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9. 유명세 >
LE : 참, 지금 하시는 인터뷰가 11월 25일에 공개되는 것은 아시죠? 재미있게도 25일은 힙합 더 바이브의 두 번째 방송일이에요.
오민지 : 엘이의 인터뷰는 몇 시에 공개되나요?
LE : 오후 3시입니다. 그러니까 888 크루의 골수팬들은 이 인터뷰를 먼저 접하고, 몇 시간 뒤에 힙합 더 바이브 방송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상현 : (웃음) 재밌네요.
LE : 혹시 이번 주제 배틀의 관전 포인트가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강한 스포일러는 자제해주시고요.
박인혁 : 아쉽게도 힙합 더 바이브레이션에 버금가는 희대의 드립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께 정말 죄송하단 말씀 올립니다.
(박인혁 씨의 말은 일곱 분 모두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신준형 : 저희에게 선정된 주제가 돈이라는 건 아시죠? 제 생각에 돈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 꽤나 민감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 뒤 방송을 보실 분들에게 당부 드리고 싶은 건, 가사를 주의 깊게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가사에 녹여낸 저희 생각이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좀 재수 없지만, 상현이의 공연곡이 진짜 죽여줘요. 기립박수를 받는 공연을 보실 수 있습니다.
LE : 기립박수란 비유가 정말 재밌네요. 그런데 말씀하시는 걸 보니 3 라운드에 진출하신 것 같습니다?
신준형 : 그러니까 아직도 힙합 더 바이브 경연을 준비하고 있죠(웃음). 어차피 인터넷으로 탈락팀이 스포일러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모르시는 척을…….
LE : (웃음) 그럼 좀 더 직접적으로 물어볼게요. 이번 2라운드 경연에서 888 크루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무엇인가요?
이상현 : 솔직한 이야기요. 888 크루의 음악에는 888 크루의 진실된 생각이 담긴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주제가 돈이 됐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됐든 말이죠.
LE : 이건 약간 번외 질문인데, 2 라운드 경연에서 888 크루를 가장 깜짝 놀라게 만든 공연이 있나요?
일동 : (동시에) 드레드요.
LE : 코드네임의 드레드요?
일동 : 네.
LE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데요. 안 좋은 의미에서 인가요? 아니면 좋은 의미에서?
이상현 : 스포일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중략)
LE : 벌써 인터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네요. 아쉽습니다. 888 크루는 여덟 분 모두가 개성 넘치고 말도 잘하셔서 인터뷰할 때마다 참 재밌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호감을 느끼는 게 저 뿐만은 아니죠? 요새 많은 대중들이 888 크루를 기억하고, 좋아해주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요. 888 크루 여러분은 본인들의 유명세를 실감하시나요?
신준형 : 유명세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건 상현이랑 인혁이 형밖에 없는 거 같아요. 하연이도 살짝 추가되고? 저희는 그냥 알아보는 정도죠.
이상현 : 웃기고 있네. 준형이 집 근처에 여고가 하나 있거든요? 지금 거기 여고생들이 등교하는 신준형 못생긴 얼굴 보려고 꼭두새벽에 등교한다니까요?
신준형 : 넌 요즘 버스를 못 타잖아!
LE : 버스를 못 타요? 그 정도인가요?
신준형 : 음, 버스를 못 탄다는 건 제가 좀 오버한 것 같네요. 정확히 표현하면 학생들이 등하교하는 시간에 버스를 못 탑니다. 진짜로.
LE : (웃음) 그럼 유명세를 실감하신다는 말인가요?
박인혁 : 제가 쭉 지켜봤는데 10대나 20대분들에게는 저희가 좀 유명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30, 40대 분들은 잘 모르시더라고요.
이상현 :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박인혁 : 내가 지나다니다가 몇몇 어른들한테 물어봤거든. 저 아시냐고.
일동 : …….
LE : 그럼 유명해졌다고 치고, 유명세를 얻으면서 달라진 가장 큰 점은 무엇인가요?
이상현 : 상미의 웹툰 구독자수?
이상미 : 네이버에 888 Crew를 검색해주세요!
신준형 :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전히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고, 거울 속의 저희를 이기려고 노력하니까요. 아, 지금의 관심이 저희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는 게 가장 좋겠네요.
LE : 참, 이 질문은 저 아는 뮤지션 분이 꼭 해달라고 부탁한 질문인데요, 888 크루는 멤버 충원 계획이 없나요?
이상현 : 딱히 멤버 수를 제한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느낌의 래퍼들을 받고 싶다는 계획은 없습니다. 물 흐르듯 음악 하다가 저희의 동그라미 안에 들어오시는 분이 있으면 같이하는 거죠, 뭐.
이상미 : 으, 아저씨 같아.
LE : 이건 좀 민감한 질문일 수 있는데, 소속사에 들어갈 계획은 없나요? 현재 888 크루에게 엄청난 러브콜들이 쏟아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준형 : 그거 때문에 죽겠습니다. 캐스팅 디렉터 분들은 저희가 튕기는 걸로 생각하시는데, 저희는 정말로 소속사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곧 오경 엔터에 들어간다는 소문은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LE : 마지막 질문입니다. 888 크루의 등장으로 인해서 한국 힙합이 달라진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상현 : 2년이요.
LE : 2년이요? 무슨 의미죠?
이상현 : 888 크루가 등장함으로 인해서 한국 힙합 씬의 시간이 2년 정도 앞당겨졌다고 생각합니다.
LE : 888 크루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힙합 문화가 발전하는 속도가 지금보다 2년 느렸을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상현 : 구체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느낌 같은 거죠. 일종의 바램이기도 하고요.
***
드레드는 저녁을 먹고 쇼파에 누웠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휴식이었다.
그러고 보면 힙합 더 바이브에서 탈락한 뒤로 묘하게 스케쥴이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오후 7시에 스케쥴이 끝났다.
“으…….”
한참을 자던 드레드가 눈을 뜬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멤버들은 놀러나간 것 같았다.
잠시 쇼파에서 뒹굴 거리던 드레드는 오늘이 힙합 더 바이브 라운드 2 방송 날이라는 것을 깨닫고 TV를 틀었다.
딱 경연의 포문을 열었던 바운스 라임이 공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바운스 라임의 괜찮은, 그러나 특별한 것은 없는 공연 뒤로 스타즈 레코드 공연이 이어졌다. 스타즈 레코드의 공연은 역시 TV로 봐도 좋았다.
한참 인터넷에서 ‘라임 깎는 장인’이란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배가의 솔로공연은 드레드가 봐도 멋졌다.
‘그래, 랩은 저렇게 해야지.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바이브가 있잖아.’
어느새 잠이 다 날아간 드레드는 방송에 몰두했다.
몇 번의 인터뷰가 나오고, 곧 바운스 라임이 패배하는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다. 52표.
곧이어 888 크루와 코드네임의 경연이 준비되고, 리허설 무대와 인터뷰가 흥미롭게 섞인 영상이 먼저 방송되었다.
-888 크루를 멈추게 만드는 빨간불이 되겠습니다.
드레드는 자신의 인터뷰를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결과를 알고 보니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아오, 씨.’
드레드가 자신의 주둥이를 탓하는 사이, 888 크루의 선제공격이 시작되었다.
신준형, 박인혁, 신하연의 Full Clip.
그야말로 888 크루다운 공연이었다. 드레드는 현장에서 놓쳤던 가사와 의도들을 화면을 통해 이해하면서 888 크루가 얼마나 수준 높은 음악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가사로 옮기고, 그 가사를 랩으로 바꾸는데 급급했던 자신과는 달랐다.
‘아, 저기서는 박자를 일부러 민 거구나. 다음 라인의 가사 길이가 짧아지니까.’
플로우를 형성하기 위해서 가사를 조정하고, 가사를 보존하기 위해서 플로우를 변형한다.
라임을 맞추는 방법도 무조건 각운만 맞추는 게 아니었다. 라임 음을 일정하게 가져가기도 했고, 박자를 동일하게 끊으며 단절된 느낌으로 라임을 맞추기도 했다.
드레드는 888 크루의 공연에 정신없이 몰두했다.
Full Clip, Valuable이 이어졌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코드네임의 공연은, 같은 팀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만, 너무 가짜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상현의 Get that money, Welcome to School.
-개처럼 벌어서 래퍼처럼 써!
드레드는 입을 헤- 벌리고 공연에 집중했다.
이상현의 랩은 TV를 통해서 보든, 현장에 가서 보든 그 빛이 바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아우라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누가 뭐래도 랩은 딜리버리야. 가사를 캐치하겠다는 생각이 없어도 이상현의 가사는 귀에 쏙쏙 박히잖아. 그러니까 관객들이 더 랩에 몰입할 수 있는 거야.’
이상현의 랩은, 채대한의 말처럼 눈이 부실정도로 완벽했다.
마침내 Get that money, Welcome to School의 무대가 끝났다. 그와 동시에 소름끼치는 장면이 화면을 통해 방송되었다. 250명의 관객들이 진이 빠진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짝짝짝짝.
환호소리 하나 없이, 방송적인 설정하나 없이, 순수한 감탄을 담은 박수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들의 표정에서 일종의 경외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드레드는 관객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난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내가 저 엄청난 기립박수를 멈추게 만든…….’
과연 화면 속의 자신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드레드는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무선 마이크를 쥔 그가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올라오자, 공연의 여운이 담겼던 박수 소리가 뚝 끊겼다.
‘제발 하지 마, 이 자식아!’
그러나 스크린 속의 드레드는 현실의 드레드 마음을 몰라준 채 이상현을 툭 밀쳤다.
그리고는 무대 중앙에 우뚝 서서 외쳤다.
-Drop the Beat.
“으악!”
드롭 더 비트라니. 드롭 더 비트라니.
채대한이 보여준 미국 래퍼들이 말할 때는 멋있었다. 정말 멋있었다. 저렇게 촌스러운 발음과 촌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비트가 나오지 않자, 떼를 쓰는 듯한 모습으로…….
-Drop the Beat-!
띡, 하는 소리와 함께 TV가 꺼졌다. 어찌나 부끄러웠던지, 숨이 찰 지경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저랬지?’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던 드레드는 잠시 뒤 공연이 끝나겠거니 TV를 다시 틀었다. 그러나 TV 속의 자신은 아직도 어색한 제스쳐로 열심히 랩을 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리모컨을 누르려던 드레드는 문득 TV속 그의 표정이 밝다는 것을 발견했다.
곧이어 자신의 공연이 끝이 났다. 드레드는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부족하고 못나더라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외면하는 것은 좀 비겁한 것 같았다.
‘그래도 드롭 더 비트는 최악이야.’
888 크루와 코드네임의 투표는 예상대로 싱겁게 끝이 났다. 코드네임이 받은 표는 고작 14표였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이어서 뮤지션들의 공연 후 인터뷰가 나왔다.
다음에는 더 좋은 공연을 하겠다는 바운스 라임. 비장의 무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스타즈 레코드. 떨어져서 아쉽다는 코드네임.
그리고 이상현의 인터뷰 차례가 돌아왔다.
-공연이 끝난 기분이 어떠신가요?
-항상 무대가 끝나면 느끼지만, 아쉬움과 후련함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경연에서 888 크루를 제외하고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누구의 공연이었나요?
-드레드요.
-어떤 면에서요?
-일전에 코드네임한테 체조선수라고 했었는데, 취소하겠습니다. 오늘 드레드 공연을 보니까 체조선수가 아니더라고요. 드레드의 오늘 공연은 권투선수다웠습니다. 래퍼의 무대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라이벌로써 생각되신다는 이야긴가요?
-그건 아니죠. 제가 헤비급이라면 드레드는 페더급 정도?
하하 웃는 이상현의 얼굴이 페이드 아웃되면서 화면이 전환되었다. 드레드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나 그 찡그림은 웃음을 참는 찡그림이었다.
‘누구보고 페더급이래, 건방진 자식이. 페더급이 맘먹고 날아다니면 헤비급이 한 대도 못 때리는 거 몰라?’
드레드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11시 30분이 거의 되고 있었다.
피곤함도 거의 가셨고, 채대한의 작업실에 놀러가도 좋을 것 같았다. 아직 거기 있는 앨범 중 10분의 1도 채 못 들었으니까.
그렇게 드레드는 천천히 래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것은 888 크루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일의 시작이었다.
< Verse 19. 유명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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