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8. 힙합 더 바이브 >
딜리버리가 가능한 로우톤.
준형은 로우톤 뮤지션들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와도 같은 평가를 받는 래퍼였다. 물론 이 같은 평가가 그의 랩이 완성형에 이르렀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최고로 나아갈 수 있는 포텐셜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준형이 텐션을 올리며 속도감과 리듬감을 갖춘 소리를 퍼붓자, 관중들이 저도 모르게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50명이라는 적은 수의 관객에 맞춰 설계된 사운드 딜리버리 시스템은, 공연을 보는 이들에게 명확한 가사가 전달되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다.
준형의 랩이 본격적으로 가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돈 벌어서 안 써, 그냥 가사 써
내가 원한 것은 벌써다 샀어
내 가족의 이름에 크루를 넣어
동료들 이름을 지키는 복서
준형이 랩을 시작하자,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은 특히 가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돈’이라는 주제가 888 크루에게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흔한 방식으로 풀어내면 어려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888 크루는 흔함을 싫어하는 친구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생각처럼 888 크루는 색다른 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음악이 내겐 가장 쎈 무기이고
총알이 가득찬 통장, 내 무기고
돈독이라 우기고, 싶으면 두 귀로,
듣고 판단해 돈에 고개 안숙이고
준형은 ‘음악’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쎈 무기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물론 돈 역시 무기고 안에 들어있는 무기 중 하나였다.
돈은 현대 사회에 있어 당연히 강력한 무기였다. 그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준형이 일순위로 내세우는 무기는 당연히 ‘랩’이었다. 돈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말이다.
랩하는 방식, 가족의 아침
위한 내 정신, 에프엑스 방정식
돈을 대입하면 나오는 건
자유로움이란 단어일 걸
준형이 마디를 채우다 못해 넘겨가면서 터프하게 랩을 뱉었다. 그러나 호흡을 잘게 끊어가면서 만든 리듬감은 준형의 랩에 세련됨을 더해주고 있었다.
상현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준형의 랩 스타일은 이제 독자적인 영역을 찾아가고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 공짜는 없지
랩을 팔아서 정당한 가치를 얻지
Not for sale. 거짓이 넘침
Rap all day 내일 밤 새지
한순간도 쉬지 않은, 트랙 위를 달리는 거친 슈퍼카 같은 16마디가 끝이 났다.
마치 한 호흡에 모든 랩이 토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와아아!
-꺄아아아악!
준형의 랩이 끝나자 관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진정으로 준형의 랩이 가진 가치를 느꼈을까?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통장에 쟁여둔 총알을
함부로 발사 하지는 않지
인혁의 취한 듯 비틀 거리는 후렴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의 귀에는 후렴구가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인터뷰 때문에 풀 클립의 리허설을 듣지 못했었다. 스타즈 레코드의 리허설 다음이 바로 888 크루의 리허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풀 클립이 끝날 때쯤 888 크루의 리허설 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준형의 가사가 주는 충격은 강렬했다.
스타즈 레코드는 어느 누구보다 풀 클립의 가사를 단숨에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정신적 자유로움이 진정한 돈의 가치이다.
프리덤 이스 낫 프리(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와, 미친놈들.’
우연우는 준형의 가사를 듣고 소름이 돋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짐작대로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은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 아닌 코드네임이나 바운스 라임은 가사적인 면에서 뭔가를 느낀 것 같진 않았다.
‘돈을 대입하면 나오는 건, 자유로움이란 단어일 걸.’
우연우는 다시 한 번 준형의 가사를 곱씹었다.
그동안 한국 힙합 씬에서 이런 말을 하는 래퍼는 없었다. 왜냐하면 언더그라운드는 ‘배고픈 저항정신’이라는 족쇄 아닌 족쇄가 채워진 장르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준형의 가사는 골수 언더그라운드 팬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가사였다. 하지만 뮤지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라고 돈으로 굴러가는 현대 사회에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이라고 음악적으로 성공하길 바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들의 음악이 언더그라운드라는 가치 안에서만 만들어진다면, 언더 뮤지션들이나 오버 뮤지션들이나 음악으로 얻길 원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힙합 팬들은 종종 언더 래퍼들에게 ‘예술성’이란 이름아래 이상한 이미지와 족쇄를 씌울 때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888 크루가 보여주는 풀 클립은, 가사의 전위성이란 측면에서 한 단계 진일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솔직함이란 무기로 말이다.
그리고 우연우는 몰랐지만, 본래 이러한 한국 힙합의 진일보는 이센스를 통해 2007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거리를 표방했던 그는 언제나
그 얘기를 하고 박수를 받아야 돼
돈 백만 원이 급한 현실 애기로 몇 백을 벌어들이고
욕심이 더 커져서 계속 살아 숨 쉬던, 그의 사고를 묶어뒀지
2007년 키비(Keebe)의 Twisted Words.
트위스티드 월드에서 이센스 벌스는 언더그라운드 장르의 모순성은 밝히며 수많은 리스너들의 관념을 통렬히 걷어차 버렸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통장에 쟁여둔 총알을
함부로 발사 하지는 않지
우연우는 다음 주 방송이 나가면 힙합엘이 게시판에 돈에 대한 수많은 갑론을박이 벌어질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러한 우연우의 생각도 모른 채, 인혁은 또다시 가슴이 뻥 뚫리는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니!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통장에 쟁여둔 총알을!
함부로 발사 하지는 않지-!
처음에는 ‘가사가 이게 뭐야’라는 생각을 했던 관객들도 점차 박인혁의 무식하리만큼 1차원적인 훅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적절한 순간 스크린에 올라온 후렴구 가사는 관중들에게 그것을 따라하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후렴을 따라하는 관객이 생겨났고, 단순한 후렴은 곧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흥이 난 인혁이 또다시 특유의 어깨를 들썩이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관객석에서 ‘무등 경기장 동영상에서 봤어!’라는 소리가 들렸다.
통장에 쟁여둔 총알을!
함부로 발사 하지는 않지-!
또 한 번의 후렴구가 끝이 났고, 신나게 후렴구를 부르던 인혁이 자리를 비켰다.
그와 동시에, 인혁의 등 뒤에 서있던 하연이 미동도 없이 랩을 하기 시작했다.
내 음악은 돈에 가치를 두진 않지만
돈의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지 난
평생 동안 음악을 만들 내 장비와
아빠와 평생을 보내며 살 집만
하연의 랩은 준형보다는 비교적 소극적으로 돈의 가치를 주장하고 있었다.
돈에 대한 개념의 큰 골조는 비슷한 셋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세세한 마음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있으면 돼, 더 안 바래,
하지만 공짜로 줄 리 없네
배운 게 도둑질 그럼 난 도둑년
관객의 이목을 훔쳐 삼분이면
본래 하연은 박자를 여유롭게 남기는 스타일의 랩을 선호했었다. 그러나 이 곡을 만들 때는 준형의 랩을 듣고 난 다음에 벌스를 썼기 때문인지, 마디를 가득 채우는 거친 박자가 매력적인 곡이 되었다.
마치 레드 제플린의 섬세한 록처럼, 하연의 풀 클립 벌스는 섬세한 폭격이란 문장에 어울리는 랩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하연!
-우와아아!
여성스러운 외모와 목소리.
그러나 랩 속에 숨어있는 폭력성.
언밸런스한 매력을 마음껏 뽐내는 하연의 랩에는, 상현 다음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스타성이 숨어있었다.
Money makes money 돈이 돈을 부르지
Lack makes lack 결핍도 친굴 부르지.
트리플 에잇, 내가 원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을 줬지만 거절할 이유를 모르지
분명 트리플 에잇의 성공은 그들이 예측했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을 위해 반칙을 한 것도 아니었고, 비 더 언더그라운드의 깃발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달콤한 과실을 반납할 이유가 있을까? 단지 돈독이 올랐다는 몇몇 대중의 근거 없는 비판 때문에?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진
않지만 발밑에 있다면 오르지
오로지 음악만 하고 먹고 산다는
거짓말 대신, 다이어트 중에도 배부르지
단단한 마무리를 끝으로 하연의 랩이 마무리되었다.
제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랩을 했던 하연이 휙 뒤돌아서는 순간, 인혁이 튀어나왔다.
관객들은 다시 한 번 이어질 후렴구를 기대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전보다 훨씬 잘 따라 부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혁은 비트 위에서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두두두! 하는 거친 소리의 드럼이 다시 인트로의 듬듬듬 하는 먹먹한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운드를 가득 채우던 스트링이 스리슬쩍 자취를 감췄다.
감각에는 역치가 있고, 음악에서의 역치는 보통 볼륨의 세기에 관련된다. 사운드가 폭발하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전 볼륨에 적응된 귀를 역치값 이상으로 때려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커다란 사운드가 순식간에 뒤로 빠지자, 웅웅거리는 이명과 함께 묘한 집중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인혁이 다짜고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비트가 빨라지면서 박자를 쪼개는 하이헷 대신 박수소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어느새 다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비트는 빨랐고, Clap 사운드는 박자를 요령 있게 쪼개고 있었다. 누가 생각해도 빠른 랩이 어울릴만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인혁은 이 부분의 랩에 엉뚱한 생각을 채워 넣었다.
‘트랩 비트는 느린데 빠른 랩과 어울리잖아. 그럼 빠른 비트에 텅텅 비는 랩을 하면 재밌지 않을까?’
그야말로 박인혁다운 시도였다.
힙합의 골든 에라를 이끈 전설적인 뮤지션 노토리어스 비아이지(Notorious B.I.G)와 살아있는 뉴욕의 왕 제이지의 첫 만남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외부에는 노토리어스는 본래부터 가사를 쓰지 않는 뮤지션이었고, 제이지에게 그러한 방식을 알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반대였다.
‘제이지가 가사를 쓰지 않고 녹음을 끝내자 비기(노토리어스)는 녹음 부스로 들어가지 못했어. 한참 제이지의 트랙을 듣던 비기는 내일 다시 녹음을 하겠다고 스튜디오를 나가버렸지. 왜냐하면 제이지의 랩은 비트의 정박을 엇박으로 만들어버렸고, 엇박을 정박으로 만들어버렸어. 빈 공간을 채웠고, 채울 공간을 비워버렸지. 그의 녹음 트랙을 듣고 있으면 제대로 비트를 분석할 수조차 없었어. 말도 안 되는 솜씨였지. 그리고 다음날부터 비기 역시 제이지처럼 가사를 쓰지 않기 시작했어.’
준형과 하연이 인혁의 녹음물을 듣고 느낀 심정은, 아마 비기가 제이지의 트랙을 듣고 느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물론 인혁의 트랙이 준형이나 하연의 트랙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혁이 보여준 랩을 만드는 방식의 스펙트럼은, 준형과 하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충격의 근원이 힙합 더 바이브 무대를 수놓기 시작했다.
난 잘 몰라
돈, 여자, Be famous
누군가 내게 말함
그거 꽤나 Dangerous
박자를 미묘하게 미는 레이백을 즐겨 구사하는 인혁답게, 그의 랩은 스네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리듬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근데 진짜 돈이
필요 없다 생각할
나이는 지났잖니
가치 결정의 Bible
관객들은 인혁의 랩이 신선하다고 생각했고, 뮤지션들은 인혁이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하던 대로 랩을 해도 충분한 무대였다.
하지만 인혁은 느린 랩이 하고 싶었고, 한 것이었다.
난 돈 벌어서,
쓸 생각은 없어
근데 많은 돈이 쌓이면
그건 성공의 척도
박자가 텅텅 비는, 하지만 무대는 비어보이지는 않는 인혁의 랩이 능글맞게 이어졌다.
상현은 인혁의 벌스를 듣고 왜 이렇게 랩을 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뭔가 강렬한 영감이 느껴지긴 하는데, 그 의도를 명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인혁의 답변은 아주 심플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후렴구에서 다 끝났거든. 그러니까 12마디의 랩으로 설명을 거들뿐이지.’
인혁은 풀 클립의 주인공이 후렴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랩 역시 이어지 후렴구를 위한 포석이었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니!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통장에 쟁여둔 총알을!
함부로 발사 하지는 않지-!
빨라진 비트 위로 속도감이 더해진 후렴구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은 인혁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인혁의 모습이 멋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인혁이는 888 크루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래퍼구나.’
배가는 인혁의 랩이 가진 멋에, 벌스 1과 벌스 2를 책임진 준형, 하연의 역할이 아주 크다고 느꼈다. 앞선 벌스들이 별로였다면 인혁의 벌스도 별로처럼 느껴졌을 것 같았다. 왜냐면 인혁은 정도를 지키지 않은 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준형과 하연이 마디를 가득 채우면서도 기가 막힌 랩을 해보이자, 인혁의 랩은 더욱 더 기가 막히게 들렸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니!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통장에 쟁여둔 총알을!
함부로 발사 하지는 않지-!
약속의 시간이라도 도래한 듯 관객들이 다 함께 후렴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 힙합 더 바이브에 초청된 250명의 관객은 힙합 문화에 애정이 있거나,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적극적인 팬층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열광적이고 적극적으로 공연을 관람했고, 공연에 참여하는 것에 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인혁과 준형과 하연이 아예 마이크를 관객석 쪽으로 내밀고 가만히 서있자, 더욱 신나서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그렇게 888 크루의 선봉장을 맡은 풀 클립(Full Clip) 공연이 끝이 났다.
< Verse 18. 힙합 더 바이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