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26화 (126/309)

< Verse 18. 힙합 더 바이브 >

상현은 무대로 내려가며 바운스 라임의 면면을 살폈다.

돌핀, 에디션, 신각.

셋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현은 바운스 라임과 스타즈 레코드의 리허설을 둘 다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예측한 결과는, 100 대 0이었다.

당연히 스타즈 레코드가 100.

이러한 일방적인 평가는 랩의 기술적인 요소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운드 퀄리티적인 면에서는 바운스 라임이 스타즈 레코드보다 우세를 보이는 부분들도 있었다.

꽉 찬 무대 구성도 괜찮았고, 비트 초이스도 매력적이었다. 상현은 모르는 사람이지만, 라이브 무대에 올리기 위해 유명 콩쿨 출신의 피아니스트를 섭외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바운스 라임의 음악에는 랩만이 가지고 있는, 힙합 팬들을 미친듯이 열광시키는 하나의 요소가 빠져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였다.

랩은 언제나 전통적인 뮤지션들에게 비난을 받는 장르였다. 롤링 스톤(Rolling Stones)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차드(Keith Richards)는, 랩이 이룩한 인상적인 결과는 세상에 음치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보여준 것뿐이라는 공격적인 인터뷰를 하기도 했었다.

‘걔네들은 드럼 비트만 갖다 놓고 누군가가 그 위에 소리만 지르면 기뻐해. 음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시장이 굉장히 커.’

키스 리차드가 진심으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쇼 비즈니스적인 노이즈 마케팅을 위한 언론 플레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현은 랩이 음악의 3요소 중 하나인 Melody를 포기하면서 획득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다.

랩은 자신이 화자가 되는 거의 유일한 1인칭의 음악 장르였다. 심지어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 픽션의 가사를 쓴다고 해도, 긴 가사 안에는 래퍼의 아이덴티티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힙합 팬들은 자신이 듣는 음악을 통해 래퍼의 삶을 엿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래퍼의 삶을 엿보고 싶은 마음은 래퍼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컸고, 래퍼의 이야기에 공감하면 공감할수록 더욱 간절해졌다.

대마초라는 큰 잘못을 저지른 이센스가 수많은 힙합 팬들에게 질책이 더해진 지지를 받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1996년 아버지를 잃은 아이.

사랑 독차지 한 막내 곁 떠나시던 날.

믿기지 않고, 꿈같은, 꿈이기를 바랐고

그 다음 날, 엎드린 나. 푹 꺼지던 땅.

아빠가 다시 낚시터 데리고 가면 이제는 절대

지루한 티 안 낼게 3545 번호

주차장에 세워진 거 다시 보여줘.

이센스가 감옥에 있는 동안 발매된 앨범 디 에넥도트(The Anecdote)가 한국의 일매릭(illmatic)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수많은 아이돌들의 앨범 판매량을 부숴버린 이유 역시 이야기였다.

그러나 바운스 라임의 음악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포장된 상품이 아닌, 뮤지션들의 진실 된 내면을 엿보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현은 스타즈 레코드에게 100이란 압도적인 예측을 한 것이었다.

시너지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작한 바운스 라임의 공연은 깔끔하게 진행되었다. 본래 랩을 하는 멤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인지 랩의 딜리버리적인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하나보단 둘, 둘 보단 셋

비트란 파도 속을 항해하는 배

하드코어 붐뱁 비트를 채우는 바운스 라임의 랩이 이어졌다. 중간에 나온 에디션의 댄스 파트에서는 남성 관객들의 큰 환호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렇게 바운스 라임의 첫 번째 곡이 끝났다.

12분 30초로 시작한 바운스 라임의 스크린 타이머는 8분 45초로 줄어들어 있었고, 동시에 스타즈 레코드란 문구가 스크린에 나타났다.

12 : 30..

12 : 29..

그와 동시에, 아직 바운스 라임이 무대에서 퇴장하지도 않았건만 둔탁한 드럼 비트가 스피커를 울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바운스 라임 멤버들을 거칠게 밀어제치며 스타즈 레코드의 우연우와 염현필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왔다.

-우와아아아!

시각을 만족시키는 강렬한 신경전에 관객들의 함성이 터졌다.

“점잔뺄 것처럼 말하더니 엄청 공격적인데?”

“힙합 젠틀맨 이미지를 구축한다면서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888 크루의 흥겨운 감탄과 함께 스타즈 레코드의 랩이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경적을 듣고 비키는 사람들은 바운스 라임이었고.

시간이라는 주제를 가진 스타즈 레코드의 곡은 베테랑의 품격에 딱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1998년부터 2005년의 힙합 더 바이브까지의 역사를 훑어가는 가사. 그리고 그 역사 속에는 언제나 자신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선언.

이미 리허설 때 들었던 곡이지만 본 무대에서 보여주는 에너지는 연습 무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스타즈 레코드!

-스타즈!

바운스 라임 - 스타즈 레코드로 번갈아가며 이어지던 배틀의 종지부를 찍은 곡은 배상욱의 솔로곡이었다.

Stars Goes on.

투팍의 전설적인 명곡 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을 샘플링한 Stars Goes on의 투박한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힙합 팬들은 그냥 미쳐버렸다. 라이프 고즈 온을 모르는 이들도 비트가 묘하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라이프 고즈 온이 지오디 ‘어머님께’의 샘플링 원곡이기 때문이었다.

‘와, 비트 초이스 죽인다.’

상현은 배가의 솔로곡을 들으면서 감탄했다. 더할 나위 없는 영리한 선곡이었다.

그렇게 배가의 솔로곡이 끝나자, 공연장에는 ‘스타즈! 스타즈!’라는 거친 환호만 남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승자를 가리는 투표뿐이었고,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바운스 라임 대 스타즈 레코드, 스타즈 레코드 대 바운스 라임. 두 팀의 최종 배틀이 끝이 났습니다.”

무대 위로 올라온 허태진 피디의 주도하에 곧장 투표가 시작되었다.

250명의 관객들은 주변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신중하게 투표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나온 결과.

198 대 52.

스타즈 레코드의 완승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이 무대 위에서 관중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인사에 답하는 박수가 흘러나왔다.

888 크루 멤버들도 무대에서 내려오는 스타즈 레코드를 반겼다.

“형들 고생하셨어요. 무대 진짜 죽였어요!”

“제대로 된 노익장 과시!”

“방금 노익장이라고 했냐?”

우연우가 환하게 웃으며 준형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에 송출되자, 관객들의 함성이 터졌다.

“역시 BL은 인기가 많아. 나도 한 번……?”

웹툰 작가 상미의 중얼거림에 상현은 마시던 물을 뿜어야 했다.

바운스 라임과 스타즈 레코드의 대결이 끝나자마자 스크린에는 ‘888 크루 VS 코드네임’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드레드는 긴장되는 시선으로 무대에 오르는 888 크루의 박인혁, 신준형, 신하연을 주시했다.

드레드는 2주 동안 채대한에게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사실 처음에는 랩이란 장르를 트레이닝 받는다는 게 자못 생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채대한이 요구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채대한은 자신이 표현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표현하고 싶은 바가 있어야 했다.

오늘 드레드가 준비한 곡은 De-Red였다.

드(De)라는 전치사는 ‘…에 대하여’라는 의미가 있었고, 드레드는 레드라는 멈춤 신호를 자신의 랩으로 비유했다.

그래서 오늘의 경연곡인 De-Red는 한국말로 ‘적색경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다전제에서 코드네임이 888 크루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자신의 적색경보를 통해 그들을 멈칫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준비됐지?”

무대에 올라온 인혁이 준형과 하연을 살폈다. 둘 모두 긴장한 감은 있었지만 떨고 있진 않았다.

We Eight that Eight that Eight Crew!

공연 직전의 주문이 되어버린 문구를 크게 외친 셋이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

곧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듬듬듬듬- 소리에 가까운 묵직한 헤비 드럼이 나타났다.

오늘 888 크루가 ‘돈’이라는 주제에 맞춰 준비한 첫 번째 곡은 박인혁, 신하연, 신준형의 풀 크립(Full Clip)이었다.

풀 크립의 의미는 장전이 완료된 탄창이었다.

이 곡은 동명의 곡인 갱 스타(Gang Starr)의 Full Clip에서 영감을 받았다.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와 구루(Guru)가 팀을 이룬 갱 스타가 전 세계 힙합에 미친 영향력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디제이 프리미어는 샘플링 기법을 완벽하게 힙합에 적용시키며, 80년대의 골든에라 시절부터 2010년 이후까지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정상급 프로듀서로 이름을 기록했다.

구루는 특유의 말하는 듯한 랩 스타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힙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평가받는 ‘재즈 힙합’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두 거장의 영향력은 한국의 뮤지션들에게도 이어졌고, 당연히 888 크루에게도 전달이 되었다.

‘내 생각에 돈은 그냥 공포탄 뒤의 실탄 같은 거야. 쓸 일은 별로 없지만 있음으로 인해서 든든해지는 것?’

박인혁, 신준형, 신하연은 돈에 대해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돈이 있음으로써 그들의 음악에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지만, 돈이 없으면 음악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견해.

흔히 한국에서 총알이라는 단어로 돈을 표현하는 것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었다.

헤비한 드럼 사운드 위로 박인혁의 목소리가 나타났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니

돈 벌어서 쓰진 않지

인혁은 잔뜩 취한 사람처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발음을 흘린 인혁의 목소리가 듬듬듬 하는 드럼 사이로 파고들었다.

풀 크립의 훅은 아주 단순하고 1차원적인 가사로 이루어져있었다. 듣자마자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대충 만들어진 훅이 아니라, 의도적인 ‘무식한’ 느낌을 내포한 장치였다.

‘돈은 무식한 거야.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절제가 안 되거든.’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통장에 쟁여둔 총알을

함부로 발사 하지는 않지

비트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중얼거리는 인혁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고, 스피커를 통해 나오던 사운드가 두터워졌다.

동시에 듬듬듬듬 하는 4박자의 스네어 사이로 하이헷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베이스와 스트링이 들어오면서 사운드가 풍성해졌다.

사람들은 비트가 최고조에 이르면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인혁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트가 최고조에 이르기도 전에, 난데없는 고함소리가 관중들의 귀를 때렸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니!

돈 벌어서 쓰진 않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비트가 순식간에 엘리베이터를 타듯 최상층으로 올라섰다.

듬듬듬 하는 소리가 두두두! 하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드럼 소스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림샷 연주법과 흡사하게 톤을 확 올리고, 무거운 느낌의 마스터링을 덧입힌 것이었다.

이것은 전국 각지의 사운드 프로듀서들에게 888 크루의 메인 프로듀서 우민호의 센스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돈 벌어서 쓰진 않지-!

돈 벌어서 쓰진 않지-!

통장에 쟁여둔 총알을!

함부로 발사 하지는 않지-!

후렴구가 끝나는 순간 준형이 으르렁거리며 비트 위로 뛰어들었다.

< Verse 18. 힙합 더 바이브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