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14화 (114/309)

< Verse 16. 파급효과 >

888 크루의 선두타자 인혁에게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인혁은 시선을 집중시키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랩을 시작했다.

Yeah, 난 다방 커피,

한국적 감성을 옮기는 내 연필

내 시계는 명품 아닌 돌핀

랩 할 때마다 혓바닥이 펌핑

박인혁은 스타즈 레코드의 공연을 보면서 그들의 표현 방법이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필요한 만큼의 흥분과 필요한 만큼의 전달.

무대 구성은 물론이고, 보컬 톤, 래퍼의 감정, 흥분되는 마음까지 컨트롤하는 능숙함.

때문에 인혁은 이번 공연에서는 스타즈 레코드 형들처럼 절제된 랩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888 크루는 스타즈 레코드가 아니었고, 인혁은 배가나 우연우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무대에 오르는 순간부터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비트가 들리자마자 절제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인혁은 평소처럼, 아니면 평소보다 더욱 가파르게 텐션을 끌어올리며 랩을 뱉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쥔 인혁의 왼손이 마구 들썩였다.

내가 뭘 느끼든 그건 내 식대로

다방 냄새 물씬 나는 커피의 식재료

그게 아니면 수정과나 식혜로

내 원두 원산지는 광주 City Ghetto

인혁의 랩이 무대를 울리자,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인혁의 라이브를 처음 보는 바운스 라임의 멤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잘하잖아?’

은연중에 인혁을 깔보고 있던 에디션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인혁은 사전 인터뷰를 포함한 녹화 내내 장난스러운 모습만 보여줬었다. 특유의 감탄사 ‘크’와 저질스러운 농담을 통해서 계속 남을 웃기려고 시도했고, 동료들에게 몇 번이나 구박을 받았었다.

이러한 모습이 반복되자 인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인혁을 ‘가벼운 사람’으로 단정 지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알게 모르게 박인혁이라는 뮤지션의 모습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왠지 웃긴 랩을 할 거 같아. 개그 캐릭터 아니야? 잘하는 거 맞아?

그러나 랩을 하는 순간 인혁의 이미지 완전히 깨져버린다.

원두를 갈아, 아직 덜 달아

설탕을 담아, 프림 더 투하

새끼로 저어, 아직 좀 써

커피를 만들듯 가사들을 써

인혁이 ‘원두를 갈아’로 시작하는 마디를 시작하자, 기다리고 있던 김환과 오민지가 더블링을 두 번씩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인혁이 ‘원두를 갈아, 갈아’, ‘아직 덜 달아, 달아’, ‘설탕을 담아, 담아’, ‘프림 더 투하, 투하’라고 랩하는 것처럼 재미있게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박인혁이란 뮤지션을 단순히 웃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인혁의 무대를 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인혁이 나머지 4마디를 더 뱉어내며 벌스를 끝냈다.

원두의 향은 오직 나로부터

날 판단하는 바로미터

각자의 방식으로 그라인딩.

블루 마운틴, 이건 클라이밍(Climbing)

후렴이 나오자 무대 위에 있는 멤버들과 무대 밑에 있던 민호, 상미가 그라인딩이라는 단어에 맞춰서 오른손을 마구 돌렸다. 마치 실제로 그라인딩 기계를 돌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카메라 감독이 그러한 888 크루원들이 모습을 화면 가득히 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태진 피디는 문득 888 크루원들의 표정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어린 아이처럼 신나게 웃고 있는 표정들.

스타즈 레코드처럼 노련미가 넘치는 무대도 매력적이지만, 888 크루처럼 흥을 주체할 수 없는 무대도 매력적이다.

‘이렇게 되면 바운스 라임이랑 코드네임이 너무 쳐지는 거 아니야?’

허태진 피디의 걱정처럼 한 번 올라간 888 크루의 텐션은 내려갈 줄을 몰랐다. 인혁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김환이 특유의 칼 같은 리듬감각을 선보이며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자유로운 랩 스타일의 박인혁.

칼 같은 정박을 유지하는 김환.

둘의 랩은 나란히 배치됐을 때 서로의 랩을 더욱 부각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곤 했다.

인혁은 김환의 하이프맨 역할을 수행하며 빈 공간을 채웠고, 민지와 하연은 더블링을 담당하며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네 명의 절묘한 조화 속에서 888 크루의 오프닝 곡 커피머신이 계속 이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배가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잘한다.”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이 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네. 어째 호미 공연 때보다 더 좋아진 거 같다.”

“888 애들은 뭘 먹고 이렇게 쑥쑥 크는 거지?”

“노마 에프?”

“……?”

배가를 비롯한 스타즈 레코드 멤버들은 입으로는 장난스러운 말을 뱉으면서도, 시선은 무대에서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라이벌 의식.’

바운스 라임이나 코드네임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스타즈 레코드 역시 888 크루를 제외한 두 팀을 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바운스 라임이나 코드네임은 실력적인 면에서 체급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솔직히 말하면 Hommie 공연 때도 888 크루에서 ‘두 명만 빠지면’ 자신들과 비교할 체급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 두 명은 상현과 준형이었고, 범위를 조금 더 넓게 잡아보자면 하연까지 포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커피머신을 보는 배가의 심정은 클럽 호미의 공연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커피머신의 라인업에는 준형과 상현이 없다.

김환, 오민지, 박인혁, 신하연.

상현이나 준형에 비하면 부족하다고 느꼈던 멤버들이 만들어내는 공연. 하지만 배가는 커피머신의 공연을 보면서 그것이 스타즈 레코드와 비교해 급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절대 할 수가 없었다.

상현의 영향을 받으며, 서로와 경쟁하며, 거울 속의 888 크루를 이기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며, 888 크루원들은 성장했다.

‘특히…….’

박인혁. 그의 성장이 눈부셨다.

배가가 보기에 888 크루에는 ‘이상현’이라는 독보적이고 성공적인 롤 모델이 있었다. 때문에 크루원들이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에서 상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박인혁은 예외였다.

가사를 활용하는 측면을 제외하면 랩 적인 면에서 박인혁의 랩은 상현의 랩과 전혀 달랐다. 또한 가사의 쓰임에서도 탑-다운 방식인 상현과 달리 인혁은 병렬적인 구조를 채택하고 있었다.

배가는 냉철하게 888 크루를 분석하다가, 이제는 정말 888 크루가 동등한 위치에 선 경쟁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과 2달 전에 클럽 호미 공연에 부를 때만해도 후배를 이끌어주는 마음이었는데 말이다.

배가의 긴 상념과 함께 마지막 후렴구가 나오며 커피머신의 공연이 끝이 났다. 보는 사람을 왠지 들뜨게 만드는 그런 공연이었다.

배가는 다음 곡을 위해 전면으로 나오는 이들을 보면서, 드디어 888 크루의 끝판 왕들이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이상현, 신준형, 박인혁이 부르는 탈의실.

재미있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노래였다.

상현은 무대 위에서 자신들을 쳐다보는 이들의 시선을 살폈다.

그동안 888 크루는 적게는 백 명, 많게는 만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 공연을 해왔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스태프들을 포함해 50명 남짓의 사람들 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적다고 무대가 쉬운 것은 아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눈빛,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눈빛,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눈빛.

다양한 관객들의 감정이 상현에게 전해졌다.

상현은 공연 직전에 항상 그랬듯이, 사람들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욕구가 뭉글뭉글 올라왔다.

“인혁이 형, 준비 됐어요?”

“당연하지.”

커피머신 공연을 끝나고 숨을 고른 인혁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윽고 비트가 흘러나왔다.

Official Bootleg - Triple Eight

4번 트랙 ‘탈의실’

탈의실은 전적으로 인혁이 비트를 고르고, 후렴구를 만들고, 주제를 정한 곡이었다. 비트는 우민호가 직접 찍은 비트였는데, 웨스트사이드(West-Side)의 전형적인 뉴 스쿨 비트답게 화려한 악기와 가벼운 사운드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힙합문화의 강점인 동시에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스웨거(Swagger) 문화 내에서 래퍼는 스스로를 보통 ‘강자’라고 표현한다. 자연적으로 래퍼가 공격하는 대상은 ‘약자’가 되는데, 이런 공격적인 성향의 랩에서는 상대방을 ‘얼마나 참신하게 깎아내리고, 내 위치를 얼마나 드높일 수 있는가’가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제이지(Jay-z)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명 Hova가 여호와(jehovah)를 자기 자신과 비유한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에미넴이 스스로를 랩 갓(Rap god)이라고 표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혁의 탈의실은 이러한 스웨거 문화의 관점을 미묘하게 비틀어 만든 곡이었다. 외국 래퍼들의 랩 배틀을 보면서 ‘Piss : 오줌’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사용하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었다.

신디사이저를 통해 만들어진 웨스트사이드 특유의 비트가 흘러나오자 준형이 앞으로 나가며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마이크를 잡은 준형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부끄러움을 타는 듯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상현은 ‘저 역할’을 맡은 게 자신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덩달아 부끄러워졌다.

“형, 인혁이 형.”

“어, 왜?”

전주가 흘러나오는데 난데없이 준형과 인혁이 말을 하자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냥 말하는 것도 아니고, 왠지 어색한 연기 톤이었다.

그러자 인혁을 제외한 888 크루의 7명이 얼굴을 돌리며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정말 하는 거야? 전 국민이 볼지도 모르는 방송에서?’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힙합 정신이 아닐까?’

‘제발 그만둬!’

그러는 사이에도 준형의 대사는 이어졌다.

“저 오늘 공연 못하겠어요.”

“뭐? 왜?”

“지금 공연할만한 상황이 아니에요.”

“무슨 말이야.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 안보여?”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요!”

준형의 외침에 인혁이 거칠게 멱살을 잡아챘다. 그러자 준형이 고개를 돌려 인혁을 외면했다.

“너 이거 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 공연 안하겠다는 이유가 뭔데?”

“말할 수 없어요.”

“하라고!”

“제가…… 제가 형의 랩을 듣고…….”

준형이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바지를 가리켰다.

“지려버렸단 말이에요.”

침묵 속의 경악이 촬영장을 맴돌았다. 진실로 용감하다! 저런 말도 안 돼는 연기라니! 부끄러움에 빨개진 신준형의 얼굴이 어찌 아니 용감할까!

그 순간 빰빰빰! 하는 신디사이저 소리와 함께 작게 들리던 비트가 크게 터져 나왔다.

홀로 아무렇지 않은 인혁이 마이크를 잡고 후렴구를 시작했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탈의실

이곳은 탈 - 의 - 실 (탈의실)

아주 간단한 후렴구였지만 비트 초이스가 좋아서 심심하게 들리진 않았다. 또한 한 번 들어도 관객들이 따라 부르기 쉬운 구조였다.

인혁은 후렴구를 뱉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정도면 광주 업 인트로에 전혀 밀리지 않겠지?’

탈의실 인트로의 불같은 연기는, 광주 업의 ‘당황한 척 하기’ 퍼포먼스를 항상 부러워했던 인혁의 히든 카드였다.

준형과 인혁의 명품연기(?)는 힙합 더 바이브 무대를 위해 급하게 준비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 오피셜 부틀렉의 정식 음원에도 들어가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음원을 녹음할 때는 888 크루 밖에 없는 연습실에서 재미있게 한 것이지만, 이걸 카메라와 관객들 앞에서 라이브로 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 Verse 16. 파급효과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