았던 곳인데,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SK건설을 비롯한 대기업 지사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그 뒤로는 야근 직장인들의 메카처럼 되어버렸다. 상현도 어쩌다 한두 번 와봤던 곳이고.

“그래서 홍보를 어떻게 하지? 가까운 명동 번화가부터 갈까? 그냥 전단지만 돌려도 되나? 길거리 공연을 해야 하나?”

김환이 카메라맨들을 힐끔 보면서 말했다.

방송 분량이 걱정이긴 한 듯, 카메라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으며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888 크루에게 꽤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뭔가를 해야만 할 것만 같다는 부담감.

“이거 우리한테 좀 불리한 거 같은데……. 역시 준형 오빠가 헛소리를 지껄이니까 크루에 위기가 찾아왔어.”

상미 역시 부담감을 느끼는 듯 투덜거렸다.

상미의 말처럼 외부적인 요인은 888 크루에게 불리했다.

우선 스타즈 레코드는 활동 지역 서울이란 유리함이 있었고, 오프라인 팬들도 대부분 서울에 있었다. 바운스 라임은 연예인이란 인지도와 알게 모르게 받을 수 있는 소속사의 도움이 있었다.

상현은 허태진 피디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고군분투 홍보를 해서 888 크루가 불리함을 극복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그림이 되고, 초라한 성적표를 받는다면 요즘 핫한 888 크루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그림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현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방송인이 아니라 뮤지션들이었다.

“이거 꼴등해도 되요. 아무 상관없어요.”

“응?”

툭 던진 상현의 말에 크루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관객 좀 못 모은다고, 홍보 좀 못한다고 우리의 음악이랑 관련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 뭐, 비트 셀렉팅에서 불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지 않을까요?”

“재미?”

“지금까지는 내가 원하는 비트 위에다만 랩 했는데, 내가 원하지 않는 비트에 랩을 하는 재미.”

“어? 그런가?”

“이거 완전 약장수네. 아저씨 그 약 얼마에요?”

인혁의 농담에 크루원들이 미소를 지었다. 낯선 상황이라 딱딱해져있던 888 크루원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상현이 웃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우리 그동안 너무 바빠서 서울 구경도 제대로 못했잖아요. 호미 공연 때도 공연이랑 뒤풀이만하고 바로 내려오고, 힙합 더 바이브 촬영 때도 촬영만하고 바로 내려오고.”

“그럼 오늘 우리 서울 나들이하는 날인가?”

“아, 물론 홍보를 하지 말자는 소리는 아니고요. 최선을 다하되, 부담감을 갖지 말자는 거죠. 알죠? 겸사겸사.”

“겸사겸사? 놀면서 홍보도 하고?”

상현의 말을 들은 인혁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다들 그거 알아? 우리에겐 걸어 다니는 할인 쿠폰이 있다는 걸?”

“응? 할인 쿠폰?”

“고3때 담임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지. 일탈을 하려거든 수능이 끝나고 걸어 다니는 할인 쿠폰이 되어서 하여라!”

그 순간 모든 크루원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준형이 하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근엄하게 물었다.

“그대의 가방에는 지갑이 있는가?”

“응? 있지.”

“그대의 지갑에는 수험표가 들어 있는가?”

“당연히 있지.”

“앞장서도록 하여라!”

신이 난 888 크루 멤버들이 서로가 알고 있는 핫플레이스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상현이었다.

“가자!”

의견을 교환한 888 크루 멤버들이 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자신이 운전하고 싶다는 베스트 드라이버 박인혁의 징징거림은 가볍게 무시당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888 크루 전담 카메라맨과 작가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래 그들이 카메라에 담으려던 그림은 888 크루가 불리함을 안고 홍보에 전념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말 몇 마디로 행동의 주도권이 888 크루에게 넘어갔다.

이 뒤에는 어떤 그림이 나올지 상상이 잘 안 갔다.

그렇게 888 크루의 홍보를 빙자한 서울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힙합 더 바이브의 출연팀들에게 홍보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4시간이었다.

현재 시간은 1시 40분.

홍보 마감 시간은 6시.

공연 시작 시간은 7시.

4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스타즈 레코드는 본인들의 블로그와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홍보 글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대학로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거리 공연을 했다.

바운스 라임은 팬클럽과 소속사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홍보를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에 소속사 모니터링 요원들이 포털사이트에 공연에 대한 글을 올리고, 검색어 순위를 올리려 어뷰징을 시작했다.

그리고 888 크루는 자신들의 싸이월드 홈페이지와 트리플 에잇 홈페이지, 힙합엘이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옷을 사고 있었다.

옷을 사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내일 촬영을 예상하지 못했던 크루 멤버들 모두가 단벌신사였기 때문이었다.

명동에서 시작한 쇼핑은 가까운 인사동으로 이어졌다. 인사동에 ‘힙합 & 스트릿 전문 브랜드 매장’이 있다는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마냥 노는 것은 아니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공연 정보가 담긴 전단지를 나눠주며 공연을 홍보했다.

어느새 이동 중인 888 크루에게 수많은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특히 상현과 인혁, 하연의 인기가 대단했다.

“오빠! 오빠! 랩 해주세요!”

“랩랩랩랩!”

크루원들은 인혁의 썩은 개그에 자지러지는 여대생들을 보면서 참으로 세상은 넓다고 생각했다.

“오빠! 오빠! 나 이거 사줘!”

“죽을래? 카메라 앞에서 이걸 입겠다고?”

상현은 상미가 가져온 치마를 보고서 눈을 부라렸다. 미니스커트라고까지 부를 건 아니지만, 일단 무릎이 보이는 치마였다.

“절대 안 돼!”

“아, 왜!”

“원래 힙합은 츄리닝이야. 스눕독 몰라? 저기 츄리닝 중에 골라.”

“스눕독이 누군데!”

“개 닮은 아저씨 있어. 아니 그리고 무슨 겨울에 치마를 입어? 얼어 죽게?”

“스튜디오 안은 덥단 말이야!”

상현과 상미가 다투는 와중에도 크루원들은 신이 나서 옷을 골랐다. 오늘 옷값은 트리플 에잇 판매금액이 들어있는 계좌에서 계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멋들어지게 치장을 한 888 크루 멤버들은 곧장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군것질 거리를 탐냈다. 맛있는 게 너무 많았다.

중간에는 화장품 매장의 홍보 마이크를 빌려 랩을 하기도 했다. 15분 정도 공연을 했는데, 위험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 어쩔 수 없이 공연을 중단해야 했다.

“크, 인사동에서 광주 업을 하네.”

“아, 여기 커피숍도 많은데 커피머신을 못했네.”

상현은 인파를 헤치며 상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상미의 광장공포증이 문제가 될까 싶어서였다.

“아, 징그럽게 뭐해!”

그러나 상미는 상현의 손을 뿌리치고 신나서 돌아다녔다. 별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뭔가 좀 서운했다.

‘에이, 나쁜 기집애.’

888 크루 멤버들은 정말 부담감 하나 없이 알차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고달파진 것은 카메라맨들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888 크루는 얼추 봐도 150명이 넘는 인파를 몰고 다니고 있었다. 사람은 많고, 888 크루는 너무 빨리 움직이자 카메라맨들은 점차 따라다니기가 버거워졌다.

게다가 888 크루가 카메라맨들을 위해서 속도를 좀 늦춰주면, 뒤따르는 인파들이 888 크루를 보기 위해 속도를 높여버렸다.

“어우 씨…….”

강철어깨라는 별명을 지닌 9년차 카메라맨 김혁구가 투덜거렸다. 그때 그가 전담하고 있는 이상현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뭔 놈의 사람이 이렇게 많……!”

그 순간, 김혁구가 비틀거렸다. 어느새 풀린 자신의 신발 끈을 밟아버린 것이었다.

본래 인파가 많은 도심지 촬영을 나갈 때는 짧게 맨 신발 끈과 어딘가에 걸리지 않는 옷을 입는 게 기본이었다. 그러나 야외 촬영이 너무 급하게 결정되다보니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어어!”

김혁구는 자신이 넘어질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어떻게든 카메라 렌즈를 보호하며 넘어지려는 그를 안으며 지켜주는 이가 있었다.

이상현이었다.

“괜찮으세요?”

“하아…….”

김혁구가 상현의 품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근처의 대형 쇼핑몰에서 2005년 6월에 발매된 클래지콰이의 ‘She Is’가 흘러나왔다.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 네게 줄게-

상현과 김혁구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화들짝 놀라서 서로를 밀어냈다.

“시, 신발 끈 묶으실 동안 카메라 들어드릴게요.”

“그, 그럴래?”

그런 둘의 모습은 다른 카메라에 착실히 담기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본 허태진 피디가 미친 듯이 웃으며 ‘노팅힐’이라는 자막을 넣은 것과, 나이가 좀 있는 김혁구 때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노땅힐’이라고 불리기 시작하는 건 며칠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즐거웠던 공연 홍보가 끝나고, 888 크루가 명동의 공연 장소로 돌아온 시간은 정확히 6시였다.

< Verse 19. 유명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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