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9. 유명세 >
Verse 19. 유명세
힙합엘이 ‘이달의 뮤지션’은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과 팬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표이다. 그 어떤 대형 기획사의 외압이나 자본의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철통같은 공정성을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한국 힙합 팬들은 ‘미국에 BET Cypher가 있다면 한국에는 힙합엘이 이달의 뮤지션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달의 뮤지션은 ‘절대로’ 한 번 선정된 뮤지션을 6개월 내로 재선정하는 일이 없었는데, 이제부터는 절대로라는 수식어가 사라지게 되었다.
11월의 뮤지션에 888 크루가 선정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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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엘이 - 매거진 - 인터뷰
인터뷰어 : 랜스 디(Rance D)
인터뷰이 : 888 Crew (신준형, 이상현, 이상미, 김환, 박인혁, 우민호, 신하연, 오민지)
11월 25일
[인터뷰] 888 크루
골든에라 시절.
동부힙합을 대표하던 노토리어스 비아이지(Notorious B.I.G)와 서부힙합을 대표하던 투팍(2pac)이 상대방을 디스하다 총에 맞아 사망하고, 미국 힙합은 대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동부에서는 제이지와 나스가 비기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애썼고, 서부에서는 닥터 드레와 스눕독이 투팍의 왕좌를 내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 틈을 비집고 백인 쓰레기(White Trash)를 자처하는 에미넴이 충격적으로 데뷔했고, 몇 년 뒤 엘리트 뮤직의 칸예 웨스트가 ‘대학을 자퇴(칸예의 데뷔 앨범명)’했다. 상대적으로 무시 받던 남부힙합은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섰다.
필자는 여전히 비기와 팍을 그리워하지만, 미국힙합의 진정한 진보와 혁명은 절대자들이 사라진 ‘대혼란’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 힙합에도 대혼란이 이루어지고 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힙합이 슬금슬금 방송계에 진출하더니,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지던 힙합 팬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메인스트림에서는 다이나믹듀오와 리쌍의 앨범이 연이은 빅 히트를 쳤고,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스타즈 레코드를 필두로 수많은 뮤지션들이 라임을 갈고 닦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대혼란의 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혹은 만들었다고까지 평가받는)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이례적으로, 이번 ‘11월의 뮤지션’은 이미 9월의 뮤지션에 선정되었던 팀이다.
하지만 힙합엘이 전 스태프 일동은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면, 한국 힙합 역사에 풀 수 없는 미싱 링크(Missing Link)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또다시, 8명의 888 크루 멤버들을 만났다.
(심지어 카페의 자리까지 똑같았다!)
*
LE : ‘쇼 비즈니스 사태’와 ‘클럽 호미’의 공연 이후로 한국 힙합팬들 사이에서 888 크루가 굉장한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아직 888 크루를 모르는 힙합 팬들에게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신준형 : 어? 그거 9월 달에 하셨던 오프닝멘트 아닌가요? 지금 상황과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LE : (웃으며) 그럼 이제 감히 888 크루를 모르는 힙합 팬들은 없다는 의미인가요?
신준형 : 안녕하세요. 아직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는, 더 분발해야 될 888 크루입니다!
일동 : (웃음)
LE : 이렇게 짧은 텀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게 처음이라서 썰렁한 농담 한 번 해봤습니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들어가기에 앞서서 간단한 근황을 듣고 싶은데요?
신준형 : 음, 짐작은 하시겠지만 힙합 더 바이브 공연을 준비하면서 대부분의 힘을 쏟고 있습니다. 물론 남는 시간에는 다가올 클럽 호미 Vol.3와 내년 초로 연기된 888 크루의 단독공연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LE : 시작부터 몰랐던 정보를 알게 되네요. 그동안 소문은 무성했습니다만 확실한 정보가 없었는데요, 연말로 예정된 호미 Vol.3에 888 크루 출연이 확정된 건가요?
신준형 : 네. 스타즈 형들이 촬영장에서 만날 때마다 어찌나 집요하게 부탁을 하던지……. 그 형들이 이미지와 다르게 집요하고 끈적거리는 게 좀 있거든요.(웃음)
이상현 : 스타즈 형들이 저희에게 매달리는 경향이 있죠. 저희는 도도하거든요.
LE : (웃음) 12월 말이면 힙합 더 바이브 촬영이 완전히 종료됐을 시점이죠? Vol.1을 공연할 때만해도 888 크루는 이제 막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이었는데요. Vol.3를 공연할 때는 신인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해졌습니다.
김환 : 저희는 아직 저희가 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규 앨범도 한 장 없고, 단독공연도 아직 못해봤으니까요.
LE : 지금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잔인한 멘트인 줄 아시나요? 888 크루가 정규앨범을 내고 단독공연을 할 때쯤이면, 지금 888 크루를 맹렬히 추격하는 경쟁자들과의 차이를 더 벌리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신준형 : 저희야 항상 1등으로 달려 나가고 싶죠. 근데 스타즈 형들이 자꾸 앞길을 막아서 힙합 더 바이브 다음 라운드에서 확실히 물리칠 생각입니다(웃음)
LE : 기대가 되는군요. 참, 제가 얼마 전에 정말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888 크루가 저희를 위해서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를 모조리 거절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상현 : 힙합엘이에서 5년간 지켜온 불문율을 깨면서까지 저희를 좋게 봐주셨는데 딱히 해드릴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단독 인터뷰라도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LE : 기분 좋은 대답을 들으니, 며칠 전부터 인터넷에 화제가 되는 글이 떠오르는군요. 이상현 씨, 제가 무슨 말하는지 짐작은 가시죠?
이상현 : 네(웃음). 인증샷 이야기 아니신가요?
LE : 맞습니다. 모르는 독자분들을 위해서 가볍게 설명하자면, 이상현 씨의 팬이 이상현 씨에게 받은 선물 인증샷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기사로도 나왔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상현 : 브랜드 명 언급해도 되나요?
LE : 말씀 편하게 해주시면 저희가 이니셜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이상현 : 얼마 전에 케이엠넷 방송국에서 팬분께 B사 브랜드의 선물을 받았거든요. 원래는 제가 비싼 선물은 부담스러워서 받지 않는데, B사의 후드는 제가 너무 가지고 싶었던 거여서……. 아,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시겠네요. 푸샤티가 입고 나왔던 그거요.
LE : 아하, 바로 알겠습니다.
이상현 : (웃음) 아무튼 그래서 선물은 받았는데 드릴 건 없고, 제가 가지고 있던 CD 플레이어와 부틀렉 시리즈를 선물로 드린 게 다입니다. 인터넷에서는 제가 엄청 매너 있고, 막 팬들을 아끼는 그런 이미지로 미화되고 있는데 그 정도 찬양을 받을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과도한 칭찬을 받고 있어서 조금 당황스럽네요.
신준형 : 근데 제가 그동안 상현이를 쭉 지켜보면서 느낀 건데요. 아무래도 이 모든 행동이 의도된 거 같아요. 무슨 일만했다하면 다 잘되잖아요? 이게 한 두 번이어야지 자꾸 그러니까 의심이 됩니다요.
이상현 : 중요한 자리에서 이상한소리 좀 하지 마 미친놈아.
신준형 : 와, 방금 상현이가 욕하는 거 들으셨죠? 이거 꼭 내보내셔야 되요. 편집하시면 제가 디스할 겁니다.
일동 : (웃음)
(중략)
LE : 그럼 본격적으로 부틀렉 시리즈 이야기로 들어가 볼게요. 우선 부틀렉 0.5는 기존에 발표된 곡들을 묶어서 발매한 무료 믹스테잎이죠?
신준형 : 네. 전곡이 이미 공개한 트랙들이여서 판매는 하지 않았습니다.
LE : 신하연 양은 어떤 곡이 가장 애정이 가시나요?
신하연 : 아무래도 단체곡인 Eight, Eight, Eight이죠. 트랩 뮤직이라는 특별함도 있고요.
박인혁 : 저는 움직여야지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맛이 있어요.
LE : 제 생각에도 ‘움직여야지’와 ‘Eight, Eight, Eight’이 가장 화제가 됐던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Eight, Eight, Eight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트랩 뮤직의 가장 큰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상현 : 뭐야, 왜 날 봐?
신준형 : 너가 하자고 한 거니까, 너가 대답해야지.
이상현 : 어…… 트랩 뮤직의 매력은 자유로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주류를 이루는 붐뱁이나 하드코어 같은 경우는 장르적 성향이 트랩보다는 강하니까요.
LE : 장르적 성향이 뭔가요?
이상현 : 그러니까, 붐뱁은 붐뱁에 어울리는 랩이 있죠. 드럼 라인과 얼기설기 엮이면서 화려한 랩 스킬을 뽐내는 느낌이요. 하드코어는 특유의 먹통 비트에 사운드를 우겨넣는 느낌이 있고요.
근데 트랩 비트는 어떤 방식으로 랩을 해도 상관없는 것 같아요. 붐뱁처럼 랩을 할 수도 있고, 하드코어하게 랩을 할 수도 있죠. 인혁이 형처럼 박자를 잔뜩 남기면서 랩을 할 수도 있고, 준형이처럼 박자를 꽉 채울 수도 있고요.
LE : 그럼 움직여야지는 어떤 매력이 있나요?
이상현 : 음, 비슷한 이야기인데 움직여야지도 자유로움이 매력이죠. 멜로디컬한 랩이라는 단어는 바꿔 말하면 랩의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굳이 경직적인 방법으로 라임을 맞추지 않아도 멜로디로 리듬감을 형성할 수도 있고.
LE : 그렇군요. 혹시 888 키드라는 단어를 알고 계시나요?
신준형 : 조금 부끄럽지만 알고 있죠(웃음) 저희가 힙합엘이 눈팅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오민지 : 민호 오빠나 상미는 인터넷 키면 나오는 게 힙합엘이에요.
LE : 잘 아신다니 888 키드에 대해 질문을 하나 드려볼게요. 현재 888 키드들이 모방하는 888 크루의 랩 스타일은 크게 3가지 정도로 구분이 되죠.
움직여야지의 멜로디컬함, 트랩 뮤직의 특별함, 크로우칭 라이터로 대변되는 특유의 리릭컬함. 이러한 모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상현 : 미국 본토 힙합을 따라가는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니아분들은 아시겠지만 저희가 가져온 사운드는 저희가 완전히 창조해낸 것은 아니에요. 다만 한국에서 가장 먼저 시도했을 뿐이죠.
트랩 뮤직은 구찌 메인의 트랩 하우스(Trap House)나 티아이의 트랩 뮤직(Trap Musik)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멜로디컬한 랩은 서정적인 LA 랩 뮤지션들이나 레게사운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죠. 100마디 랩은 말할 것도 없이 캐니버스를 모태로 삼았고요.
중요한 점은 그 사운드를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모방 속에서 자신만의 해석이나 생각을 섞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LE : 혹시 또 888 키드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상현 : 888 키드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네요.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은 저희의 사운드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1세대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이끌었던 가리온 선배님들부터 저희가 존경하는 스타즈 레코드 형들의 랩까지, 수천 번을 듣고, 연구하고, 따라 부르면서 찾아낸 스타일입니다.
간혹 저희를 한국 힙합에서 이질적으로 성장한 존재로 취급하고 ‘특별함’만 워너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저희 역시 99년부터 시작된 한국 힙합의 지력을 자양분 삼아서 성장한 나무들입니다.
저희를 무작정 따라하시는 것보다는 저희가 한국 힙합의 어떤 점을 지향하고, 어떤 점을 지양하는 지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결론은 한국 힙합 리스펙이죠.
(중략)
< Verse 19. 유명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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