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7. 오늘이 지나면 >
Verse 17. 힙합 더 바이브
드디어 오피셜 부틀렉 트리플 에잇의 판매량이 1만장을 넘어섰다.
발매한지 고작 한 달이었고, 별다른 프로모션도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음악으로만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성과였다.
증가하는 앨범 판매량에 발맞춰 도매스틱 브랜드 굿즈의 판매량도 꾸준히 유지 되고 있었다. 앨범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당 60-80개 정도가 꾸준한 판매가 기록되고 있었다.
상현은 힙합 더 바이브 방송이 시작되면 굿즈의 판매량이 2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크루를 레이블로 바꿔야지. 자본 출자는 준형이랑 반반씩 하면 되려나? 그럼 공동 CEO인가?’
상현은 오경 ENT의 홍경수와 접촉한 이후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1년 하고 몇 달만 지나면 ‘888 크루’는 ‘888 레이블’로 바뀌게 될 것이었다.
크루와 레이블의 차이는 보통 적극적으로 자본 시장을 노리느냐, 노리지 않느냐의 차이로 정의됐다. 굳이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크루(Crew)는 동호회에 가깝고 레이블(Label)은 회사에 가까웠다.
물론 현재 888 크루는 어지간한 레이블보다 수요 시장에서 더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때문에 상현은 요 며칠 오피셜 부틀렉과 도매스틱 브랜드 굿즈의 주문, 반품, 출고, 배송을 담당하는 알바의 투덜거림을 들어야했다.
그 와중에 알바가 해준 말이 상현의 마음에 와 닿기도 했었다.
‘근데 진짜 신기한 건, 반품이 거의 없어요. 옷이나 모자 같은 거는 사이즈 때문에 가끔 환불이나 반품이 있는데, 앨범 같은 경우는 정말 신기할 만큼 반품이 없어요.’
‘신기한 일인가요?’
‘그렇죠. 보통 이런 경우는 명품샵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거든요. 상품 자체의 가치보다 브랜드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명품 브랜드들.’
알바의 말에 따르면 1만장의 앨범을 판매하면서 반품이 70장이 넘지 않았다고 했었다. 반품률 0.7% 이하.
허태진 피디의 예언처럼 888 크루는 그들의 이름에 브랜드 가치를 새겨 넣고 있었다.
“이상현! 신준형!”
“네?”
“니들 TV로 보니까 때깔 죽이더라?”
조회시간에 나온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상현과 준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반쯤 잠에 취해 꾸벅거리던 친구들도 잠에서 깨어나며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 나도 그거 봤어.”
“야, 에디션 이쁘지 않냐?”
“이쁘긴 한데 좀 싸납게 생겼지.”
“일부러 세 보이려고 화장해서 그런 거 아니야? 준형아 니가 직접 보기엔 어땠냐.”
“음, 얼굴은 잘 모르겠고, 몸매가 장난 아니야. 연예인은 다르다니까.”
“근데 니들 진짜로 코드네임이랑 주먹질하고 싸웠냐?”
“출연료 얼마랬지?”
이미 학교에서 몇 번이나 언급됐던 이야기를 또 언급하는 것은, 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생들이 쇼 비즈니스계에 가지는 막연한 동경 때문일 것이었다.
힙합 더 바이브 2의 첫 방송일은 11월 18일 금요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11월 8일.
방송까지 딱 열흘이 남은 상황에서 케이엠넷은 드디어 대대적인 광고와 프로모션, 마케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예고편이었다.
사전 인터뷰와 첫 촬영을 편집한 1분짜리의 긴 예고편이 시시때때로 케이엠넷 채널에서 방송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래퍼들의 무한 경쟁, 힙합 더 바이브 2!
예고편은 각 팀의 공연영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스타즈 레코드는 ‘홍대 스타즈’라는 브랜드로 여는 그들의 단독공연 영상이었고, 코드네임과 바운스 라임은 연말 가요제의 영상이었다. 888 크루는 무등 경기장 공연과 클럽 호미의 공연 영상이 섞여있었다.
공연영상 중간 중간에는, 힙합 더 바이브 2 에피소드 1에 참가하는 출연진들의 포부가 섞여 나왔다.
-저희 바운스 라임이 멤버가 교체된 이후로 힙합 팬들에게 만족을 드리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래퍼가 아니라 그냥 랩을 하는 가수들이라는 쓰디쓴 평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번 힙합 더 바이브를 통해서 바운스 라임이 힙합이란 문화에 가지고 있는 애정과 열정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시청자분들도 알다시피 코드네임은 처음부터 래퍼였던 멤버가 없습니다. 하지만 3년 가까이 힙합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이제는 어느 래퍼들보다 힙합에 대해 깊이 몰입했다고 자부합니다.
언더그라운드 팀들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동안 무시했던 저희 코드네임에게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힙합 팬들이 저희를 표현할 때 늘 쓰는 문장이 있습니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최전방에서 버텨온 베테랑.’ 베테랑이 괜히 베테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바운스 라임, 코드네임, 스타즈 레코드로 이어지는 출연 포부의 대미는 888 크루의 리더 준형이 장식했다.
-재밌을 거 같아서 출연했습니다. 근데 지면 재미없겠죠?
이어지는 무등 경기장의 Lonely Road.
1만 2천명의 환호.
8명의 미칠 듯한 랩.
이제 예고 영상은 첫 촬영에 있었던 각 팀의 공연 영상 하이라이트로 전환되었다. 사이사이에는 팀들간의 경쟁의식을 알 수 있는 인터뷰가 첨가되었다.
-888 크루는 포텐이 있는 팀이라고 생각하지만 포텐이 터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더라고요. 신선한 맛은 있지만 커리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사운드적인 면이나, 팀원들의 트랙 내 조화가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디션의 인터뷰를 필두로 각 팀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상현의 폭탄과 같은 파급력을 지닌 인터뷰였다.
-권투선수는 체조선수와 영역을 다툴 수가 없어요. 스포츠라는 큰 틀을 제외하면 권투와 체조는 전혀 다른 세상이니까요. 저희는 권투선수고, 코드네임은 체조선수에요. 코드네임과 겨룰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는 코드네임의 모습을 줌인하는 화면.
그 뒤로는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출연진들 모습이 조명되었다.
스타즈 레코드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888 크루. 코드네임과 농담을 나누는 바운스 라임의 신각.
영상은 누가 봐도 ‘언더그라운드 팀들’과 ‘오버그라운드 팀들’의 명료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예고편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화면이 어두워지고 좁은 무대가 나타났다. 신촌이나 미사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세 규모의 라이브 카페 무대.
그리고 그 무대 위에는 한 대의 그랜드 피아노와 한 대의 드럼, 한 대의 베이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무대로 올라온 베이스 연주자가 다짜고짜 연주를 시작했다. 이윽고 드러머와 피아니스트도 연주를 시작했다.
888 크루의 팬이라면 익숙한 사운드.
베이스가 추가된 크로우칭 라이터(Crouching Writer)의 라이브 연주였다.
무대를 비추던 카메라가 휙 반전 하더니 의자에 앉아 무대를 지켜보는 두 남자를 클로즈업했다. 그러나 조명이 어두워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두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랩을 시작했다.
링 위에 올랐지, 리릭시스트 옥타곤
여전히 난 가사에 미친 오타쿠
어머니처럼 가사만 생각해
내가 해야 될 일들은 매일 같애
조명이 조금씩 밝아졌다. 영상을 보는 이들은 랩을 하는 두 사람이 888 크루의 이상현과 신준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화면이 페이드아웃 되면서 역동적인 글자체를 지닌 자막이 떠올랐다.
-11월 18일 오후 10시! 힙합 더 바이브 2 첫 방송!
자막이 흔들리며 긴 예고편의 끝이 났다.
이번 힙합 더 바이브 예고편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888 크루였다. 공연 영상 분량은 4팀이 모두 비슷했지만, 크로우칭 라이터가 마지막에 배치된 것과 인터뷰 분량의 차이가 컸다.
이것은 허태진 피디의 영악함, 혹은 방송 프로듀싱 능력이 의도한 결과물이었다.
인지도는 높지만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다고 볼 수 없는 코드네임과 바운스 라임.
허태진 피디는 이 두 팀을 상대적 약자의 포지션에 배치시켜 시청자들의 동정표를 유발하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매니아 층도 두텁고 대중적 인지도도 꽤 있는 스타즈 레코드는 2라운드와 3라운드에서 다루기 위해 깊이 조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주인공은 888 크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음악계에서는 화제의 주역이지만 대중적 인지도보다 매니아층의 지지가 강한 888 크루를 전면에 배치. 코드네임과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실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허태진 피디가 의도한 바였고, 그 의도는 적중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힙합 더 바이브 2를 밀어주는 케이엠넷 국장의 쇼 비즈니스적인 정치가 숨어있었지만.
허태진 피디의 의도대로 힙합 더 바이브에 대한 인터넷 기사는 연일 뉴스 포탈의 메인을 달궜고,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수도 흡족한 수준이었다.
-888 크루는 어디서 튀어나온 양아치들인데 가만히 있는 코드네임을 까는 거죠? 역시 힙합 하는 새끼들은 대부분이 양아치들이지.
-니들 오빠인 코드네임도 힙합 하는데?
-코드네임이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는 힙합 리스너 생활 6년 만에 처음 듣는 소리다. 코드네임이 사고 친 거 한 번 줄줄이 읊어줘?
-코드네임이고 888이고 힙합 찌찔이 새끼들 가지고 무슨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어차피 한국 힙합은 다 미국 모방하는 수준 아님?
-제대로 베끼면 프로지. 그나마 그것도 제대로 못하는 애들이 태반임.
댓글의 대립구도는 두 분류였다.
888 크루 팬과 코드네임 팬의 대립. 힙합 문화 지지자들과 힙합 문화 혐오자들의 대립.
주식 종사자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TV에서 펀드매니저 자살 뉴스가 3번 나오면 증시가 더 내려갈 곳 없는 하락장을 찍었다는 것이었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펀드 매니저 자살 뉴스가 3번 나오면 증시 반등을 예측하며 웃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새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피디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프로그램 출연진들이 3번 이상 이슈의 중심에 서면 광고가 완판 된다는 것이었다.
힙합 더 바이브는 현재까지 2번의 이슈 몰이를 성공했다.
첫 번째는 시기 좋게 터진 888 크루의 오피셜 부틀렉.
-소속사 없이 만든 셀프 메이드 음반 Triple Eight, 판매량 1만장 돌파.
-10월, 11월 음반 판매량 1위. 888 Crew의 Official Bootleg.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888 크루는 어떻게 그들의 음악을 언더그라운드 밖으로 내놓았나.
7000장과 1만장은 유의미한 지표로써 그 역할이 다르다. 7000장은 ‘언더그라운드’ 시장에서 소비할 수 있는 수량이다. 하지만 1만장은 ‘언더그라운드 이외’가 포함되어야 소비할 수 있는 수량이다.
현재 연예계 기자들은 888 크루에게 수십 번의 인터뷰 요청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888 크루는 절대 인터뷰를 수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참 헛웃음이 나올 이유였다.
‘착한 건지, 아니면 영악한 건지.’
888 크루의 인터뷰를 바라는 허태진은, 왜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 상현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저희가 힙합엘이 11월의 뮤지션에 선정됐어요. 그래서 다른 인터뷰는 안할 거예요.
-네? 혹시 힙합엘이에서 독점 인터뷰를 요청했나요?
-아뇨. 독점 인터뷰는 아니에요.
-그럼 왜요?
-11월 뮤지션에 선정됐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다른 곳이랑 인터뷰를 해요.
알고 보니까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 힙합엘이 인터뷰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 언더 힙합 씬’과 ‘힙합엘이 회원’이 거의 동의어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힙합엘이는 이달의 뮤지션에 선정된 뮤지션을 6개월 안으로 다시 선정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다양한 뮤지션을 조명하기 위해 세운 규칙이자 신념이었다.
888 크루는 클럽 호미의 공연으로 9월의 뮤지션에 선정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0월에 발매된 2장의 믹스테잎.
Bootleg 0.5
Official Bootleg - Triple Eight.
그러니까 힙합엘이는, 사이트가 출범하고 5년 동안 지켜오던 불변의 규칙을 888 크루 때문에 깨버린 것이었다.
< Verse 17. 오늘이 지나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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