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e 16. 파급효과 >
‘정말 다행이다.’
상현은 박인혁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트리플 에잇에 수록된 탈의실은 인혁과 상현, 둘의 곡이었다. 그러나 저 인트로를 녹음할 당시에 상현은 전화가 와서 잠시 자리를 비웠고, 기다리기 심심했던 인혁이 준형을 데리고 녹음을 한 것이었다.
어쩌다보니까 준형의 로우톤에 묵직한 목소리가 재미를 증가시키는 것 같아서 앨범에까지 수록되게 되었고.
만약 그때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 명품연기(?)를 지금 자신이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때마침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줬던 미주가 생명의 은인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 - 의 - 실 (탈의실)
박인혁의 모습을 보며 드레드는 자신이 느꼈던 힙합에 대한 동경을 진지하게 철회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신은 무슨 생각으로 저 또라이같은 놈한테 재능을 준걸까?’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심지어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 역시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팀들의 경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혁의 랩이 출발했다.
내가 가는 곳은 다 탈의실, 남녀노소 안 가리지
속옷을 다 벗어재껴 어차피 다 남남이지
난 스펙트럼이 넓어 바짓가랑이를 적셔
그럼 거기서 옷을 갈아입으면 돼 어쩔 수 없어 넌 벗어
인혁이 의도한 탈의실은 인트로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랩을 하는 순간 이 공간이 탈의실로 변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힙합의 스웨거적인 문화를 박인혁 특유의 장난스럽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바꿔놓은 것이었다.
점점 진해지는 너의 바지를 봐.
엄청 찝찝할 텐데 왜 안 갈아입을까?
아, 그래 넌 팬티가 한 개, 팬티가 한계.
우리 공연에 대해 너는 대체 뭐야 아는 게?
모든 관객들이 경악했음에도 단 한 명은 눈을 번뜩이며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허태진 피디였다.
허태진은 오피셜 부틀렉을 들으면서도 탈의실이란 곡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라이브로 다가오는 느낌은 또 색다르다.
만약 이게 방송에 나간다면 내일 녹화할 이상현의 크로우칭 라이터와 함께 크게 주목을 받을 게 눈에 그려졌다.
아마도 ‘탈의실 래퍼 박인혁’이란 수식어가 생기지 않을까?
고의성이 다분해? 우리 공연이 어찌 따분해?
그럴 수가 없지, 주변 사람을 둘러봐
네 주변 사람들 바지 색은 다 그래.
인혁이 랩을 하면서 준형의 바지를 가리켰다. 더블링을 치던 준형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다.
원래 인혁은 준형의 바지에 물까지 뿌리기고 싶었다. 그러나 준형을 비롯한 888 크루 멤버들이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성사시키지 못한 계획이 되었다.
연말로 예정된 Hommie Vol.3 때는 반드시 준형의 바지에 물을 뿌리리라!
‘아, 그때는 상현이랑 두 명이서 하려나? 그럼 상현이의 바지에!’
인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상현은 열심히 더블링을 쳤다.
인혁의 벌스가 막바지로 이어졌다.
어느새 여긴 전부 탈의실로,
가려는 사람들 다 소리 질러
이제 모두들 알았겠지,
여기가 대체 어디라고?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쉬운 후렴구가 반복되자, 스태프 중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을 흥얼거렸다.
작곡가 채대한이 888 크루가 한국에서 ‘랩을 가장 잘하냐면 그건 아니지만, ‘랩뮤직’을 가장 잘하냐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888 크루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홀리는 음악을 했다.
힙합 팬이 아닌 스태프들에게 유명한 정도를 따지자면 스타즈 레코드의 노래나, 연예인인 바운스 라임의 노래가 더 유명하다. 게다가 오피셜 부틀렉은 발매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타즈 레코드나 바운스 라임이 공연을 할 때는 따라 부르는 이가 없었지만, 888 크루가 공연을 할 때면 왠지 따라 부르고 싶어지는 맛이 있었다.
그 이유는 상현이나 888 크루 멤버들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888 크루가 계속 음악을 즐긴다면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라는 것이었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 - 의 - 실 (탈의실)
후렴이 끝나자마자 상현이 마이크를 쥐고 나왔다. 인혁처럼 어깨를 들썩이는 큰 제스쳐는 없었지만,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888 크루의 음악성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이상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에이스라고 불린다는 것을.
상현은 자신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또 한 번, 씩 웃었다.
탈의실을 만들면서 상현은 인혁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그동안 ‘재치’있는 가사를 썼을 뿐, 유머 있는 가사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혁 덕분에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비도 안 왔는데 젖었지, 속옷을 한 벌 버렸지
멀어 집, 은 그러니, 넌 여기서 옷을 갈아입었지,
In-hulk 그리고 FiveSix 오늘밤 당신의 팬티를 적셔
비뇨기과 래퍼 잔뇨감이 전혀 없어
오피셜 부틀렉을 통해 탈의실을 미리 접하지 않았던 신각, 에디션 그리고 코드네임 멤버들이 처음 듣는 가사에 몰입했다.
‘비뇨기과 래퍼 잔뇨감이 전혀 없어’ 때는 슬쩍 웃기도 했다.
거기 아가씨, 별 수 없지,
원하면 내 걸 빌려주지
안 더럽지, 어제 빨았지,
무려 켈빈 클라인이지.
상현을 제외한 무대 위의 5명과 무대 밑의 2명이 다 같이 바지춤을 부여잡으며 ‘무려 켈빈 클라인이지!’ 외치는 부분에 배가의 웃음이 빵 터졌다.
“아, 이런 미친놈들.”
그러나 허태진 피디는 ‘켈빈 클라인’이라는 상품명을 직접 언급할 수가 없어서 이 재미있는 장면이 편집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다음부터 공연 올 때 챙겨와
미안 포스터에 미리미리 적어놔야
했는데 워낙에 바쁘다 보니까
까먹어 걱정마 전부다
탈의 중, 박인혁 이상현 탈의술 발휘 중
관객들 모두들 당황 하는 중
인혁이형 어딜 봐? 그러다 수갑 차.
이제 모두들 알았겠지? 여기가 대체 어디라고?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웃음기가 가득 낀 888 크루의 후렴구가 이어졌다. 상현은 신나게 후렴을 부르다가 즉흥적으로 ‘5분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외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는 문장이었다.
상현은 잠시 뻘줌함을 느꼈지만, 준형을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오늘 탈의실 공연의 컨셉은 쪽팔림이었다.
상현은 평소와 다르게 제스쳐를 크게 가져가며 인혁의 몸짓을 따라했다. 인혁은 흥이 오를 대로 올랐는지 이상한 춤을 추며 후렴구를 외치고 있었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이 후렴구를 따라했다. 당연하게도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은 탈의실을 포함한 888 크루의 모든 노래를 외우고 있었다. 물론 888 크루도 스타즈 레코드의 대부분의 노래를 외우고 있었고.
후렴구가 끝나고, 마지막 타자인 준형이 튀어나왔다.
앨범에는 준형의 벌스가 없기에,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쏠렸다.
‘준형이도 재미있게 가사를 썼을까?’
그 순간 묵직한 준형의 첫 문장이 스피커를 울렸다.
난 안 벗어, 니들이나 벗어.
알고 보니 준형은 인혁과 상현의 무대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가사를 쓴 것이었다.
그렇게 유쾌한 탈의실 공연이 이어졌다.
***
“모든 뮤지션 분들 공연하시느라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힙합 더 바이브 2의 첫 촬영이 거의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공연의 일등 팀을 선정하고, 일등 팀이 다음 라운드의 대진과 주제를 추첨하면 촬영이 종료됩니다.”
허태진 피디가 무대 위에서 말했다.
“여러분이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 동안에, 저희 스태프 15명과 음악 산업에 종사하시는 5명의 투표가 마감되었습니다. 스태프들은 각 1표씩, 관계자분들은 각 2표씩 총 25표가 투표되었습니다.”
코드네임과 바운스 라임은 스타즈 레코드와 888 크루의 공연을 보고서 일등은 포기한 상태였다. 다만 어느 정도 표가 나와서 창피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 오늘 촬영분에서는 우리가 너무 못하게 나오는 것 같은데.’
신각은 그렇게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스타즈 레코드가 잘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 막 뜨고 있는 888 크루가 이정도로 잘하는 줄은 전혀 몰랐다.
특히 마지막 공연곡인 Eight, Eight, Eight는 신각이 난생처음 들어보는 사운드였다.
‘회사에 말하면 우리도 그런 비트 받을 수 있겠지?’
신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허태진 피디가 입을 열었다.
“일등 팀은 총 12표를 받은 스타즈 레코드입니다. 이등은 11표를 받은 888 크루, 나머지 2팀은 공동 3등으로 각 한 표씩을 받았습니다.”
허태진 피디의 입을 보며 숨을 참고 있던 배가는, 마침내 발표가 나자 숨을 푹 내쉬면서 준형을 마구 흔들었다.
“오예, 지는 줄 알고 심장이 벌렁거렸네.”
“아! 한 표 차이라니.”
“우리가 해온 짬밥이 몇 년인데 1라운드부터 패배하면 형들 운다, 울어. 1라운드는 양보했다고 생각해라.”
배가의 말에 준형이 으으, 하는 아쉬운 소리를 냈다.
사실 배가는 왜 투표 결과가 이렇게 나왔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888 크루를 보기 위해 모인 기획사 관계자들 중 3명 혹은 4명이 자신들에게 투표를 한 것 같았다.
아마도 888 크루 영입을 위해 온 것 같았는데, 괜히 비행기를 태워줄 필요가 없으니까.
“스타즈 레코드는 누가 대표로 대진을 작성하나요?”
“제가 하겠습니다.”
배가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사실 888 크루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1등이 됐을 때의 계획을 모두 짜놓았다.
배가가 대진표가 그려진 판 위에 각 팀들의 이름을 배치했다.
- Hip Hop The Vibe 2 -
* Second Round.
1. 888 Crew VS Code Name
2. Stars Record VS Bounce Rhyme
대진을 보고 있던 드레드는 채대한이 요구했던 3 요소 중 2가지가 들어맞았다는 생각을 했다. 스타즈 레코드가 1라운드에서 1등을 차지했고, 대진표 역시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주제는? 주제는 어떻게 주어지지?’
드레드의 시선이 주제 선정의 규칙을 듣고 있는 배가에게 쏠렸다.
주제 선정은 총 20개의 주제가 들어있는 박스에서 1등 팀의 대표인 배가가 무작위로 추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1등 팀의 특전이 없었기에, 배가는 각 팀의 금지 주제어를 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팀은 이런 주제를 잘 다루지? 라는 것들을 제외시킬 수도 있고, 자신의 팀에게는 불리한 주제를 제외시킬 수도 있었다.
배가는 잠시 고민하다가 스타즈 레코드는 ‘사랑’이란 주제를 제외시켰고, 888 크루에는 ‘스웨거’란 주제어를 제외시켰다. 바운스 라임과 코드네임은 그냥 적당히 생각나는 주제를 제외시켰다.
“뽑을까요?”
“네. 뽑으신 주제를 대진표에 적힌 각 팀의 이름 옆에 붙여주세요.”
“네.”
배가는 괜히 방송을 위해 천천히 뽑는다거나 긴장감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런 건 편집이 할 일이었다. 그는 곧장 4개의 주제를 뽑았다.
“오……!”
허태진 피디는 흡족한 얼굴로 각 팀에 놓인 주제를 보았다.
Stars Record - 시간
Code Name - 자유주제
Bounce Rhyme - 시너지
888 Crew - 돈
드레드는 깜짝 놀란 눈으로 다시 한 번 주제를 읽었다. 과연 888 크루 옆에는 ‘돈’이라는 주제가 놓여있었다.
상황이 너무 잘 풀려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채대한이 요구했던 3가지 요소가 딱딱 들어맞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드레드는 오늘 888 크루의 공연을 보고나니 도저히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힙합에 대해 관심이 없을 때는 그냥 ‘잘한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직접 가사를 쓰고, 채대한이 추천하는 외국의 앨범들을 들으면서 공부하다 보니, 888 크루의 음악과 공연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오늘 공연곡인 커피머신과 탈의실만 봐도 이길 자신이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압권은 단체곡인 ‘Eight, Eight, Eight LA Remix’였다.
스탠다드라는 디제이가 트랩과 덥스텝을 섞어 만든 새로운 장르.
드레드는 888 크루의 마지막 공연을 떠올렸다.
***
< Verse 16. 파급효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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