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랩스타-113화 (113/309)

< Verse 16. 파급효과 >

“이기고 싶습니다.”

“뭘.”

“888 크루요. 제가 이번에 힙합 더 바이브에서 888 크루랑 붙는…….”

그러나 드레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드레드의 말을 듣자마자 미친듯이 웃는 채대한 때문이었다. 채대한은 한참을 웃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니네가 얘들을 이기고 싶다고? 랩으로?”

“네.”

“방법은 두 개 뿐일 걸? 888 크루한테 돈을 줘서 랩을 개똥같이 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뻑치기라도 고용해서 말을 못하게 만들거나. 팔다리 부러져도 말만 할 수 있으면 니들 정도는 감히 대볼 수도 없을 걸?”

“…….”

드레드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채대한의 입을 통해 직접 듣자 확실한 실감이 났다.

음악가에 대한 채대한의 평가는 틀리지 않는다. 백 명의 프로듀서가 확신을 가지고고 잘 될 거라고 말해도 채대한이 안된다고 하면, 대부분 잘 안됐다.

드레드가 침묵하자 채대한이 드레드의 정강이를 툭 걷어차며 물었다.

“코드네임 전원의 생각이냐?”

“……아뇨.”

“너 혼자?”

“네.”

“왜?”

“그냥…….”

채대한의 질문에 드레드는 두서없이 888 크루와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반드시 이기고 싶은 마음.

가만히 듣고 있던 채대한이 툭 던졌다.

“그거 스토커의 심리네. 하염없이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에게 나를 각인시키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런 거 아닌데요!”

드레드가 소리를 지르자 채대한이 인상을 팍 썼다.

“얻다 대고 소리를 질러? 뒤지고 싶냐?”

“888 크루가 잘하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봐야 아마추어 새끼들인데……!”

“스토커를 넘어서 씨발데레의 특성도 가지고 있네?”

“씨발데……? 뭐라고 하셨어요?”

“한국말로 하면 흥해롱 쯤 되겠네. 앞에서는 흥흥 거리고 뒤에서는 해롱거리고. 너 변태냐?”

드레드는 자신의 비장한 마음이 왜곡 당하는 것 같아서 변명했지만 채대한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뜬금없는 타이밍에 난데없이 긴 생각에 잠겼다. 한참 생각하던 채대한이 입을 연 것은 10분이 넘게 지나서였다.

“야, 너. 회사에서 만들어준 랩 좀 해봤다고 너가 래퍼라고 생각하는 거냐? 너는 랩 비기너 수준도 안 돼. 이건 너 상처받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걔들도 시작한지 얼마 안됐잖아요.”

“아니지. 888 크루원들은 랩을 만들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그 문화에 흠뻑 젖어있던 애들이란 말이야. 랩은 니 생각을 니 방식으로 뱉는 거야. 근데 넌 몸 어디에도 랩이 충전된 부분이 없어. 방전 상태인데 뭘 뱉어? 최소 일 년 동안은 리스닝만 하면서 영감을 채워야 한 번 싸워볼만하지.”

“그럼 형이 만들어 주시면…….”

“귀엽게 봐줬더니 기어오르네? 그딴 역겨운 소리할 거면 당장 꺼져. 너 지금까지 뭐 들었어. 니 방식으로 니 생각을 뱉는 게 랩이라고 했지? 근데 내가 어떻게 만들어? 내가 너냐? 어?”

독설을 곱씹던 드레드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채대한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기타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냥 의자 옆에 세워져있길래 공용 기타인 줄 알았어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새끼는 뭐 지 말만 하다가 꺼지려고 그래? 야, 너 내일까지 내가 백 마디 써오라면 써올 수 있겠냐?”

“백 마디요? 백 마디면 스네어가 이백 번 나오는 거죠?”

“와, 시발. 맞긴 한데 888 크루랑 싸우고 싶다는 애가 마디 개념이나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속이 터지네. 너 크로우칭 라이터 들었지?”

“네.”

“그거 랩이 압축된 거 같냐, 늘려진 거 같냐? 하고 싶은 말이 백 마디가 넘었을까? 아니면 스무 마디쯤 됐는데 백 마디로 늘린 걸까?”

드레드가 잠시 크로우칭 라이터를 떠올리다가 자신 없는 말투로 답했다.

“할 말이 더 있었던 거 같아요.”

“맞아. 이상현은 이백 마디도 할 수 있는데 백 마디만 했단 말이야. 그럼 열여섯 마디짜리 정식 벌스에는 얼마나 꽉 찬 랩이 들어가 있겠어? 한 주제로 이백 마디를 뱉을 수 있는 놈이 그걸 줄이고 줄여서 16마디에 박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네.”

“내가 너한테 열여섯 마디 쓰라고 하면, 넌 한 열 마디 쓰고 할 말 없을 걸? 채운 게 없으니까. 그럼 나머지는 악이랑 깡이랑 노력으로 채워야지.”

“그렇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니, 그렇게 해도 실력으로 붙으면 못 이겨. 근데 가능성이 조금은 생기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날 마다 백 마디씩 써와. 그리고 888 크루가 힙합 더 바이브에서 자만하길 빌어. 아마 지금 888 크루의 머릿속에는 스타즈 레코드랑 붙어보고 싶은 마음만 가득할 거야. 솔직히 바운스 라임이나 코드네임은 애피타이저도 못되지. 그냥 식사 전에 마시는 물이나 다름없지.”

채대한의 거침없는 말에 드레드가 끙하는 소리를 내며 참았다. 채대한이 말을 이었다.

“니네가 이기려면 888 크루랑 2차전에 붙어야 돼. 힙합 더 바이브 1차전에는 탈락자가 없지? 그럼 1차전 때 병신 같이해. 아니, 원래 병신 같으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해. 그럼 888 크루는 원래부터 너희한테 경쟁의식이나 위기의식이 없는데, 그 무대를 보고 더 없어질 거란 말이야. 이제 모든 신경이 스타즈 레코드한테 쏠리겠지. 뮤지션이란 원래 그런 족속이니까.”

채대한은 음음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A4 용지를 꺼내서 글자를 휘갈겼다.

“자, 봐봐. 이게 최상의 시나리오니까. 우선 1차전 때 너네가 꼴찌를 해. 그리고 스타즈 레코드가 1위를 하는 거야. 그럼 888 크루는 자동적으로 2위를 하겠지? 이제 888 크루의 온 신경은 1위인 스타즈 레코드한테 쏠릴 거고, 그 틈을 노려서! 너네가 888 크루랑 붙는 거야.”

“근데 그럴 거면 차라리 3차전에 붙는 게 낫지 않나요? 3팀만 남았을 때?”

“아니지. 그때는 일대일이 아니잖아. 스타즈 레코드가 낀 삼파전인데 888 크루가 긴장 안하게 생겼어?”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내가 알기로 2차전은 일대일로 세 명의 선수가 나와서 붙는 삼판 양승제지? 그리고 2차전 경연 주제는 1차전 우승자가 뽑던가? 상대팀이 뽑던가? 그렇고.”

“2차전이 일 대 일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피디가 1차전 공연 끝나자마자 말할 걸? 아마 극적인 긴장감 줄려고 숨기고 있겠지. 관계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니까 맞을 거야.”

“포맷을 엄청 잘 아시네요.”

“나 힙합 더 바이브 1 애청자였어. 외국 음악을 소개할 때마다 실수를 하도 많이 해서 모니터링 하는 마음으로 보며 맨날 클레임 넣었지. 그러다보니까 정이 생기더라. 너가 지금 888 크루 보는 심정으로.”

채대한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2차전 주제가 중요해. 아무리 888 크루가 방심을 해도 너네 정도는 가볍게 누를 힘이 있으니까, 2차전 주제가 888 크루한테 어렵게 나와야 돼. 걔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거 있잖아. 뭐 쇼 비즈니스라던가, 돈이라던가, 배신이라던가. 그런 좀 애매모한 주제들. 일반 관객들이 공감하기 힘든 주제들.”

드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채대한한테 어디서 건방지게 고개를 끄덕이냐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운이 좀 필요하겠네요.”

“많이 필요하지. 1차전 때 스타즈 레코드가 우승하고, 2차전 대진이 니들과 888 크루로 짜이고, 888 크루의 2차전 주제가 어렵게 나오고. 이 3요소 중 하나라도 안 되면 그냥 하늘이 니들을 패배자 포지션에 두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 3요소가 지켜져도, 너가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어차피 코드네임 다른 새끼들은 시켜도 안하잖아.”

드레드는 채대한의 말 속에 숨은 뜻을 눈치 챘다.

코드네임의 다른 멤버들이 888 크루를 이기는 건 불가능할 테니, 너라도 이상현을 이겨보라는 의미였다.

드레드가 굳게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또 어디 건방지게 고개를 끄덕이냐며 한 대 맞아야 했다.

“내일부터 2차 경연 날까지 매일 백 마디 써올 수 있냐?”

“노력해보겠습니다.”

“노력으로 안 돼. 무조건 해오는 거야. 스케쥴 끝나면 여기로 와라.”

드레드는 채대한이 건네주는 USB를 받고는 방에서 나왔다. 채대한은 나가는 드레드의 뒷모습을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사내새끼들은 계기만 있으면 순식간에 철이 들곤 하지만, 드레드 같이 꼴통에 쓰레기가 이렇게 단숨에 바뀔 줄은 몰랐다.

‘888 크루라…….’

888 크루의 음악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던 채대한이었는데, 이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기에 드레드가 홀딱 반했는지 말이다.

***

드레드가 채대한과의 일을 떠올리는 사이에 888 크루의 멤버 6명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오늘 상미와 민호는 무대에 올라오지 않았기에, 무대로 올라간 멤버는 이상현, 신준형, 김환, 오민지, 박인혁, 신하연의 6명이었다.

멤버가 가장 많은 팀답게, 888 크루가 무대로 올라가자 벌써 무대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888 크루의 등장은 뮤지션과 투표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스태프들의 시선까지 무대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코드네임을 체조선수로 표현한 그들의 음악은 정말 차원이 다른 수준일까? 그들의 말처럼 그들은 권투선수일까? 한동안 쇼 비즈니스계를 뜨겁게 달궜던 트리플 에잇의 수록곡을 부를까?

이러한 호기심이 시선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888 크루, 준비 다 되셨습니까?”

“네!”

상현의 힘찬 대답이 들림과 동시에 888 크루의 팬이라면 꽤나 익숙한 비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공연의 포문을 책임진 오민지, 박인혁, 신하연, 김환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오늘 888 크루가 12분 30초란 프레임에 맞춰서 부를 노래는 총 3곡이었다.

1. 커피머신 With 신하연

2. 탈의실 With 신준형

3. Eight, Eight, Eight Los Angeles Remix

이중 커피머신만 ‘부틀렉 0.5’의 곡이었고, 탈의실과 단체곡 리믹스는 ‘오피셜 부틀렉 트리플 에잇’의 곡이었다.

원래 888 크루는 허태진 피디의 부탁을 받아들여, 1차전에서는 오피셜 부틀렉의 노래를 부르지 않기로 했었다.

오피셜 부틀렉에 대한 힙합 팬들의 관심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오피셜 부틀렉의 수록곡은 3차전이나 4차전에 부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는 허태진 피디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태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오피셜 부틀렉에 대한 반응은 훨씬 좋았다. 2시간 만에 2000장의 초판이 매진되었고, 크로우칭 라이터는 힙합 팬들의 관심에 힘입어 하위권이지만 실시간 검색에서 꽤 오랫동안 랭크되기도 했었다.

결국 기획단계에서 의도했던 어수룩한 래퍼에서 공연으로 반전을 주는 이미지 메이킹은 무산되었고, 1차전에서부터 오피셜 부틀렉 수록곡을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공연의 포문을 여는 곡은 오피셜 부틀렉의 수록곡이 아니었다. 888 크루의 팬들이나 힙합 팬들에게 꽤나 익숙한 노래.

바로 커피머신이었다.

원두의 향은 오직 나로부터

날 판단하는 바로미터

각자의 방식으로 그라인딩.

블루 마운틴, 이건 클라이밍(Climbing)

음악적 영감을 원두로 표현하고, 그라인딩 방법에 따라 각자의 색에 맞는 커피=랩이 나온다는 소재를 택한 커피 머신.

본래는 박인혁, 김환, 오민지의 곡이었는데 오늘 공연에서는 하연의 벌스가 추가된, 4명이 부르는 노래였다.

후렴구가 끝나자마자 박인혁이 특유의 어깨를 들썩이는 모션과 함께 선두로 튀어나왔다.

< Verse 16. 파급효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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